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원이 Dec 23. 2024

저주파의 교란 (1/2)

연작소설

[목차]

◑ 구약의 말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 프롤로그  

♬ 기이한 죽음

♬ 다시 돌아온 죽음

♬ 안팎의 고립

♬ 저주파의 교란

♬ 사교의 주술

♬ 탈출

♬ 격리

♬ 붕괴

♬ 피란

♬ 에필로그


* <저주파의 교란> 줄거리

박요섭은 저주파 교란으로 인해 황폐해진 도시에서 고립된 채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도시는 파괴된 건물과 괴기한 말과 사람들의 잔해로 가득하다. 저주파는 죽은 말들이 내뱉는 소리로, 인간의 감정을 자극해 짜증과 분노를 유발하며, 욕설을 유도하는 특성을 지닌다. 이로 인해 살아남은 사람들은 서로 신뢰하지 못하고, 작은 소리조차 감지되면 죽은 말들이 공격해온다.

박요섭은 물과 식량을 구하러 나서지만, 항상 죽음의 그림자를 마주한다. 그는 웅웅거리는 소리에 내면의 감정이 휘둘리지 않으려 애쓰며, 옛 기억을 떠올리거나 노래를 흥얼거리며 정신을 붙들어 매지만, 점점 무뎌져 가는 감각과 고립 속에서 혼란을 느낀다. 도망치는 사람들의 절규와 죽음이 일상처럼 느껴지는 가운데, 그는 죽은 말들이 서로 다투고 스스로의 살점을 뜯어 먹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 모습은 박요섭에게 어쩐지 희망을 느끼게 하지만, 그 또한 고립된 상황 속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예감한다. 계속된 고립과 죽음의 공포, 그리고 저주파의 영향을 받으며 박요섭은 언제까지 이 생존의 싸움을 이어갈 수 있을지 불확실한 상태에 놓인다.





#1

고요해진 도시는 마치 시간이 멈춘 것처럼 정적에 휩싸여 있었다. 과거의 소란스러움과 활기는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이제는 버려진 폐허가 되어버린 거리에는 파괴된 건물의 잔해들과 부서진 물건들만이 흩어져 있었다. 바람이 건물 사이를 스칠 때면 간간이 먼지가 일어났다. 그마저도 죽어버린 도시의 한숨 같았다.  

박요섭은 부서진 벽 너머로 고개를 내밀었다. 눈앞에 펼쳐진 광경은 그가 알던 세상과 너무나 달랐다. 한때 활기차고 생기가 넘치던 이 거리는 이제 더 이상 사람이 살고 있다는 흔적조차 찾아볼 수 없었다. 잔해들 사이에서 이따금씩 움직이는 존재들이 있었지만, 그들은 사람이 아니었다. 그들의 몸뚱이는 말라비틀어져 있었고, 살아 있는 것이라고 하기엔 너무 기이한 모습이었다. 그들은 천천히, 마치 어디로 향해야 할지 모르는 듯이 도로 위를 떠돌아다녔다.

박요섭은 숨을 죽였다. 저들이 그를 발견하기라도 한다면, 지금 여기서 빠져나갈 방법은 없었다. 저들 사이로 끼어들거나 지나가려는 생각은 도저히 할 수 없었다. 한때 평범한 말이었던 괴이한 존재들이 고요하게 도로를 가로질러 걸어가고 있었고, 그 틈에 함께 있는 죽어버린 사람들, 아니, 더 이상 인간이라 할 수 없는 존재들이 무리를 이뤄 걷고 있었다. 모두 생명 없는 껍데기들, 죽음과도 같은 침묵 속에서 움직이는 모습이 차가운 공포를 자아냈다.

박요섭은 한참을 그곳에 숨어서 지켜보았다. 그들의 움직임은 느리고, 일정한 방향도 없었다. 그저 떠돌 뿐이었다. 하지만 그 무리 속으로 들어가야만 했다. 성문까지 다시 가려면, 저들을 뚫고 나가는 방법밖에 없었다. 성문이 닫혔다는 소식을 도망 오는 사람들에게서 듣고는 망설이다가 확인조차 못하고 일단은 그들 무리와 함께 숨어 지냈다. 그리고 이제 성문으로 가는 길은 죽음의 길이었다. 한순간의 방심으로 저들처럼 끔찍한 존재가 되어버릴 것이 분명했다.     


그렇다고 이곳에서 더 오래 머물 수는 없었다. 박요섭이 며칠 지내던 은신처에는 이제 물 몇 병과 라면 봉지 두 개만이 있었다. 물과 식량이 다 떨어져 가고 있었다. 어차피 죽음이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며칠 간격으로 성문을 향해 나갈 때마다 그는 목숨을 걸어야 했다. 시신들이 도시를 배회하는 틈을 노려 도망쳐 나갈 수밖에 없었다. 저들이 보지 못하도록 숨고,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는 찰나의 순간을 놓치지 않아야만 했다.

박요섭은 아직도 이 모든 상황이 믿기지 않았다. 어떻게 이렇게까지 망가졌는가? 눈으로 보고 직접 겪고 보고도 모든 게 거짓말 같았다. 불과 며칠 전만 해도, 이 도시는 생기로 가득 찼다. 사람들은 상점에서 물건을 사고, 길을 걸으며 웃음소리를 나누었다. 그때는 이런 비참한 종말이 다가올 것이라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그 모든 기억은 희미해져 가고, 불과 며칠 전까지 당연하던 풍경이 환상처럼 느껴졌다. 죽을 고비를 넘기며 극도로 긴장하고 나니 며칠 전의 평온이 그로부터 까마득히 멀어져버렸다. 마치 빅뱅이라는 사건으로 우주의 끝이 순식간에 중심에서 멀어져버렸듯이. 지금 이 순간에 살아남기 위한 싸움만이 박요섭을 지탱하고 있었다.

그는 마음을 다잡았다. 이곳에서 오래 머물수록 위험해질 뿐이었다. 우선은 물과 식량을 구해야 했다. 그것만으로는 근본적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지만, 먹을거리를 구하려고 잠깐만 은신처 밖으로 나온 것으로도 충분히 위험했다. 함께 숨은 무리 중 순번을 정해서 2인 1조로 움직였다. 5분 거리 내에 편의점이 있었다. 그곳에 진열된 음식을 운반해야 한다. 성문까지 가려면 최소 30분은 걸리기에 그 어떤 목적지보다 위험했지만, 가까운 곳을 가더라도 위험하지 않은 건 아니었다. 어디를 가든 매번 죽음의 그림자를 따라가며, 그 그림자 속에서 생존의 기회를 찾아야만 했다. 박요섭은 천천히 일어섰다. 그가 마지막으로 도시를 벗어날 수 있을지, 아니면 저들처럼 그 도로 위에 널브러진 시신 중 하나로 남을지 한치 앞을 알 수 없었다. 솔직히 확률적으로 살아남기란 거의 불가능해 보였다. 굶어죽든, 약탈하던 무리와 만나 먹을 것으로 다투다 죽든. 아니면 말들에게 물려 죽든. 다만, 지금은 아직 살아남을 확률을 붙들고 싶었다. 10분 정도의 시간만 살아남으면 또 하루 정도는 생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밤이 깊어가며 도시는 더욱 쓸쓸하게 가라앉았고, 그 속에서 혼자 남은 자들은 오히려 달빛을 두려워했다. 하늘에 떠 있는 달은 평소보다 커 보였고, 환한 빛이 거리의 모든 흔적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 빛 때문에 숨어 있는 것을 들킬까 두려웠다. 그러나 두려움에도 불구하고 문득 시선이 하늘로 향했을 때 잠시 시름을 잊을 수 있었다. 오랜 시간 신경 쓰지 않았던 별들이 그토록 많았던가. 검푸른 하늘 위에 수없이 박힌 별들은, 이 세상의 혼란과는 동떨어진 채 그저 빛을 내고 있었다. 차마 떠나지 못하는 감정이 스며들었다.

‘이때에 감탄할 일이 맞나?’

불과 몇 십 분 전까지는 ‘야간에 나가는 것이 안전한가, 아니면 단지 인간만이 전방이 잘 안 보이는 것은 아닌지’ 의견이 분분했는데, 무심코 달을 보는 순간, 그 짧은 순간 그 많은 별들이 예전처럼 평온하게 빛나는 것을 보고 있자니,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평화로운 밤처럼 느껴졌다. 하지만 다시 정신을 차리면 그건 헛된 생각일 뿐이었다. 파괴된 도시, 기괴한 말들, 생존을 위해 숨죽여야 하는 현실이 잔인하게 다가왔다. 달빛에 비친 도시의 풍경은 아름답지만, 그 안에 감춰진 공포는 여전히 어딘가에 도사리고 있었다.          





#2  

이곳에는 박요섭 일행만 있지는 않았다. 빌딩 너머 창가에 누군가가 지나가는 것이 보였고, 그 사람 역시 나처럼 숨죽인 채 그들을 피하고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서로에게 존재를 드러내지 않았다. 죽음이 이끄는 도시에선 살아남은 자들끼리도 신뢰할 수 없는 법이다. 박요섭 일행과 가장 가까운 위치에 있는 사람으로는, 도시의 파괴된 대로 한복판에서 뒤집힌 차 안쪽에 두 사람이 몰래 숨어 있었다. 그들 중 하나가 박요섭 일행을 보고 손짓을 했다. 건장한 체구의 사내들이었다. 숨죽인 그들 사이에는 긴장감이 팽팽하게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주변을 살피며 차에서 빠져나와서는 우리 쪽을 향해 낮은 자세로 다가왔다. 불과 몇 십 초의 거리, 몇 십 미터의 거리에 이르자 차가운 콘크리트 벽 뒤에 등을 붙이더니 자기들끼리 작게 속삭였다.

그들은 대화를 하는 것 같았는데, 가만히 보니 한참 동안 말다툼을 하고 있었다. 의견 충돌이 난 이유를 알 길은 없어도, 때에 맞지 않은 말다툼이었다. 소리는 잘 들리지 않았지만, 종종 억센 발음이 들렸다. 마치 그동안 피할 수 없는 갈등이 있었는데, 누구 하나 쉽게 폭발하지 않으려 애쓰는 것 같았다.

"네가 똑바로 안 했잖아!"

한 남자가 성급하게 목소리를 높였다. 그의 얼굴은 분노로 일그러져 있었고, 두 손이 떨리고 있었다. 옆에 있던 남자는 그 말을 듣고는 참지 못하고 소리를 내질렀다.

"내 탓이라고? 그럼 넌 뭘 했는데?”

“욕하지 마, 욕하지 말라고! 그러면 우리 둘 다 죽는다고!”

한 사람이 애써 만류하려고 했지만, ‘그 표정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라면서 상대가 시비를 걸고 있었다. 그 짧은 순간, 그들의 싸움은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격해졌다. 주먹이 나가기 직전이었다. 한 남자가 상대의 가슴을 세게 밀쳤고, 그 충돌 소리가 거리로 퍼져나갔다.

그걸 보는 박요섭은 짜증스러워졌다. 대체 때 아닌 말다툼이라니. 생명이 위험한 상황에서.   

   

그때였다. 말들의 움직임이 순간적으로 멈췄다.

"조용히 해!"

그들 중 하나가 뒤늦게 경고했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말들의 기척이 점점 가까워지자 그들 사이의 긴장은 절정에 다다랐다. 아까만 해도 멀리 있던 말들이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공기 중에 흩어져 있던 그 작은 소리마저도 감지했다는 듯 방향을 바꾸기 시작했다. 그들은 느린 걸음으로, 그러면서도 망설임 없이 소리가 난 곳을 향해 나아갔다.

갑작스럽게 나타난 말들이 그들을 덮치기 시작했다. 거대한 말의 입이 한 남자의 팔을 물어 뜯었고, 다른 남자는 발버둥치며 바닥에 나뒹굴었다. 그들의 비명은 삽시간에 울려 퍼졌고, 죽음의 광경이 눈앞에서 펼쳐졌다. 잔인한 장면은 순식간에 참사로 변했다.

박요섭 일행은 그 광경을 지켜보며 소리 내어 울 수조차 없었다. 그저 숨죽이며 그들의 최후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말들은 그들을 피로 물들이고 다시 도로 위를 헤집고 다녔다.

그때 박요섭의 마음에도 말들에게 저주를 퍼붓고 싶은 마음으로 부대꼈고, 내면에 울렁거림이 생기고, 짜증스럽게 말을 뱉고 싶어졌다. 박요섭은 참으려 했다. 욕설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옆에 있던 일행 역시 굉장히 답답해하며 거친 말을 쏟아내려는 표정을 지었다. 박요섭으로서는 여기서는 소리를 내지 않는 자만이 살아남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절대로 소리 내지 않아야 했다.

박요섭은 골목 사이에서 숨을 죽인 채 주변을 살폈다. 처음에는 말들이 무작위로 거리를 돌아다니는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면서 그들이 일정한 패턴을 따라 움직이고 있음을 느꼈다. 그들은 본능에 충실했다. 단순히 길을 배회하는 게 아니라, 소리를 추적하며 사냥하고 있었다.

그리고 어쩌면 단순히 소리를 유심히 듣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박요섭은 길가에 몸을 숨긴 채, 끝없이 웅웅거리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처음에는 그저 도시의 잔해를 떠도는 바람 소리인 줄 알았다. 하지만 그 소리는 바람 소리가 아니었다. 인간에게는 잘 들리지 않는 소리면서, 내면에서 울리는 소리 같기도 했다. 정말로 주술적으로 저주를 거는 소리 같기도 했다. 분명 단순한 소리가 아니었다. 확실치는 않지만, 웅웅거리는 저주파가 다시 공기를 타고 귀로 흘러들어올 때마다 최면에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그런 생각에 이르자 박요섭은 마음이 이상해지는 것을 느꼈다. 그 소리는 마치 그의 정신을 파고들어, 무언가 말하게끔 유도하는 것처럼 미세한 감정의 동요를 일으켰다. 그 순간 옆에 있던 일행이 갑자기 짜증을 이기지 못하고 욕을 내뱉으려는 것을 눈치 챘다. 눈이 마주치자 박요섭은 강력한 신호를 보냈다. 소리를 내면 안 된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기에, 그는 손을 들어 입을 막는 듯한 동작을 취하며 일행을 저지했다.

말들의 웅웅거리는 소리가 점점 더 강렬해졌다. 가끔 죽은 말들이 울부짖음을 토해내기도 했지만, 그런 울음은 처음엔 비명처럼 찢어졌다가 시간이 흐를수록 그 소리는 웅웅거림으로 변했다. 어쩐지 박요섭은 그 소리가 단순한 소음이 아니라는 심증대로 움직여야 했다. 누군가를 절실하게 부르는 소리일 수도 있고, 달리 말하자면 사냥감을 유혹하는 소리일 수도 있었다. 물론 아닐 수도 있지만, 정말로 그렇다면 그 덫에 걸려들어서는 안 되었다. 이상한 웅웅거림으로 사람의 심리를 자극하는 것이 맞다면 그것으로 어떤 증상이 발생하는지 조심하며 살펴야 했다. 혹시 짜증과 분노를 부추기며, 그 감정이 소리로 터져 나오게 만드는 것으로 분열을 조장하고, 사냥감의 위치를 파악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러한 혐오와 욕설이 지닌 힘이 언어로 드러났을 때 그 소리를 유독 잘 감지하는 것일까. 알 수는 없었다. 그저 도망칠 때 실수로 물건을 떨어뜨려 나는 소리에 대해서는 그다지 민감하게 반응하지 않고 일상적인 소음 정도로 감지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반대로 감탄사처럼 비어져 나온 아주 작은 욕설에도, 그것을 느꼈다는 듯이 갑자기 주위를 돌아보며 신중하게 무언가를 감지하려는 듯했다. 실제로 박요섭 일행 쪽으로 주시하는 것처럼 착각이 들 정도로.

그 순간 박요섭이 있는 방향으로 죽은 말 하나가 웅웅거리는 소리를 보내는 듯했다. 박요섭의 머릿속에서 말들이 웅웅거리는 소리가 다시 울려 퍼졌다. 사람에게 들리지 않는 저주파 같은 느낌이 들었다. 잠깐 혼미해졌지만, 순간 그 이상한 전파 같은, 또는 주술 같은 이상한 울림에 져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박요섭은 그 소리가 자신의 생각을 지배하지 못하도록 애썼다. 그들의 소리에 걸려들어 큰 소리를 내거나 욕설을 내뱉는다면 어쩐지 그들이 바로 반응할 것 같았다. 그러나 그 주문 같은 소리는 그를 점점 나약하게 만들고 있었다.

정확하게 확인할 상황은 아니었지만, 죽은 말들이 눈으로 대상을 보고 추적하는 게 아니라, 소리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쯤은 눈치 챌 수 있었다. 박요섭의 판단이 맞다면, 특정 소리 혹은 일정 수준 이상의 소리를 들으면 그들은 즉시 달려들 것이다. 그러니 아무런 소리를 내서도 안 되지만, 욕설이나 짜증 섞인 말조차 조심해야 했다.

‘조용히 있어.’

라고 말하지 못한 채 검지로 일행의 입술을 막는 시늉을 했다. 물론 그건 일행에게 한 신호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박요섭 자신에게 속삭이는 내면의 말이기도 했다. 박요섭 자신부터 무너지기라도 한다면, 그들은 바로 알아차릴 것 같았다. 며칠 전에 그들의 앞에 서서 본능적으로 숨을 멈췄던 순간이 떠올랐다. 그때 말들은 박요섭을 향해 냄새를 킁킁 맡으며 지나갔다. 그때 그들은 박요섭을 알아채지 못했었다.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침묵 속에서 말들의 움직임을 지켜보았다. 그들은 사람들의 실수를 유도하려 했지만, 그 순간만큼은 유혹에 걸려들지 않았다. 너무 가까워서 걸리면 죽을 가능성이 높았지만, 어쨌든 소리를 내지 않으면 아직은 살아남을 수 있을 것 같았다.          





#3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그 소리 너머에는 더 강력한 무언가가 숨어 있었다. 그들은 공기 중에 웅웅거리는 소리를 흘려보냈다. 그 소리는 물리적인 소리 이상의 것이었다. 마치 내면을 파고드는 칼날처럼, 정신을 잠식하며 감정을 끌어내려는 듯했다. 어떻게든 그 자리를 빠져나가야만 했다. 그러지 않고는 그 이상한 웅웅거림이 내면을 모조리 헤집어놓을 것 같았다. 이미 마음 깊은 곳에서 박요섭은 자신이 어떻게 최후를 맞을지 구체적인 상상이 드러났다. 깊은 곳의 두려움. 이미 상시적으로 퍼진 불신이 점점 증폭되고 있었다. 아무도 믿지 못하고 결국에는 배신을 당해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할 것이란 상상마저 생생해졌다. 옆에 있는 일행과는 이틀 전만 해도 일면식도 없던 사이였다. 서로에 대해 그 사정을 물을 새도 없었다. 그런 사람을 온전히 믿는 것이 어쩌면 어리석은 짓일지도 모르며, 혼자라도 도망쳐야 한다는 생각에 이르렀다.

처음 웅웅거림을 들었을 때는 그냥 흔들리지 않고 침묵을 유지하면 된다고 여겼지만 결코 만만치 않았다. 그 소리는 내면의 깊은 곳을 자극하며 내내 속삭였다.

‘그들에게 말해. 소리쳐.'

그 소리는 욕설을 유도하는 것처럼 끊임없이 박요섭을 도발했다. 짜증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참고 있으면 할 수 있다고 스스로를 다독였지만, 어느 순간 너무 자연스럽게 튀어나올 뻔했다.

"젠장…"

그 순간, 가슴이 철렁했다. 작은 목소리였다. 그 누구도 들을 수 없을 만큼 미세한 소리였다. 옆에 있는 일행조차 듣지 못할 정도로 작은 소리였지만, 박요섭의 가슴은 철렁 내려앉았다. 그는 본능적으로 알아차렸다. 이 작은 소리조차 죽은 말들은 감지할 수 있을 것이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도망갈 자세를 취했다.

길거리를 서성이던 말들의 움직임이 갑자기 멈췄다. 마치 공기 중의 미세한 진동을 포착한 것처럼, 그들은 주위를 둘러보았다. 모든 것이 정지된 듯한 고요함 속에서, 박요섭의 심장은 빠르게 뛰었다. 그들이 방금 자신이 내뱉은 소리를 향해 고개를 돌리면 모든 것이 끝날 것이다. 박요섭의 손은 떨렸다. 숨을 쉴 수 없었다. 길고 깊은 정적이 그와 일행을 감쌌고, 박요섭은 도망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들이 박요섭을 향해 돌아서기 직전이었다.     


그때였다. 건너편 빌딩에서 다급한 소리가 들려왔다. 박요섭은 순간적으로 시선을 돌렸다. 두 명의 남녀가 빌딩 창가에서 다투고 있었다. 남자는 여자에게 분노에 찬 얼굴로 소리치고 있었고, 여자는 눈에 눈물을 머금고 필사적으로 저항하는 듯했다. 싸움이 격렬해지더니, 남자는 여자를 창밖으로 밀어버렸다. 박요섭은 숨을 멈추고 그 장면을 지켜봤다. 여자의 비명은 사방을 뒤흔들었다. 창문 아래로 여자의 몸이 떨어지는 소리가 울리며, 짧은 순간 거리가 그 소리로 가득 찼다.

비명은 잠깐이었지만, 비명 뒤에는 남자의 욕설이 이어졌다. 그는 창밖을 내려다보며 절망에 찬 얼굴로 울었지만, 동시에 분노에 찬 목소리로 거칠게 욕설을 퍼부었다. 그의 말은 누구를 향한 것인지 알 수 없었고, 어떤 감정이 담겨 있는지조차 애매했다. 하지만 그 순간, 그 소리가 말들에게 전해졌다.

말들이 한순간에 방향을 돌렸다. 그들은 방금 전까지 박요섭을 추적하려는 듯했으나, 이제는 멀리서 울려 퍼진 욕설을 향해 반응하기 시작했다. 큰 덩치의 말들이 쏜살같이 비명을 따라 몰려가며, 대로는 다시 긴장감으로 가득 찼다.

박요섭은 그 순간에 겨우 한숨을 돌렸다. 말들이 떠난 빈틈을 놓칠 수 없었다. 그는 옆에 있는 일행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이야. 움직여."

박요섭은 일행과 함께 몸을 숨기고 있던 자리에서 빠르게 빠져나갔다. 도시는 여전히 죽음과 공포로 가득했지만, 그들은 지금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탈출할 기회를 잡아야만 했다.   

  

박요섭은 그 말을 끝내자마자 일행과 함께 몸을 낮추고 빠르게 이동했다. 길을 가로지르며 철저히 말들의 시야와 소리에서 벗어나기 위해 발소리마저 억눌렀다. 도시의 폐허는 숨을 쉴 틈조차 주지 않았다. 파괴된 건물들 사이로 쌓여 있는 잔해와 무너진 차들은 일종의 은신처가 될 수 있었지만, 그 안에 또 다른 위험이 숨어 있을지도 몰랐다.

박요섭은 가슴이 터질 듯이 뛰었지만 최대한 침착함을 유지하려 애썼다. 어두운 골목 사이사이로 빠르게 몸을 움직이며 잔해를 넘었다. 발 아래로 깨진 유리 조각이 보였다. 순간적으로 발을 헛딛었지만, 최대한 소리를 내지 않으려 신경을 곤두세웠다. 일행 역시 말없이 따라왔다. 둘 다 자신들이 낸 소리가 공기에 닿아 말들에게 전달될까봐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못했다.

거리에서 나는 작은 소음 하나에도 박요섭은 신경이 곤두섰다. 먼 곳에서 들려오는 말들의 웅웅거림은 여전히 사라지지 않았다. 그 소리가 언제 그들의 방향을 향할지 모른다는 공포가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땀이 이마를 타고 흘렀고, 그는 손으로 빠르게 닦아내며 옆을 살폈다.

"저기! 헉헉, 시팔 힘드네, 진짜!"

일행이 작은 소리로 신호를 보내면서 자기도 모르게 욕설을 섞었다.

박요섭은 조심하라고 신호를 보내며, 그가 가리키는 방향을 보았다. 가까운 거리에는 폐허가 된 작은 상점이 있었다. 문이 반쯤 부서진 채로 열려 있었고, 그 안은 비교적 안전해 보였다. 박요섭은 고개를 끄덕이며 일행과 함께 그곳을 향해 빠르게 움직였다. 발걸음은 가벼웠지만, 머릿속은 무거웠다. 뒤에서 언제 또다시 말들이 나타날지 모른다는 압박감이 그를 계속해서 몰아붙였다.

마침내 박요섭은 가슴이 빠르게 뛰는 것을 억누르며 상점 안으로 몸을 숨겼다. 진열대 뒤에 웅크리고 앉아 차가운 바닥에 손을 짚고 호흡을 가다듬었다. 잠시 숨을 몰아쉬며 일행이 무사히 들어왔는지 확인하려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이상했다. 그가 바로 뒤따라왔을 텐데, 어디에도 일행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박요섭은 뭔가 불길한 예감을 느끼며 천천히 유리문 쪽으로 다가갔다. 조심스럽게 눈을 돌려 밖을 내다보았다.   

   

그 순간 그의 심장은 싸늘하게 식어버렸다. 거리 한가운데, 일행의 가방이 더 이상 쓸모없다는 듯 내팽개쳐져 있었고, 그것은 분명 일행이 마지막으로 잡고 있던 물건이었다. 하지만 박요섭의 눈에 더 끔찍한 광경이 들어왔다. 일행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물고 있던 죽은 말이 천천히 그를 끌고 가고 있었다. 그 시체 같은 말은 그 긴 목을 쭉 빼고, 당당해 보였다. 사람을 질질 끌고 가는 모습은 마치 무언가 중요한 사냥감을 포획한 사냥꾼 같았다. 일행은 필사적으로 발버둥치고 있었다. 그의 손은 피투성이가 되어 있었고, 발로 상대를 걷어차며 저항하려 애썼지만, 말의 힘은 어마어마했다. 죽은 말의 거대한 머리가 그의 목덜미를 물고 끌고 가는 동안, 그의 몸은 처절하게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박요섭은 그 장면을 보는 것만으로도 입술을 깨물며 견딜 수 없는 불안을 느꼈다. 그러나 공포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죽은 말의 주변으로, 천천히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아니, 그들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었다. 죽은 사람들, 한때 생명이었던 그 존재들이 부자연스럽게 다가와 일행에게 달라붙었다. 그들은 손을 뻗어 그의 옷을 찢고, 팔을 잡아당기고 있었다. 생명 없는 자들이 자신의 먹이를 갈기갈기 찢어 나누려는 듯했다. 일행의 얼굴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그의 입이 크게 벌어졌고, 무슨 소리가 터져 나왔지만, 박요섭에겐 그조차 들리지 않았다.

박요섭은 상점 안에서 그 모습을 지켜보며, 그저 움켜잡은 손을 떨었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오직 그 자신에게 속삭일 뿐이었다.

‘절대 소리 내지 마.’

박요섭은 그 자신에게 다시 한번 다짐했다. 탈출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