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작소설
[목차]
◑ 구약의 말들이 죽지 않고 살아서
♬ 프롤로그
♬ 기이한 죽음
♬ 다시 돌아온 죽음
♬ 안팎의 고립
♬ 저주파의 교란
♬ 사교의 주술
♬ 탈출
♬ 격리
♬ 붕괴
♬ 피란
♬ 에필로그
* <저주파의 교란> 줄거리
박요섭은 저주파 교란으로 인해 황폐해진 도시에서 고립된 채 생존을 위해 고군분투한다. 도시는 파괴된 건물과 괴기한 말과 사람들의 잔해로 가득하다. 저주파는 죽은 말들이 내뱉는 소리로, 인간의 감정을 자극해 짜증과 분노를 유발하며, 욕설을 유도하는 특성을 지닌다. 이로 인해 살아남은 사람들은 서로 신뢰하지 못하고, 작은 소리조차 감지되면 죽은 말들이 공격해온다.
박요섭은 물과 식량을 구하러 나서지만, 항상 죽음의 그림자를 마주한다. 그는 웅웅거리는 소리에 내면의 감정이 휘둘리지 않으려 애쓰며, 옛 기억을 떠올리거나 노래를 흥얼거리며 정신을 붙들어 매지만, 점점 무뎌져 가는 감각과 고립 속에서 혼란을 느낀다. 도망치는 사람들의 절규와 죽음이 일상처럼 느껴지는 가운데, 그는 죽은 말들이 서로 다투고 스스로의 살점을 뜯어 먹는 장면을 목격한다.
그 모습은 박요섭에게 어쩐지 희망을 느끼게 하지만, 그 또한 고립된 상황 속에서 스스로의 운명을 예감한다. 계속된 고립과 죽음의 공포, 그리고 저주파의 영향을 받으며 박요섭은 언제까지 이 생존의 싸움을 이어갈 수 있을지 불확실한 상태에 놓인다.
#4
박요섭은 감상에 빠질 시간이 없었다. 두려움이 전염병처럼 퍼져 나가는 순간, 그의 머릿속을 지배한 것은 단 하나, 살아남아야 한다는 본능이었다. 두려움으로 위축되는 감각은 잠시 잊고, 그는 신속하게 주변을 살폈다. 유리문 바로 앞에 떨어진 일행의 가방이 눈에 들어오자, 그는 조심스럽게 상점 밖으로 나가 가방을 집어 들었다. 다시 상점 안으로 들어와 자신이 메고 있던 가방과 함께 그 가방에 최대한 많은 식량을 담았다.
박요섭은 빠르게 판단해야 했다. 어디서 또 괴생명체가 공격해올지 몰랐다. 그는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크게 나는 포장의 부피만 큰 과자나 무게가 많이 나가는 음식 대신, 가능한 실용적인 것을 선택했다. 녹지 않고 오래 보관할 수 있는 음식, 밟아도 터지지 않는 캔류, 그리고 무엇보다 마실 물을 우선 담았다. 예를 들어 통조림 제품, 특히 참치캔, 황도, 소시지, 생라면 등등 끓는 물이 필요 없고, 오래도록 부패하지 않는 음식 위주로 골랐다. 이제 자신을 포함해 총 세 명이 된 작은 무리가 며칠은 충분히 견딜 수 있을 만한 양이었다. 장기적으로 버티기엔 부족할지 모르지만, 그는 욕심을 부리지 않았다. 많은 양을 가져가는 것보다, 신속하게 움직이고 발각되지 않는 것이 중요했다. 손에 든 것이 많아지면 눈에 띄기 쉬웠고, 아무리 식량이 많아도 들키면 끝이었다. 박요섭은 챙길 것을 챙긴 뒤, 주변을 경계하면서 빵처럼 한동안 먹지 못할 음식을 골라서는 마지막 만찬을 즐겼다. 진열된 물건들을 놓고 가자니 너무 아까웠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시간이 흘러 이 모든 상황에 익숙해지면, 누군가 식료품이 남은 상점들을 약탈하겠지만, 그렇다고 욕심을 부려서 이 모든 음식을 가져갈 수도 없었다. 아깝지만, 애초에 모두가 나와 음식을 실어 나르는 위험 부담을 감수할 수도 없었다. 숫자가 많아지면 발각되기도 싶고 숨는 것을 잘 못하는 사람도 있었다. 약탈자들 역시 아직은 출몰할 상황이 아니었다. 죽은 말과 사람들에 관한 정체를 전혀 모르는 상황에서 그들을 피하거나 다루거나 이기는 법을 알 수 없었기 때문이다. 적을 모르니 패배밖에 없었다. 패배할 것만 떠오르니, 그리 오래 살지 못할 것이므로, 그 전에 성 밖으로 탈출하든가, 아니면 죽음을 맞이하게 될 것으로 여겼다. 그리 많은 식량이 필요치는 않아 보였다.
은신처로부터는 불과 5분 거리밖에 되질 않았지만, 그들이 내면에서 끓어오르는 멀미나는 웅웅거림을 이겨냈을지가 못 미더웠다. 애초에 그것이 위험한 유혹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을 테니 더더욱 그랬다. 알고도 당한 일행을 잠시 생각했다.
박요섭은 거기까지 생각에 미치자, 수건이나 스카프 등을 찾아서 가방에 쑤셔 넣었다. 그리고 자신도 귀를 틀어막으려 솜을 끼워 넣고, 얇은 수건으로 머리와 귀를 감싸고, 턱까지 동여맸다. 그 매듭은 마치 나비 핀처럼 머리를 장식했지만, 모양새가 웃겨도 효과는 있을 것 같았다. 대신 턱을 단단히 조이니 쉽게 입을 열기는 불편해졌다. 그러고 나니 말을 하지 말라는 의지가 조인 수건에서부터 전해졌다. 박요섭은 이내 준비를 마치고 상점의 유리창 너머로 다시 한번 주변을 살폈다. 또 다시 그 웅웅거림이 내면에서부터 울린다면 속으로 노래를 부르고 가장 좋았던 기억을 떠올려보자고 생각하며, 조용히 움직여 최대한 빠르게 은신처로 향했다. 모든 것은 침묵과 속도에 달려 있었다.
박요섭은 주변을 살피며 조심스럽게 한 블록을 가로질러 움직였다. 한때 울부짖음이 넘치던 거리에서 이제는 기괴한 저주 섞인 목소리가 들려왔다. 웅웅거리는 소리는 파도처럼 밀려왔다. 저주를 부르는 파도 같았다. 그래서 저주파란 생각도 들었지만, 죽는 와중에 생뚱맞은 작명이란 생각을 했다. 저주파는 너무도 압도적인 물결처럼 밀려와서는 이제는 내면의 소리인지 진짜로 사방에서 울리는 소리인지 알 수 없었다. 공기를 무겁게 하며 그 안에서 수면에 잠기듯 숨이 막히는 착각마저 들었다. 소리는 낮고 무겁게 울려 퍼졌고, 그 음파는 마치 공기 중에 녹아들어 그의 정신을 잠식하려고 했다. 박요섭은 그 소리가 머릿속을 파고들 때마다, 본능적으로 좋은 생각을 떠올리거나, 속으로 노래를 부르며 의식을 분산시켰다. 그렇게 해야만 끊임없이 밀려오는 혼란과 공포에 잠식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러나 박요섭이 멀리서 지켜보는 동안, 그 저주파 소리를 무심코 들은 다른 사람들은 제대로 버티지 못했다. 처음엔 사소한 말다툼으로 시작됐다. 박요섭이 있는 데서 한 블록쯤 떨어진 거리의 사람들이었다. 그들이 몸을 숨기지 않고 거리 한복판에서 서로 논쟁을 벌이고 있었다. 긴장감은 점점 고조되었고, 어느 순간 참을 수 없게 된 듯 주먹이 날아갔다. 누군가 욕설을 내뱉자, 그것이 결정적이었다. 욕설 소리는 너무도 분명하게 공기 중에 울려 퍼졌고, 죽은 말들이 그쪽으로 날카롭게 반응하기 시작했다.
말들의 움직임은 즉각적이었다. 그들은 날카로운 시선을 돌리더니, 빠르게 다툼이 벌어지는 쪽으로 돌진했다. 박요섭은 그 장면을 보고 잠시 발걸음을 멈추었다. 무언가 끔찍한 일이 벌어질 것임을 직감했다. 괴생명체들이 그들 쪽으로 몰려들었고, 인간 무리의 끝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을 박요섭은 본능적으로 알았다.
하지만 지금 자신이 해야 할 일은 명확했다. 살아남는 것, 그것뿐이었다. 박요섭은 곧바로 방향을 반대로 틀었다. 박요섭은 자신이 달려가는 방향에서 달려오는 죽은 괴생명체들이 보았다. 그는 재빨리 인근 빌딩의 어두운 골목으로 몸을 숨기려 했으나, 그곳에서도 비틀거리며 일어나는 죽은 사람을 발견했다. 발병한 자들이 이미 빌딩 안에도 있음을 깨달은 순간, 박요섭은 몸을 돌려 다른 쪽으로 달렸다. 시간이 없었다. 그는 근처 빌딩의 외벽으로 나 있는 비상계단을 발견했다. 그 계단은 위층으로 이어졌고, 박요섭은 망설이지 않고 비상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갔다.
그는 무릎을 굽히고 몸을 최대한 낮춘 채, 3층 높이에서 잠시 숨을 고르며 웅크렸다. 아래쪽에서는 괴물들이 자신을 알아차리지 못한 듯 보였다. 다행히도 그들은 아직 멀리서 벌어지는 다툼에 집중하고 있었다. 박요섭은 그들이 사람들의 분노와 욕설에 반응해 맹목적으로 달려가는 것을 보며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잠시의 방심도 금물이었다. 박요섭은 그저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다. 괴물들이 주로 지상에서만 몰려다니고 있었기에, 적어도 이 빌딩의 높은 층은 상대적으로 안전할 가능성이 있었다. 발병자들은 주로 대로변에서 발생했을 것이고, 높은 층에서 발병이 시작되는 경우는 드물었다. 발병 속도를 고려해보면, 이런 높은 곳에 남아 있는 자들은 피할 시간이 충분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상층부에 은신처를 찾는 것이 최선이었다.
그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걸어 올라갔다. 발걸음을 최대한 가볍게 하고, 금속 계단이 삐걱거리지 않도록 주의했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주변에서 들려오는 작은 소리에도 신경을 곤두세웠다. 죽은 말들이나 괴물들이 그를 쫓아올 수 있다는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계단을 오를 때마다 손에 땀이 배었고, 숨을 크게 들이마시지 않으려 애썼다. 그래도 높은 데로 올라갈수록 마음속에서 들리는 웅웅거림은 점점 약해지고 있었다. 적어도 잠시나마 이 소란 속에서 자신만큼은 발견되지 않기를 바랐다.
그는 결국 빌딩의 가장 높은 층에 도착했다. 문을 살짝 밀어보니, 다행히 잠겨 있지 않았다. 문을 조심스럽게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높은 층은 비교적 깨끗해 보였다. 창문 너머로 황폐해진 도시와 죽은 말들이 지나가는 거리가 내려다보였다. 박요섭은 잠시 숨을 고르며, 바깥에서 들려오는 저주파 소리가 점점 멀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 순간만큼은 살아남았다. 하지만 언제까지 고비를 넘기며 생존을 지속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었다. 성 밖 탈출은 생각하지 못한 채, 확보한 식량을 하루에 한 끼, 소량만 먹으면서 버텼다.
#5
박요섭은 고층 빌딩의 가장 높은 곳에 웅크리고 있었다. 창문 너머로 내려다본 거리에는 여전히 죽은 말들이 활보하고 있었고, 그들 사이로 흩어지는 사람들의 혼란스러운 움직임도 보였다. 그 말들이 계속해서 웅웅거리는 저주파 소리를 흘려보내고 있었다. 그런데 박요섭은 고층에 있으면서 저주파의 강도가 확실히 약해졌음을 느꼈다. 그들의 저주파는 공중보다는 지면을 향해 쏘는 듯했다. 말들은 주로 거리 위의 대상들을 사냥하는 것 같았고, 그 덕분에 박요섭은 조금이나마 안심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안도감은 오래가지 않았다. 저주파의 직접적인 영향에서 벗어났다고는 해도, 박요섭의 내면에서는 더 깊은 싸움이 시작되었다. 고층에서 홀로 고립된 채 오랜 시간 동안 혼자 견뎌야 한다는 사실이 서서히 그를 무너뜨리고 있었다. 고독이 몰려오고, 희미하게 남은 배고픔과 암담한 미래가 그를 조여 왔다. 눈앞에 펼쳐진 도시는 죽어 있었고, 그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길은 보이지 않았다. 이곳에서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다.
고요 속에서 그는 점점 스스로의 감정과 마주했다. 처음에는 침묵을 유지하며 정신을 다잡으려 했지만, 고립 속에서 더 이상 버티기 어려운 순간들이 찾아왔다. 말하고 싶은 충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입 속에 가득 찬 말들이 천천히 떠오르며 터져 나오려 했다. 고통스럽게 삼켜내며, 그는 겨우 그 충동을 억눌렀다. 하지만 이 상황에서 스스로 감정을 완전히 차단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마음속 깊은 곳에서 두려움과 분노가 점점 더 강렬해졌다. 고립은 생각보다 더 잔인한 적이었다.
배고픔과 미래에 대한 불안이 섞여가며, 고독이 증폭될 때마다 박요섭은 혼자서 겨우겨우 옛날에 좋아하던 노래를 속으로 흥얼거렸다. 어릴 적 들었던 익숙한 멜로디, 따뜻한 순간들이 떠오르며 마음을 잠시 달랠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마저도 오래 가지 않았다. 오히려 그 기억은 그리움과 슬픔을 동반했다. 과거의 행복한 순간들을 떠올릴수록, 지금 자신이 처한 이 끔찍한 현실과의 대비가 선명해졌다. 그 순간 눈물이 났다. 스스로를 단단히 다잡으려 했으나, 그 감정의 격류를 완전히 막아내지는 못했다.
가장 큰 공포는 자신의 입에서 원망의 욕설이 튀어나올지 모른다는 것이었다. 자칫하면 저 아래를 배회하는 죽은 말들이 미세한 소리를 감지하고, 순식간에 자신을 발견할 것이다. 결국 모두가 죽고 없어 의미가 끝나버린 세상에서 외로운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공포가 그를 휘감았다. 분노와 좌절을 토해내지 않기 위해 그는 입술을 깨물고 손으로 입을 막으며 스스로를 억눌렀다. 스스로를 철저하게 검열하며, 절대 실수하지 않으려 애썼다.
하지만 그럴수록 더 지쳤다. 그의 정신은 이미 너무 오랫동안 이런 감정을 억누르며 지쳤고, 스스로의 감정을 검열하는 것은 점점 더 힘겨운 싸움이 되었다. 그는 자신이 이렇게 지쳐가는 순간을 느끼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에 대한 확신이 흔들렸다. 저 아래를 돌아다니는 죽은 괴생명체들만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이 가장 큰 적이 되고 있었다.
그는 끝없이 자신을 다잡으며 버텼다. 숨소리조차 크게 내지 않으려 했고, 마음속에 밀려오는 공포를 잠재우기 위해 끊임없이 스스로에게 경고했다.
"절대 소리 내지 마. 말하지 마. 들키면 끝이야."
박요섭은 고층 빌딩의 창가에 웅크린 채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멀리 지상에서는 검은 머리들만 보이는 사람들이 종종 다툼을 벌였고, 그럴 때마다 어김없이 죽은 괴생명체들이 그들을 향해 몰려들었다. 처음 그 광경을 봤을 때, 박요섭은 경악했다. 사람들의 비명은 공기를 가르며 날카롭게 퍼져나갔고, 괴생명체들의 움직임은 잔인하고도 무자비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그 끔찍한 장면들도 점차 일상적인 풍경처럼 느껴졌다.
비명 소리는 이제 바람에 날리는 먼지처럼 흐릿하게 들렸다. 공중으로 흩뿌려지는 비명은 분무기에서 분사되는 물방울 같았다. 물방울이 공중에서 산산이 흩어지듯, 사람들의 절규 역시 박요섭에게 더 이상 뚜렷하게 다가오지 않았다. 그 소리는 모호했고, 멀리서 들려오는 공허한 소음에 불과했다. 그는 비명을 듣고서도 감정의 큰 파동 없이 그것을 일상의 풍경으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그 모든 광경은 생생한 진실이라기보다는 어딘가 멀리 떨어진 꿈결 같았다.
박요섭은 어두운 영화관에 홀로 앉아있는 기분에 빠져들었다. 거대한 스크린 위에 투사된 영상 속에서 사람들이 도망치고, 싸우고, 비명을 지르며 괴생명체들에게 사냥당하는 장면들이 연속적으로 펼쳐졌다. 그 장면들은 선명했지만, 자신과는 무관한, 단지 스크린 너머의 이야기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그 영상 속에서 일어나는 끔찍한 일들을 무심히 바라보며, 그것이 픽션처럼 느껴지는 현실에서 자신이 분리된 것 같은 감각을 맛보았다.
심지어 마음속 깊은 곳에서 불현듯 안도가 솟아올랐다.
'나는 저 아래에 있지 않다.'
그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 비명을 지르는 사람들이 사라져가는 광경을 보며, 자신은 그 운명을 함께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감을 느꼈다. 도망치는 이들의 절규가 들려올 때, 그는 그들을 응원하고 안전을 기원하는 마음이 들기도 했지만, 동시에 이 긴박한 상황을 관찰하는 자신이 특별하다는 모순된 감정도 스며들었다.
죽은 괴생명체들이 몰려들고, 사람들이 처참하게 끝나는 장면이 반복될수록, 박요섭은 자신이 그들의 운명을 지켜보는 오래된 관람자처럼 느껴졌다. 식상한 느낌도 들었다. 끊임없이 이어지는 비극을 보면서도, 이제 그는 그 상황에 완전히 몰입하지 않았다. 그렇게 그는 무너져가는 세상의 중심에서 한 발짝 떨어져, 그 파괴의 서사를 차분하게 감상하는 기분에 사로잡혀 있었다.
박요섭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이 복잡한 감정에 혼란스러웠다. 그 아래에서 일어나는 참상을 온전히 외면할 수는 없으면서도, 동시에 현실감이 점차 희미해지는 가운데, 그 비극에서 분리된 자신을 발견했던 것이다. 또 그러한 모순을 혼란스러워 하면서 다행스럽게 여겼다. 죄책감을 지니는 편이 생존을 위협받는 쪽보다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그의 시간 감각도 무뎌졌다. 일주일쯤? 아니, 이주일쯤 지났을까? 이제는 시간의 흐름조차 제대로 가늠할 수 없었다.
거리에는 사람들이 거의 보이지 않았다. 가끔 보이는 인간의 모습도, 예전처럼 두려움과 혼란에 빠진 사람들이 아니었다. 이제는 배고픔에 지쳐 흐느적거리며 길거리를 헤매는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무엇이라도 먹기 위해, 그저 굶주린 몸을 끌고 아무런 방비 없이 거리를 배회했다. 그러나 그들의 운명은 너무나 뻔했다. 어김없이 죽은 말들과 괴생명체들이 그들을 발견했고, 그들은 곧바로 식사 거리가 될 뿐이었다. 박요섭은 그런 광경을 지켜보며 점점 무감각해졌다. 사람들이 괴생명체의 먹이가 되는 장면도, 그저 반복되는 일상의 일부가 되어버렸다. 마치 그들의 죽음이 하나의 자연스러운 순리처럼 느껴지기 시작했다.
사람들 중 일부는 그보다 더 비참한 최후를 맞이했을 것이다. 거리로 나가다가 죽는 대신, 은신처에 숨어서 아사한 이들도 있을 것이다. 그들의 몸은 지금쯤 어딘가에서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부패하고 있겠지만, 박요섭은 그 냄새를 맡을 수 없었다. 그는 이제 그런 것들을 신경 쓸 여력조차 없었다. 무언가가 썩어가고 있다는 걸 알면서도, 그것이 자신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듯 느껴졌다. 더 이상 다른 사람들의 고통과 죽음은 그의 감각에 닿지 않았다. 그의 감각은 점점 더 무뎌졌고, 정신은 침묵 속에서 점차 마비되고 있었다.
그러나 박요섭은 어느 순간부터 스스로가 바깥에서 죽어가는 사람들처럼 될 것이라는 사실을 점점 더 확실히 느꼈다. 모든 것이 이제 자신에게로 다가오고 있었다. 창밖에서 굶주린 사람들이 괴생명체에게 잡아먹히는 광경을 지켜보면서, 박요섭은 불현듯 자신의 최후를 떠올렸다. 이 은신처 안에서 결국 그는 굶어죽을 것이고, 그의 몸도 그렇게 고약한 냄새를 내며 천천히 썩어갈 것이다. 아무도 그의 존재를 기억하지 않을 것이고, 그도 언젠가 다른 사람들이 그랬듯이 잊혀질 것이었다.
그런 미래는 막을 수 없었다. 박요섭은 그 사실을 어렴풋이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서운 예감이 들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불가피한 운명임을 받아들이려 했다. 희망은 더 이상 없었다. 이제 남은 것은 서서히 다가오는 결말을 맞이하는 것뿐이었다.
그때까지는 하루하루가 흘러갈 뿐이었다. 박요섭의 머릿속은 점점 비어갔다. 더 이상 생각할 것도 없었다. 아무런 목적도, 계획도 없이 하루를 보내며, 기계적으로 남은 식량을 입에 넣고, 창문 밖을 바라보는 것 외에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그가 이곳에서 나간다는 생각을 할 수 없었기 때문에, 다른 모든 생각들도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그는 몇 번이나 스스로에게 물었다.
'나가야 할 때가 올까?'
이제 남은 식량이 얼마 없었다. 식량이 완전히 떨어지면 다시 나가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지만, 그조차도 막연한 가능성에 불과했다. 다시 밖으로 나가게 될지조차 확신할 수 없었고, 나간다 해도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더더욱 알 수 없었다. 굶주림과 두려움이 모든 감각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즈음 우연히 보았다. 말들도 며칠 동안 근처를 배회하다가 자기들끼리 다툼을 일으키는 듯했다. 그 다툼은 한쪽이 더는 움직이지 않을 때까지 계속 되었다. 주로 죽은 말들이 죽은 사람들을 물어뜯고는 그동안 먹지 않던 죽은 자들의 썩은 살점을 뜯어먹었다. 그것을 입안에 넣고 오물거리다가는 냄새가 아주 고약한 듯 다시 토해내면서도 억지로 뜯어 먹었다. 그렇게 뼈만 남거나 상반신만 남아서 더는 움직이지 못하거나 목이 없어 더는 방향을 찾지 못하는 괴생명체가 사방에 널브러져 있었다. 더는 움직이지 않거나 더는 위협적이지 않은 모습으로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그러다가 말들끼리도 다툼이 일었는데, 무리 중에 가장 약해 보이는 말이 여럿에게 물어뜯긴 채 죽은 사람의 신세처럼 바닥에 널브러져 있기도 했다. 그 중에 상반신이라도 남은 채 간신히 살아서 버둥거리던 괴생명체는 감히 또 다른 괴생명체에게 도움을 청하지도 못했다. 그런 경우 중 어떤 괴생명체는 또 다시 약한 존재를 공격하며 썩은 살점을 역겨운 듯 토해내면서도 뜯어먹었기 때문이다.
그때 박요섭은 조금 믿기지 않은 장면을 보았다. 그렇게 낙오한 괴생명체 중 자기에게 살점이라도 남은 녀석들이 바닥으로 기어가면서 어디론가 몸을 숨기고 경계하더니 자기 앞발을 물어뜯어 먹고는 비명을 참으며 살점을 토해내고 다시 그 행위를 반복했던 것이다. 그들은 위에서 그들을 내려다 볼 것이란 상상도 못했을 것이고, 이미 저주파를 쏘아 사냥감이 바로 앞에서 걸려들어도 그들을 어쩌지 못할 나약한 존재였다. 그들은 그렇게 며칠을 버티다가 결국 숨을 놓았다. 죽은 자들이 다시 한번 죽어, 영영 죽은 것이다.
박요섭은 어쩐지 희망이 샘솟는 듯했다. 그들은 스스로 죽음을 선택한 것일까? 아니면 살기 위해 자신의 살점조차 뜯으려 하면서 고통스러워했고, 썩은 살점을 다 먹지도 못하고 게워내었던 것일까? 알 수 없지만, 도통 알 수 없지만, 사람이 모두 사라진다면, 이곳에서 결국 자신들끼리 사냥을 하다가 괴멸할 시점이 올 것이란 생각에 이르렀던 것이다.
박요섭은 순간 자신의 마른 팔뚝을 보았다. 물어뜯는 시늉을 하다가, 이내 그만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