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목차: 한여름에 우주]
제1장. 그때 우주
제2장. 우주의 부재
제3장. 우주에 하나
[소개글]
- 이 성장소설은 스냅사진처럼 짧게 찍은 어떤 풍경을 통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콩트처럼 운영하지만,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구상하였다.
- 엄마의 정보가 담긴 대목. 빨간 딱지 붙은 집에 도착해서 곧장 학원 갈 채비를 하는 동안, 일본에서 온 편지를 발견한다. 학원 끝나면 우주를 만날 것이다.
♬ 엄마
엄마의 작업실에서 골든베르크 협주곡 선율이 새어나왔다. 소리가 더 커지고 있었다. 골든베르크 협주곡이 흘러나올 때는 대개 만화를 그리는 순간이다. 순정만화작가인 우리 엄마는 주로 혼자서 작업한다. 삼성동에 자리한 작업실에서 근무하는 누나들에게 원고를 넘기기 전까지 보통 집에서 스케치하는 편이다. 인기 순정만화작가인 엄마는 매주 넘기는 원고를 거를 수 없었다.
그런데 집안 분위기는 그렇지가 못했다. 일단 사방에 보이는 빨간 딱지가 그랬다. 엄마는 힘이 빠져 보였다. 우리 가족은 졸지에 누군가에게 쫓겨나는 신세가 된 것이다. 엄마는 내색하지 않았지만 원래 드라마만 봐도 눈물을 흘리는 여린 분이 아무렇지도 않은 척 굳은 표정을 짓곤 했다. 우리 엄마도 어쩐지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몰래 눈물을 흘릴 것이라고 상상하니 서글펐다. 친구들은 갑작스러운 내 전학 소식을 의아하게 여겼다.
하지만 우리 집은 원래 자주 이사 다녔다고 얼버무렸을 뿐 진짜 이유를 말해주진 않았다. 사실 돈이 없어 본 적이 없어 돈이 없는 게 어떤 건지 제대로 실감 나지 않았다. 더군다나 아버지가 곧 해결할 거라고 했다. 아버지의 말씀은 어쩐지 믿기 어려웠지만 설령 불행이 현실이 되더라도 질질 짜는 일은 없을 거라고 다짐했다.
4년 전 뜬금없이 노래방 반주기 사업에 뛰어들겠다고 선언했던 아버지를 말렸어야 했다. 돈을 놀리느니 크게 굴려보겠다며 호기롭게 말했던 순간이 기억난다. 처음부터 엄마와 내 의견 따위는 염두에 두지 않았다. 원래 고집 센 분이니까. 하기야 사업을 본격적으로 하려면 정착해야겠다는 말에 엄마와 나는 나쁘진 않았다. 엄마는 아들 공부 때문에 강남에서 계속 거주하길 바랐고 나는 제대로 친구를 사귀고 싶어 오랫동안 한 곳에 거주하고 싶었다. 결국 아버지의 사업 덕분에 4년 정도 한 곳에 머물 수 있었다.
♬ 일본에서 온 편지
“일본에 누구 아는 사람 있어?”
나는 식탁에 놓인 편지봉투를 짚으며 말했다. 벌써 두 달 사이 세 번째 보는 이름이었다. 물론 일본어를 모른다. 그래도 눈치라는 것이 있어 보낸 이란에 똑같은 일본어로 쓰여 있으니 동일인이 보낸 것으로 여겼다. 받는 이란에는 정갈하게 한글이 쓰여 있어 한국문화와 일본문화에 익숙한 사람이 보낸 것이라 생각하게끔 했다.
“편지 이리 주고 가방이나 빨리 치워.”
“응.”
엄마는 메마른 어조로 말했다. 말의 느낌은 가팔랐다. 감정이 풍부해서 잘 울고, 로맨스를 꿈꾸는 어린 소녀 때의 기질이 중년여성인 엄마에게 여전히 남아있지만, 이번 이사 탓에 스트레스를 많이 받은 듯했다.
외가가 있는 부산으로 귀향한다는 건 새로운 현실로 진입하는 일이었다. 일종의 불안함이었다. 불안함은 무미건조함으로 이어졌다, 아마도. 엄마는 처음부터 침착한 성격을 지닌 사람처럼 보였다. 만화 속에 모든 낭만을 향한 갈망을 쏟아놓고 정작 현실에선 아무런 감성도 남겨놓지 않은 듯했다. 그래서 아버지의 충만한 열정과 엄마의 무미건조한 침착함은 아무래도 교집합이 없어 보였다.
나는 엄마가 시키는 대로 가방을 들고 내 방에 들어가려고 했다. 그때 거실에 걸린 ‘家和萬事成(가화만사성)’이라는 한자가 쓰인 액자가 눈에 들어왔다. 액자를 마주 보고 벽걸이 텔레비전과 그 위에 가족사진이 걸려 있다.
집안에서 ‘가화만사성’이라는 경구와 어울리는 건 오직 가족사진뿐이었다. 그것은 과거도 완연히 물러난 채 돌아오지 않을 꿈같은 것이었다.
집달관들도 값이 나가지 않을 거란 걸 알았는지 딱지를 붙이지도 않은 액자. ‘가화만사성’이라는 가훈이 한자로 쓰인 액자가 가족사진 옆에 우스꽝스럽게 걸려있다.
가족사진엔 다섯 살이었다는 나와 행복해 보이는 엄마, 아버지 그리고 엄숙한 표정을 짓고 있는 할아버지가 함께 있었다.
할아버지는 한학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듯한 말쑥한 신사의 모습이었다. 어쩐지 신학문을 공부했다고 말하는 게 어울릴 정도로 서구적인 지식인에 근접해 보였다.
나는 방 문턱에서 머뭇거리며 사진과 가훈을 번갈아 보다가 밥 먹으라는 엄마의 말에 가방을 방에 밀어놓듯 놓아두고 식탁에 가 앉았다. 식탁에서는 작업실 문 사이로 서재에 꽂힌 소중한 만화책들이 가압류된 것이 보였다.
나는 짊어지고 온 참고서와 문제집을 꺼내 미리 마련해둔 상자에 집어넣었다. 나머지는 이삿짐센터 직원의 몫이었다. 이제 내일 기차 타는 일만 내게 남았다.
나는 창가로 다가가 밖을 내다보았다. 우주와 나는 아파트 앞동, 뒷동에 살 정도로 가까이 있었지만 드라마에 나오는 주인공들처럼 베란다에서 이야기할 수는 없었다. 내 집과 우주 집은 앞뒤 동이라고 하더라도 나는 3층, 그녀는 9층에 산다. 더구나 아파트 사이는 보통 아파트촌의 간격보다는 먼 편이었고, 사이 공간에는 나무가 심어져 있고, 사람들이 쉬어갈 수 있는 휴식터가 마련되어 있다. 망원경을 들고 우주네를 보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의 눈이 너무 많았다. 설령 아무도 보지 않는다고 해도 휴식터 중간에 설치된 정자 옆에 꼿꼿이 선 커다란 느티나무가 절묘하게 시야를 가렸다. 좀 더 가까이서 보면 행여 보일까 창문을 열었지만 방충망까지만 얼굴을 내밀 수 있었다. 매미울음 소리가 방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나는 빈 가방에 학원교재를 챙겨 넣고 현관문을 나섰다. 엄마가 학원을 잘 다녀오라고 말한다.
“학원에 갔다가 우주 좀 만나고 올게. 아마 늦을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