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들 / 우주의 선물

소설

by 희원이

[목차: 한여름에 우주]

제1장. 그때 우주

제2장. 우주의 부재

제3장. 우주에 하나


[소개글]
- 이 성장소설은 스냅사진처럼 짧게 찍은 어떤 풍경을 통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콩트처럼 운영하지만,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구상하였다.
- 전학할 준비를 마치고 서울에서 마지막 날을 우주와 함께 블루에 가기로 한다. 친구들과 헤어지고, 우주와 뮤직랜드에서 만나 역시나 그녀의 음악 관련 장광설을 듣는다. 우주는 종훈에게 CD를 한 장 선물한다. 메가데스의 음반을.





♬ 친구들

버스가 뮤직랜드 앞에 섰다. 우주는 아직 보이지 않았다. 시계를 보자 30분 일찍 왔다는 걸 알 수 있었다.

학원이 일찍 끝날 것을 미처 예상하지 못한 결과였다. 그룹 과외 멤버인 진웅이, 기혁이, 수현이 그리고 엄마끼리 친해서 연결된 타고교를 다니는 민우까지. 진웅이야 학교에서 매일 보는 사이라 인사할 것도 없었지만 이과생인 기혁과 1학년 때 같은 반 친구였던 수현 그리고 민수와도 헤어지는 마당에 인사할 필요가 있었다. 다른 친구야, 그냥 때가 되면 연락이 자연히 끊길 것이라 생각했지만 어쩐지 중학교 때 삼총사였던 기혁과 진웅과는 연락을 끊고 싶지 않았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나는 어렴풋이 ‘친구’라는 단어의 의미를 윤곽 정도는 더듬은 셈이다.


어쨌든 불법적 행동으로 같은 배를 탄 다섯은 과외선생에게 오늘 수업을 일찍 끝내자고 졸랐다. 엄마들이 알면 경을 칠 일이었다. 더구나 일류강사로서의 긍지를 지닌 과외선생에게 수업을 단축하자는 건 ‘당신 수업 형편없어.’라는 말을 다르게 표현하는 것으로 고액 과외 받을 때 명심해야 할 제일의 금기이기도 하다. 자칫 자존심이 상한 강사가 과외를 그만 두면 우리야 상관없지만 엄마들 가슴엔 대못이 박힌다.

하지만 오늘처럼 특수한 경우는 강사의 긍지를 훼손하지 않으면서 ‘단축’을 유도할 수 있다. 학생들이 불만 없고 비밀을 지킨다면. 만일 누군가 불만이 있어 비밀을 누설한다면, 엄마들은 피 같은 돈이 몸에서 주룩 흘러나와 빈혈을 호소할 수도 있다. 그다음엔 주연배우 엄마들의 공포영화가 시작된다. 공포영화에선 놀러 다니는 학생들 언제나 죽는다.

수현이가 있길 다행이지 그녀가 없었다면 일그러진 민수의 표정을 아무도 막을 수 없었을 것이다. 팥빙수 먹고 싶다는 수현의 말에 금방 웃으면서 나가자고 외치는 민수, 쯧쯧, 너무 티 났다. 아무렴 어떤가. 이곳에서의 마지막 토요일 오후를 비상구가 연결된 작은 강의실에서 끝내고 싶진 않았다.

결국 어렵게 강사의 허락을 받았고 우리는 팥빙수 가게에 가서 수다를 떨었다. 꽤 시간을 보냈다고 생각했지만, 여전히 시간이 남았고, 교통 상황까지 평소 토요일 오후답지 않게 원활했다.





♬ 우주의 선물

뮤직랜드 앞에 서서 제목 모르는 팝송에 귀를 기울였다. 안에는 CD를 고르는 남녀로 붐볐고 쇼윈도에 비친 팔짱 끼고 걷는 연인의 표정이 밝았다.

‘덥겠다.’

이렇게 연인에게 시선이 쏠릴 때 ‘꽝’하고 폭발음 같은 큰 소리가 퍼졌다. 스피커에서 강렬한 랩메탈 음악이 울리기 시작했다.

“저것들, 여름에 저러는 건 좀 오버다.”

어느새 슬며시 옆에 선 우주는 방금 지나친 연인들을 돌아보며 혼자 중얼거렸다. 차림새는 슬리퍼만 운동화로 바뀐 힙합차림으로. 마치 그녀의 등장을 예고한 듯이 랩메탈의 느낌은 우주의 차림과 어울렸다.

“이게 네가 항상 말하던 레이지 어겐스트 머신이냐?”

“응. 한번 듣고 기억하네. 어때? 죽음이지 않냐?”

우주는 어깨를 좌우로 살짝 흔들며 양 엄지손가락을 바지 주머니에 꽂고 손바닥으로 장딴지를 두드리며 오른발의 미세한 장단과 교감했다. 스스로 드러머가 된 것처럼 집중했다.

“잠깐만 이 곡만 듣고 들어가자.”

“어딜? 여기?”

“응.”

“왜?”

“너 CD 하나 사주려고.”

“정말?”

“응. 잠깐만 조용히 해봐 봐.”

“알았어.”

그녀는 음악에 집중했다. 난 일행이 아닌 척하고 싶었지만 그냥 쇼윈도에 진열된 CD들을 살폈다.

“뭘 살까?”

드럼의 마무리로 음악이 끝났다. 우주의 드럼 흉내 내는 엇박자도 끝맺었다. 레이지 어겐스트 머신의 곡 뒤에 가요가 흘러나오려고 했다.

“야, 이 노래 요즘 인기 있는…….”

“이거 죽음이야. 덥다. 들어가자.”

‘지 마음대로 쟁이!’

그녀는 내 손을 낚아채듯 잡더니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날 안으로 유도했다. 그렇게 미소를 지어버리면 그 능청스러움에 그만 웃고 말았다. 허탈해도 어쩌랴.

그나저나 우주의 ‘죽음’을 잘 해석할 필요가 있다. 그렇지 않으면 해석의 오류를 낳기에 십상이다. 오류를 없애기 위해서는 표정과 어조를 잘 살펴야 한다.

예컨대 ‘Oh, my God!’을 느리고 평탄하게 발음하면 ‘오, 나의 신이시여!’가 되지만 한 어절처럼 빠르게 이어 발음하면 ‘오, 맙소사!’가 된다. 마찬가지다. 우주가 호의적인 표정으로 부드럽거나 신이 나서 ‘이거 정말 죽음이야.’라고 하면 ‘정말 최고야.’지만 무뚝뚝하고 단호하게 혹은 신경질적으로 말하면 ‘이거 정말 쓰레기야.’ 정도로 해석하면 무방하다.

레이지 어겐스트 머신은 전자요, 가요는 후자였다. 우주는 나를 끌고 들어가자마자 계산대로 가더니 직원에게 레이지 어겐스트 머신을 틀어달라고 주문한다.

‘정말 못 말리겠군.’

“어, 우주구나.”

직원 중 한 남자가 웃으면서 우주에게 인사를 건넸다. 그러자 뒤를 돌아본 여자직원 하나도 우주에게 알은체했다.

“잠깐만 기다려. 너 나갈 때까진 하드코어로만 깔게.”

헉.


“오늘 블루 상영한대요. 시간 있으면 오세요.”

우주는 능청스럽게 오늘의 영화까지 홍보하더니 내 손을 잡고 끌다시피 록 코너로 다가갔다. 이 녀석 도대체 뭐란 말인가!

아무래도 그녀에게는 고상한 유럽예술영화보다는 ‘난 널 썰어버리고 말 거야.’라는 식의 하드고어나 슬래쉬 무비가 더 어울린다. 하드코어나 스래쉬를 좋아하면, 발음하기라도 편하게 하드고어나 슬래쉬 무비를 좋아할 것이지 머리 아프게(귀는 이미 아팠고) 『블루』, 『화이트』, 『레드』가 뭐냔 말이다.

뮤직랜드 안에 드디어 레이지 어겐스트 머신 음악으로 꽉 찼다.

레이지 어겐스트 머신은 닌자가 표창을 촉, 촉, 촉 날리듯이 쉴 새 없이 강렬하고 거친 말과 음을 쏟아냈다. Fuck, Fuck 해대는데 정신 산만했다. 뭐가 그렇게 불만인지 ‘레이지 어겐스트 머신(기계에 대한 분노)’이 대체 뭐란 말인가. 슬레이어(대량학살자)와 메가데스(핵전쟁 일어났을 때 사망자를 세는 수치: 1메가데스=사망자 1백만 명)보다야 낫지만 우울하긴 마찬가지다.

우주는 레이지 어겐스트 머신의 기타리스트처럼 명문대를 나온 후 정의를 위해 한몫하겠다고 떠벌렸다.

‘너 잘났다.’

좋은 건 다 자기가 한단다.

“검사 하면 반항아 하기 힘들어.”

나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아니야, 난 다 할 수 있어. 한꺼번에 하는 게 여의치 않으면, (어쩌고저쩌고).”

‘그래, 너 다 해라.’

나는 그녀의 말을 귓등으로 흘리면서 록 코너에 진열된 음반들을 살폈다. 모르는 가수가 너무 많았다. 앨범 표지는 내 기준에서는 거부감이 일었다. 머리를 닭볏처럼 세우고 눈을 부라리는 건 기본이다. 대체 왜 해골이 그려놓은 음반이 잘 팔리는 건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우주야, 이왕 사줄 거면 내가 듣고 싶은 거 사줄래?”

“너도 알잖아. 선물은 원래 주는 사람의 마음을 담는 거야. 받는 사람이 어떻게 느끼는지 예상하는 기쁨을 빼앗지 말아줘.”

대체 누가 그 기쁨을 뺏었다는 말인가?

“알지. 내 말은 그 기쁨을 뺏겠다는 게 아니라. 단지 듣고 싶어 하는 음악을……”

“그러니까 내 말 좀 들어봐. 네 말이 무슨 말인지 충분히 알지만, (어쩌고저쩌고)”

내 말은 무참히 도륙됐다.

‘내 말이 무슨 말이긴? 흥! 네가 도륙 전용으로 키우는 말이지.’

그녀와 나 사이에 펼쳐진 말의 전장에서 내 말은 피를 뿜으며 비명조차 지르지 못하고 토막 났다.


“알았어. 알았다고. 그런데 설마?”

우주는 멋쩍은 듯 살며시 미소 지으며 CD진열대에서 「Countdown to Extinction(멸망을 향한 초재기)」을 짚는다.

‘오, 마이 갓!’

해도 너무 한다. 취향이 아니라고 그렇게 넌지시 말했건만 우주에게 그 말이 도무지 먹히질 않는다.

“또 메가데스?”

“계속 듣다 보면 좋아질 거야. 이왕이면 앨범 모두를 들어보는 게 낫잖아.”

“앨범 모두?”

순간 아찔했다. 그녀는 내 생일에 가장 좋아하는 그룹의 CD라며 메가데스의 음반 「Rust in Peace(녹슨 평화)」를 선물했었다. 물론 그 조그만 판에 담긴 음악은 절규요, 고통이었다. 우주에게는 “훌륭한 음악이지만 내 취향은 아닌듯해.”라고 완곡히 표현했다. 그게 실수였을까? 그녀는 올해 초 자신의 생일에 ‘내가 메가데스를 받는 게’ 자신이 받고 싶은 선물이라며 나에게 메가데스의 2집을 사주었다. 그리고 오늘 나에게 세 번째로 메가데스를 사준 것이다. 아, 이 집요함.

혹여 그녀가 나에게 장난스럽게 사귀자고 했을 때 장난스럽게 제안을 받아들였다면? 그래서 각종 기념일을 서로 챙겨주었다면? 아마도 난 메가데스의 객원멤버가 되어버린 착각에 빠지고 말았을 것이다.

“난 말이야, 내가 좋아하는 걸 내가 아끼는 사람들과 공유하고 싶어. 같이 느끼고 같이 수다 떨면서 서로 가깝다는 걸 확인하는 건 참 기분 좋은 일이야. 특히 사귀는 사람이랑은 콘서트나 클럽에도 같이 가고 영화, 시, 음악을 보고, 읽고, 들은 후 토론을 벌이는 거지. 어때? 좋을 것 같지 않니?”

‘좋긴?’

“좋아.”

같은 말이 다른 어조로 말과 마음에 실렸다. 그녀는 나의 동의를 순순히 이끌어낸 게 매우 흡족한 듯이 보였다.

“그렇지! 그러니까 너, 넌 말이지 내 친한 친구니까 메가데스를 들어야 하는 거야. 응?”

어휴. 허락을 구하는 그녀의 애절한 말투는 상냥한 미소와 함께 시청각으로 접근했다. 어차피 메가데스를 칭찬하든 흉보든, 우주의 말에 동조하든 동조하지 않든 여전히 메가데스를 들어야 했다. 그걸 거부하다간 자칫 메가데스의 앨범 모두를 선물 받을 수도 있었다.

더군다나 우주가 천진난만하게 웃고 있었다. 나는 늘 그녀의 ‘천진난만 공략’에 당하면 안 된다고 다짐했지만, 늘 당했다.

“알았어. 이건 좀 낫겠지.”

“물론! 다른 앨범보단 훨씬 듣기 편해. 이번엔 분명 좋아할 거야.”

무슨 근거로 내가 좋아하게 될 거라고 장담하는지 모르겠지만, 밝은 표정의 우주를 보니 나쁘지만은 않았다.

계산을 끝낸 우주는 ‘기계에 대한 분노’를 깔고 또 하나의 ‘사망자 백만 명’을 내 손에 쥐여주었다. 아, 이 얼마나 스릴 넘치는 할리우드 SF 액션 블록버스터란 말인가.






keyword
이전 06화엄마 / 일본에서 온 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