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목차: 한여름에 우주]
제1장. 그때 우주
제2장. 우주의 부재
제3장. 우주에 하나
[소개글]
- 이 성장소설은 스냅사진처럼 짧게 찍은 어떤 풍경을 통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콩트처럼 운영하지만,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구상하였다.
- 종훈의 아버지와 할아버지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는 대목. 종훈이 집에 도착했을 때 빨간 딱지는 여전하다.
♬ 아버지
아버지가 안정된 인간관계나 익숙한 생활공간을 선호했다면 나도 그런 환경에 영향을 받았을 수도 있겠다. 아버지는 항상 직업란에 ‘개인사업’이라고 적어줬다. 약품을 납품하는 일이라고만 알지 정확한 건 모른다. 어찌 보면 일하는 날보다 골프 치러 다니는 날이 많았으니까. 그래서 꼬마 때는 골프 하고 여행 다니는 게 ‘개인사업’인 줄 알았다. 머리가 굵은 후 얼버무린 아버지의 소득 유형은 아마도 ‘불로소득’이 아닐까 추측하게 된 건 이 때문이다. 상식적으로 대대로 교육자 집안이었다는 아버지 말씀을 받아들이기 어렵다. 교육자가 뼈 빠지게 자신의 일에 충실해 봤자 골프장 근처를 구경할 만한 여유가 생기지는 않을 테니까.
부모님의 대화를 엿들은 걸 짜 맞춰본다면 할아버지는 교사가 되기 훨씬 전부터 유산을 상속해서 부유했다. 할아버지는 소위 땅부자였다. 또한 교사였던 할아버지께서는 전근을 자주 다녔는데, 그분의 경우는 체질적으로 방랑을 좋아했다기보다는 교사로서의 긍지가 있어 잦은 전근을 감당할 수 있었다고, 아버지는 늘 강조했다. 결국 나는 아버지에게서 영향을 받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면 할아버지에게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할 수 있겠다.
한곳에 머무르는 게 지루하다면서 이곳저곳 돌아다니며 생활할 수 있는 사람들은 그렇게 많지 않다. 하루하루 근근이 살아가는 사람들, 아니면 생활 기반을 다 잡은 노인들 정도가 있을 수 있겠다. 아버지는 어느 쪽에도 끼지 않았다. 젊은 데다 돈도 많아 생활에 쫓기지도 않았으니까. 아버지의 방랑벽은 결혼 후에도 여전했다. 아무 이유 없이 홀로 훌쩍 여행을 떠나버리거나, 부부싸움에도 아랑곳없이 가고 싶은 도시로 이사하는 습관이 그랬다. 이사를 할 때마다 아버지는 어린 나를 데리고 근처를 놀러 다녔다. 당시 아버지는 가장 든든한 친구였다. 하지만 이 관계도 기억에 희미한 한 여자 때문에 끝났다.
아버지는 내가 7살쯤 되었을 때 여자 문제로 가정불화를 일으킨 적이 있었다. 지금까지 아버지가 이혼당하지 않고 사는 거 보면, 잘 해결된 것이지만 내가 살가운 가정 분위기를 느끼지 못하는 건 이 때문이 아닐까 한다.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뚜렷하지 않아 별로 앙금이 남아있지 않지만 아버지가 집에 머문 시간이 길지 않아 친해지기도 어려웠다.
♬ 아버지의 아버지
아버지 말씀에 따르면 할아버지는 독서를 좋아하시고 화초 가꾸는 걸 소일거리로 하셨다고 한다. 한학에도 조예가 깊으셔서 옛 선비처럼 몸가짐을 정갈히 하셨는데, 어린 아버지로서는 할아버지의 권위적인 위엄 때문에 서로 친해지긴 어려웠다고 한다.
아버지는 지금도 틈만 나면 할아버지의 선비적 위풍을 장황하게 묘사한다. 술만 드시면 일장연설이 시작되는데, 내가 공부를 핑계로 빠져나가거나 아버지가 피곤해 주무시러 가기 전엔 지루한 연설이 끝나지 않는 게 보통이었다. 그 장광설은 한마디로 요약하면 4대 독자로서 집안의 역사를 자랑스럽게 받아들여야 한다는 일종의 세뇌교육이었는데, 그게 아버지로서는 간단히 표현할 수 없는 내용이었던가 보다. 늘 단막극이 대하드라마가 된 것을 보면.
생각해보면 ‘4대 독자’라는 타이틀이 가정이 무너지는 걸 막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4대 독자였던 나를 아버지가 놓아줄 리 없었고, 엄마도 이를 알고 남보다 못한 남편과 별거나 다름없는 동거를 하고 있었다.
드디어 우리 동 앞에 이르렀다. 우주네 동은 우리 동 앞이었지만, 우주가 사는 집은 느티나무에 가려져 보이지 않았다.
통로로 들어서자 시원한 기운이 몰려왔다. 금방이라도 다리의 힘이 풀릴 것만 같았다. 3층이었지만 계단으로 올라가고 싶지 않을 만큼 지쳤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려 자동잠금장치에 비밀번호를 입력하고 문을 열었다. 에어컨 바람이 기세 좋게 쏟아졌다. 나는 가방을 던지듯이 내려놓고 운동화를 벗었다. 발 냄새가 몸을 타고 빠르게 기어 올라와 코를 찔렀다. 순간적으로 숨을 쉴 수가 없었다. 연기가 아직 몸에 남은 채 땀을 식힐 때 엄마의 작업실에서 골든베르크 협주곡이 흘러나왔다.
곡의 평안함과 달리 거실에는 온통 빨간 딱지였다. 벽걸이 텔레비전에도, 도자기, 오디오 컴포넌트에도, 소파와 에어컨, 에어컨 옆에 놓인 골프채가방에도 빨간 딱지가 붙어있었다. 녀석은 내게 ‘접근금지’라고 경고하고 있었다.
나는 양말을 벗어들고 깨금발로 곧장 화장실로 들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