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이플 독서실 / 떠난다는 것은,

소설

by 희원이

[목차: 한여름에 우주]

제1장. 그때 우주

제2장. 우주의 부재

제3장. 우주에 하나


[소개글]
- 이 성장소설은 스냅사진처럼 짧게 찍은 어떤 풍경을 통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콩트처럼 운영하지만,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구상하였다.
- 동네의 명문(?) 독서실을 퇴실하면서, 종훈은 추억의 감정을 느낀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전학가야 할 처지였다. 아버지의 사업 부도로.





♬ 에이플 독서실

발바닥이 화상을 입을 것처럼 뜨거워 다리를 번갈아 들고 있을 때 우주는 캔을 내 손에 살며시 쥐여주며 그만 들어가자고 말했다. 당연히 캔은 비어 있었다. 드디어 무더위를 모조리 빨아들이는 피뢰침의 임무를 벗을 수 있었다. 벼락을 맞는 것보다는 나은 것일까?

우주와 나는 두 층을 내려와 독서실로 들어섰다. 입구부터 선선한, 축복받은 기운에 온몸을 맡겼다. 우주는 입구 근처에서 잠시 꼼지락거리더니 먼저 독서실 복도에 들어선 나를 불러 세웠다. 그러고는 새 콜라를 한 캔 건넸다. 우주는 손가락으로 6을 표시하며 여자열람실 복도로 빠르게 걸어가서 벌집(이건 정말이지 벌집이다) 문을 열고 사라졌다.

학생관리 잘 해주는 걸로 소문난 에이플에 들어오기 위해서 난 석 달 넘게 기다렸다. 엄마는 ‘학생관리가 최고’라는 명성에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1년 치 선금까지 걸고 아들을 독서실 입실시키기 위해 노력했고 결국 원하는 것을 성취했다. 아마도 급작스럽게 부산으로 이사 가지만 않는다면 대학 들어가기 전까지 난 독서실 총무의 주요 관리 대상으로 묶여있었을 것이다. 입실시간, 퇴실시간뿐 아니라 정기적으로 누구와 어울리는지 인적장부를 작성해서 ‘문제의 인물’로 기록되면 일차 경고를 받고, 이차 경고 때는 원장과 상담해야 했으며, 삼차 경고 때는 부모와의 상담을 거쳐 최종 퇴실조치까지 내리는, 말하자면 수용소였다.


하지만 등잔 밑이 어두운 법이다. 독서실은 큰 욕심만 내지 않으면 고등학생들이 한여름에 숨기 좋은 곳이기 때문이다. 집에서도 잔소리 듣지 않을 만큼 명분이 섰고 여자 친구와 함께 자연스럽게 다닐 수도 있었다. 잠을 자도 쉽게 들키지 않았다. 고등학생들에게는 화장실 다음으로 사생활이 보장되는 면도 있었다.

심하지 않을 정도라면 총무를 구워삶아 얼마간 놀러 다닐 수도 있었고 눈치껏 담배를 태울 수도 있었다. 우주도 도가 지나치지 않은 범위에서 자유롭게 놀러 다녔다. 더구나 우주의 경우는 다른 학생보다는 운신의 폭이 넓은 편이었다. 우주는 독서실의 홍보수단이었기 때문이다. 독서실 입구엔 ‘OO고등학교 전교 1등 입실’ 따위의 플래카드가 걸리곤 하는데 우주가 입실했을 때도 그랬다. 우주의 입실 이후 독서실엔 학부모의 전화가 폭주했다는 후문이다.





♬ 떠난다는 것은,

나는 멀끔히 우주가 방안으로 쏙 들어가는 걸 지켜보았다. 평소답지 않은 걸 증명하는, 시원한 캔 콜라를 들고 있었다. 뒤에서 독서실 총무의 따가운 시선이 내 뒤통수를 찔렀다. 아직은 한 달이 채 되지 않아 요령 없이 시선에 힘이 바짝 들어가 있었다.

인제 마지막이라는 생각이 조용히 뇌리를 훑었다. 나는 총무의 시선을 애써 무시한 채 곧장 남자열람실이 늘어진 복도로 기어들어갔다. 복도는 침묵으로 일관했다. 내가 없어지더라도 또 다른 학생이 채울 테니 내가 사라지는 것쯤은 복도에게 별 의미가 없을 것이었다. 오늘따라 8인용 ‘벌집’ 안엔 아무도 들어있지 않았다. 그도 그럴 것이 기말고사가 끝나고 3일밖에 지나지 않은 데다 오늘은 여름방학식이 있었다. 나는 고2 여름방학식을 끝으로 4년간 정들었던 동네를 떠나야 했다. 친하지는 않았지만 얼굴을 스치고 지냈던 인연들이 하나도 보이지 않는 건 어쩐지 아쉬웠다.

물론 떠나는 게 슬프지는 않았다. 지금까지 이사만 14번에, 초등학교만 여덟 군데를 다녔으니 떠나는 것에 익숙하다. 초등학교 졸업장에 적힌 초등학교는 대구에 있는데, 단지 6개월만 그곳을 다녔을 뿐이다. 어딘가에 정을 붙이는 법보다 정을 떼는 법을 더 일찍 배웠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우주의 평소답지 않은 친절에 떠날 시점이 왔음을 알게 된 건 씁쓸했다. 4년 동안 한곳에 살았다는 사실은 그 시간 동안 한 곳에 머문다는 것만을 의미하는 건 아니었다. 나는 어렸을 적에 춘천이며, 대구며, 전주 등 안 가본 도시가 없을 정도로 자주 이사 다녔다. 심한 경우는 한 달마다 옮기기도 했는데 이런 잦은 이사 때문에 나는 친구 사귀기를 성심껏 하지 않았다. 잦은 이사가 내 생활습관에 영향을 주었던 셈이다. 반대로 나에게는 이례적으로 길었던 시간, 그 4년이라는 시간을 한곳에 머물렀다는 사실도 조용히 내게 영향을 주었다.

하지만 일주일 전, 시험공부를 하느라 평소보다 늦게 귀가한 나는 이상한 광경을 보았다. 집안 물건들에 빨간 딱지투성이였던 것이다.

“네 아버지가 기어이 일을 낸 모양이다.”

엄마는 이미 예견했었는지 뜻밖에 침착했다. 텔레비전을 보면 집달관을 막지 못하고 쓰러진 부인들은 결국 충격으로 드러눕기 마련인데 엄마는 가벼운 한숨만 내쉴 뿐이었다. 나는 갑자기 ‘이런 건 별일이 아닌 거구나.’라고 감정적으로 동화되어 버렸다.

엄마에 따르면 집달관이 사라진 후 전화 한 통이 왔다.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6개월 정도면 사업을 정리하고 빚도 청산하고 집도 처리할 테니, 걱정하지 말고 교육상 좋지 않으니 엄마와 나는 먼저 외가에 가 있으라고 했다는 것이다.

거실을 꽉 채운 에어컨의 시원한 바람이 열에 달아오른 내 몸에서 땀을 걷어냈다. 나는 소름이 돋았다. 4년이라는 시간을 걷어내는 냉기가 쉴 새 없이 내게 들이닥쳤다.

물 흐르듯 하던 땀을 말리려고 에어컨 앞에 잠시 섰다. 몸은 다시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긴장할 준비를 해야 했다. 나는 사물함을 열었다. 마지막 한 번 정도 옮길 만큼의 참고서와 문제집이 쓰러져있었다. 모조리 챙겨 빈 책가방에 넣으니 책가방은 임산부의 배처럼 볼록해졌다. 에어컨만이 웅웅거리며 소리 냈다. 벌집 안에서 유일하게 내가 이사하는 것을 아는 척했다. 가방을 짊어지고 복도를 나섰다. 들락날락 거리는 학생이 한 명도 없었다. 아직은 서먹한 총무의 옆모습이 보였다. 그도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가볍게 웃으면서 총무실 창구를 열었다. 고개를 창구높이에 맞추었다. 총무도 고개를 들어 나와 눈높이를 맞추었다.

“여기 열쇠요. 오늘이 끝이거든요.”

“잠시만.”

그는 열쇠를 받아들고 책상 서랍을 뒤적였다. 거기서 봉투를 집어 오천 원짜리 한 장을 꺼내어 내게 내밀었다.

“158번, 김종훈 학생, 열쇠보증금 그대로네.”

나는 돈을 받아 들고 고개를 까닥거리며 어색한 인사를 했다. 독서실을 나와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책가방은 거북이 등 껍데기처럼 단단하고 묵직했다. 평소 날렵하다고 자부했는데 고작 부푼 책가방 하나에 부자연스럽게 뒤뚱거리는 모습이 좀 우스웠다.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자 엘리베이터 벽에 빼곡히 붙은 상호들이 내 시선을 붙잡았다. 평소엔 잘 보이지 않는 것들이 막상 떠나려고 하니 섭섭한 표정을 하고 나를 배웅했다. ‘5․6F 성진학원’은 가장 아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불법고액과외주선, 맞춤형 과목편성, 서울대 재원 스카우트 등을 통한 공격적인 홍보는 주효했다. 성진학원은 곧 동네 학원가에서 제일의 학원으로 떠올랐다. 게다가 일류독서실인 에이플과 같은 빌딩에 있다는 이점까지 갖추고 승승장구하는 학원이었다. 정기적으로 내 일상을 검토하는 독서실처럼 내 학습진도상황과 희망대학 간의 상관관계를 밝히고, ‘조금만 하면 가능해요.’라고 웃는 얼굴로 돈내기를 독촉하는 곳이었다.

어쨌든 엄마의 성화로 학원이 마련해준 스터디룸에서 학원이 섭외한 유명강사에게 불법고액과외를 받았다. 도대체 얼마짜리였을까? 학원은 중간에서 수수료를 챙겼다. 동네 사람들은 무슨 돈이 그렇게 많은지 이 서비스(?)를 이용하기 위해 줄을 섰다. 물론 이 공공연한 비밀도 비밀이라는 모양새를 취하긴 했다. 그러니까 나는 이 비밀 아닌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경찰이 들이닥칠 때 도망가는 통로를 알아두고 그들에게 잡힐 경우에 해야 할 말을 외워두었다.

불법을 감추기 위한 가짜서류를 완비하고 있는 듯했다. 이 ‘첩보작전 서비스’는 동네의 최고 히트상품이었다.

‘내가 왜 이런 짓을 해야 하나?’

모래알을 씹는 듯 껄끄러웠지만 입시에 관한 고급정보가 있다는 말에 마다할 수도 없었다. 고등학생에게 대학교는 무슨 짓을 해서라도 도달해야 할 결승점이나 마찬가지였다.

밖을 나서자 무더운 기운이 온몸을 짓눌렀다. 책가방에 뒤뚱거리고 무더위에 숨이 막혔다. 이 동네의 학원도, 독서실도 오늘로 끝이라고 생각하니 시원섭섭했다. 지겨운 곳이면서도 친구들을 만난 곳이었다.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오랜만에 적응해야 할 생각을 하니 땀이 맺히기 시작했다.

‘후, 정말 덥다.’

독서실에서 집까지는 작은 고개를 하나 넘고 평탄한 길을 잠시 걸으면 되었는데 대략 10분 정도 걸렸다. 걷는 길마다 가로수가 촘촘히 서 있었고 나무에 매복한 매미가 육중한 게릴라성 소음세례를 퍼부었다.

운동화 안이 화염에 휩싸였는지 발등에 난 땀띠가 난리를 피웠다. 발 냄새를 상상하니 머리에 쥐가 났다. 놀이터는 텅 비어 있었다. 하기야 철봉이나 미끄럼틀과 놀이기구를 다리미로 만들 날씨였다. 놀이터 주변 보도블록에서 아지랑이가 피었다. 멀리서 지나가는 사람들이 쭈글쭈글하게 보였다. 성냥갑처럼 위태롭게 세워진 아파트 건물들이 일사병에 걸려 쓰러져버리지는 않을까 걱정스러웠다.

등이 뜨겁고 축축했다. 티셔츠가 땀에 젖어 자꾸 몸에 달라붙었다. 한 블록만 더 가면 집이 보일 것이다. 나는 어깨선을 따라 흘러내리는 가방끈을 다시 단단히 메고는 발걸음을 옮겼다.

나무의 행렬은 아파트 단지 어디를 가도 이어졌다. 즉 매미는 소음으로 온 동네를 공격하고 있었다.

‘매미야, 제발 울지 좀 마라.’

나는 좀 짜증이 났다. 이마를 타고 흐르는 땀을 연신 닦아도 땀은 계속 흘렀다. 고개 정점에 이를 때까지 난 정말이지 매미에게 두들겨 맞는 느릿한 거북이었다. 무더위를 다 받아내는 피뢰침 같기도 했다. 집까지 이렇게 멀게 느껴진 건 처음이다. 나는 되뇌었다.

‘오랜만에 익숙했던 생활로 돌아갈 뿐이야. 그동안 한 곳에서 좀 지루했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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