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목차: 한여름에 우주]
제1장. 그때 우주
제2장. 우주의 부재
제3장. 우주에 하나
[소개글]
- 이 성장소설은 스냅사진처럼 짧게 찍은 어떤 풍경을 통하여 이야기를 진행한다. 콩트처럼 운영하지만, 내용은 자연스럽게 이어지도록 구상하였다.
- 우주는 종훈에게 저녁에 블루(카페명)에 가자고 한다. 그녀가 좋아하는 예술영화 <블루>를 상영하는 날이기 때문이다. 종훈은 우주의 고상한 취향이 부럽기도 하고, 질투도 난다.
♬ 블루에 안 갈래?
“영화 보러 갈래? 저녁에 블루 상영해준대. 블루에서.”
자, 이 대사. 우주를 어설프게 아는 분들이라면 적이 당황할 수도 있는 내용이겠다. 이런 대사는 말보로 레드를 꼬나물고 겉멋에 잔뜩 취한 여고생이 할 만한 대사 같이 느껴지지는 않을 테니까.
하지만 우주에게는 의외로 섬세한 면이 있었다. 이를테면 그녀도 여느 여자아이처럼 꼼꼼하게 다이어리에 그날그날 고민을 적기도 하고, 친구들끼리 쪽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고등학교 1학년 때부터 약 1년 6개월이라는 시간 동안 같은 반 친구로 지냈는데 그런 습관쯤을 모를 리 없다.
이런 의외의 여성적인 면뿐 아니라, 우주에겐 지적인 면도 있었다. 물론 그녀가 공부를 잘한다는 건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고등학교 입학할 때부터 전교 1, 2등을 다투는 수재였으니까. 동네 학원 선생 사이에서 이름이 거론돼 친구들 중 우주의 이름을 안 들어본 아이가 거의 없었다.
하지만 내가 말하려는 의미는 이런 게 아니다. 솔직히 고등학교 공부를 잘하는 녀석이 과연 지적이라고 할 수 있을까? 적어도 한국사회에서 말이다. 다니던 중학교에서 천재라고 불리고 과학고에 진학한 동창이 있는데 그 녀석 시험에 관련된 과목 말고는 아는 게 없었다. 그는 어떤 면에서는 분명 바보였다. 한 번은 김영삼 대통령과 대선 때 경합을 벌였던 인물이 김대중과 전두환이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아무리 생각해도 그건 아니었지만 그는 자신의 명성을 이용해 강력하게 주장했다. 결국 그가 틀렸음이 밝혀졌지만, 그는 뉴스에서 들은 것이라며 끝내 자신이 틀렸다는 걸 인정하려 들지 않았다. 바보가 바보인 걸 인정하지 않으려는 애처로운 몸부림이었다. 사실 이런 유의 바보를 심심치 않게 보았다. 전년도 프로야구 우승팀이 어딘지 모르는 바보, 대학농구가 폭발적인 인기를 누리고 서태지 신보가 선주문 백만 장을 넘겼다는 소식 등을 통 모르는 바보, 일본이 대통령제 국가인 줄 아는 바보, 암스테르담을 독일에 갖다 놓는 바보 등 바보의 유형도 다양했다.
그런데 우주는 달랐다. 공부 잘하는 아이들의 의외의 허술함을 우주에게서 찾아볼 수 없었다. 그녀는 잡학에도 능했다. 별 희한한 상식도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척척 설명하는 터라, 친구들은 우주에게 ‘우주백과사전’이라는 별명을 붙여주었다. 우주에게는 친구들이 붙여준 별명이 많았다. 어설픈 날라리, ‘놀라리’(날라리가 되지 못해 놀라리로 불린다. 이것도 어설픈 날라리라는 의미), 우주돌이(남자답다는 의미), 우주인 등 다양했지만 우주백과사전은 그녀의 많은 별명 중 제법 자주 불리는 별명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공부 잘하는 아이로서 예의상 몰라주어야 할 분야에서조차 여느 친구들보다 정통했다는 것이다.
“너 스포츠, 연예인 소식 다 알면서 공부는 언제 하니?”
이런 핀잔을 듣기도 했다. 그런 분야에서조차 그녀에게서 소식을 들어야 하니 어쩐지 우주는 못하는 게 없어 보였다.
그녀에게는 내 선입관이 아무런 힘을 발휘하지 못한 셈이었다. 한마디로 나보다 못한 구석이 하나도 없다는 다소 비극적인 결론을 스스로 내릴 수밖에 없었다. 나는 질투심을 맹렬히 쏘아 올려 하늘에 똥침을 놓았다. 우르르쾅쾅!
뭐, 이 정도로 하늘이 놀랐다고 치자. 결국 놀란 하늘의 도움 때문인지 나는 우주의 취향이 남성적이라는 사실을 발견했다. 그건 못난 부류인 나와 같은 사람에게는 일종의 위안이었다.
‘무슨 여자애가, 사내 같아.’라는 식의 생트집 잡기는 내가 할 수 있는 최고의 발악이었다. 하지만 그도 곧 착각이었음이 드러났다. 그녀에겐 아까도 말했듯이 의외로 섬세하고 지적인 면이 있었다. 인정하고 싶진 않지만 그랬다.
예술영화감상.
이거 도대체 내가 범접이나 할 수 있을 취미란 말인가? 어떻게 생겨먹은 취미가 예, 술, 영, 화, 감, 상, 이냔 말이다. 도저히 그녀와는 어울리지 않는 취미다.
그럼에도 엄연한 사실이다. 그녀와 친해진 뒤로 종종 블루에 같이 간 적이 있었다. 블루는 평범한 카페였지만 토요일 저녁 8시 정도에 고전영화를 한편씩 상영했다. 내가 처음 갔을 때는 ‘길’이라는 영화를 상영했고, 두 번째 갔을 때는 ‘레드’를 상영했다. 정말 지루했다. 그 후로도 자주 갔지만 영화를 보려고 토요일에 맞추어 찾은 적은 생각보다 많지 않았다. 우주는 자주 토요일에 맞추어 같이 가자고 졸랐지만, 정말이지 ‘그랑블루’니 ‘소년, 소녀를 만나다’니 ‘화이트’니 하는 따분한 영화를 일부러 찾아가서 보고 싶진 않았다. 나는 그런 영화보다는 ‘터미네이터’와 ‘스타워즈’에 열광하는 평범한 청소년이다.
우주가 동의를 구하는 애타는 눈빛을 던졌다고 믿고 싶다. 미간을 찡그리고 위협하는 자세를 난 언제부턴가 그렇게 해석하고 있었다.
“마지막이잖아. 그래서 특별히 너에게 영화의 정수를 맛보게 하려는 거야. 잔말 말고 따라와, 짜샤.”
그렇다. 이쯤 되면 따라가는 수밖에 별 수 없다. 나는 따라가야 하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처음엔 그녀의 성화에 못 이길 것이고 좀 지나면 그녀의 토라진 모습을 봐야 할 것이다. 결국 설득당할 수밖에 없을 텐데 인심이라도 쓰는 편이 낫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 보면 우주는 부산으로 이사 가는 나를 위해 이벤트를 마련해주려는 것 아닌가.
그게 오로지 자기중심적인 취향이더라도 어쩌겠는가. 이건 뭐, 학이 여우를 초대해놓고 호리병에 수프를 대접하는 격이다. 그래도 말로는 못 당하니, 따라나서는 수밖에.
“오후 7시 30분 블루 앞?”
“아니, 그보다 좀 빨리. 오후 6시 뮤직박스 앞에서 보자. 너 학원수업 있잖아. 그거 끝나고 오면 얼추 시간 맞을 거야.”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