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행시 & 콜라주
※ 콜라주 재료
[삼행시]너드라 불리던 의대생이었던가
[삼행시]호캉스의 시절
[삼행시]우리가 오래 전부터 배운 것들
[삼행시]청람색 밤하늘에 뜬 반달은
#1
실로 오랜만에 집에서 곤히 잤다. 새벽 중간중간에 깨던 버릇도 며칠 만에 잦아들었다. 병원에서는 쪽잠을 자면서 언제든 대기하던 습관이 남아있던 터였다. 집에서도 그 버릇이 남아서 몇 번이고 새벽에 잠을 깨서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잠이 오질 않아서 스마트폰을 뒤지기도 하였지만, 불과 며칠 만에 해가 창가로 침범해 들어오는 아침이 되어서야 눈이 떠졌다.
그날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긴장했던 몸이 풀어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풀린 몸에서 간신히 붙잡고 있던 독소가 제멋대로 흐르다 덧나고 억지로 낫기를 반복했던 곳에 상처를 다시 내는 것 같았다. 뭔가 하나의 버릇이 깨어져 나가고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모든 것이 조금씩 자리에서 비껴난 채로 일상의 균열을 일으켰다. 으레 있어야 할 업무와 일정과 예측이 다 빗나가버린 시점이었다. 그런 일도 있기 마련이지만, 막상 닥치면 새로운 변동의 앞날을 쉽사리 알 수 없어 불안하기도 하였다. 무언가 짓누르는 부담감도 있었다. 이래도 되나 싶었다.
무기력했다. 끊임없이 피곤했다. 자고만 싶었다. 두통도 있는 것 같았다. 지끈거렸지만, 심하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괜찮지도 않았다. 어정쩡해서 아프다고 하기도 그랬다. 그저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계속 잠에 빠졌다. 밥을 먹고, 잠시 컴퓨터로 이메일을 확인하고, 오랜만에 뉴스를 뒤져보았다. 의료 현장의 소식을 뉴스로 그렇게 유심히 여러 편을 오랜 시간을 들여서 읽는 일은 그리 자주 있지는 않았다. 늘 현장에 바쁘고, 빠른 판단이 필요하고, 호출이 있으면 언제라도 뛰어가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여유롭게 무언가를 다각도로 살핀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오직 필요한 순간의 올바른 선택을 위해서만 쓸 수 있는 표현이었다. 낭비하며 할 수 있을 일이 거의 없었다.
모처럼 낭비하여도 되는 게 시간이었다. 더는 잠이 오지 않을 때까지 잠을 자도 되었다. 밥을 먹고 오전잠을 자고, 밥을 먹고 오후잠을 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떴을 때 마루에서 산이 올라왔다. 지평선은 멀어지고 노을은 천장에 가득 드리웠다. 마치 온통 노을 빛깔의 바다에 잠겨 있듯이 유영하는 그림자로 방안이 넘실대는 듯했다. 그 순간 지평선이 멀어지는 것을 알아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꿈을 꾸고 있으니, 얼른 깨어야 하겠다고.
땀을 흘리지 않았지만, 몸은 어쩐지 열기가 남아 있었다. 마치 바깥 풍경을 보면서 뛰놀던 아이가 숨을 헉헉거리는 것처럼 여름의 열기가 묻어 있었다. 선풍기 바람을 강풍으로 맞추어 놓았지만, 직접 바람을 맞는 다리 쪽은 차갑고 침대 자리를 누르는 등은 뜨거웠다. 선풍기의 바람은 더위의 멱살을 잡고는 조용히 을러댔지만, 뒤로 밀린 더위가 내 몸에 부딪혀 안간힘을 쓰는 듯했다. 바깥으로 내쫓았어야 할 더위를 엉뚱하게도 몸 안으로 들이고 있었다. 정 오고 싶으면 조금 있다 오라며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버릇처럼 말하지만, 실은 언제나 지금의 때란 없다는 듯이 더위에는 면상을 구기고 만다. 반갑지 않은 녀석은 제때에 와도 반갑지 않곤 했다. 그럴 때면 녀석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굳이 말해주지는 않은 채 입을 꾹 다물곤 시선을 피했다.
에어컨의 냉방 온도를 더 내렸다. 그리고 예약 꺼짐 시간도 해제하였다. 선풍기 바람이 날 설 때까지, 그래서 서늘함에 몸서리 쳐질 때까지 놓아두기로 했다. 감기에 걸릴까 봐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그렇게 추위를 느낄 순간을 기다렸다.
#2
그 해 여름은 아주 더웠다. 너무 더워서 땀이 흘러 교복을 다 젖게 했다. 선풍기를 틀어도 더운 바람 때문에 숨이 막혔다. 에어컨이 고장 나서 작동하지 않던 이틀간 기말시험을 보느라 고역이었다. 장마가 끝나자마자 찌는 더위로 교실에 있는 학생들은 땀을 흘리며 부채를 부쳤다. 역부족이었다. 이상기온 현상이라고도 했다. 누군가는 에어컨을 발명한 사람을 칭송했지만, 그 사람 때문에 지구가 이렇게 된 것이라는 볼멘소리도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어컨은 꼭 필요할 때 고장 나 버렸다. 어쩌면 고장 날 징후를 오래도록 모른 척 방치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탓에 막상 꼭 필요한 순간에 수리 기사를 불러놓고도 이틀을 기다려야 했다. 에어컨이 고장 나지 않은 교실의 학생들은 우월해 보였다. 선택받은 듯했다. 결국 지하 독서실에 시험 좌석을 배치하고 일부 에어컨이 고장 난 학생들이 시험을 치를 때까지만 활용하기로 했다. 시험을 다 보고 나면 독서실 형태로 다시금 바꾸어놓아야 했다. 그때까지는 학교에서 공부하지 않고 인근 스터디카페로 향했다. 하기야 대개 학원을 다니느라 근처에 스터디카페에 다니곤 했으니, 굳이 학교 독서실이 절실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더운 것이 싫었다. 땀을 흘리면서 시험을 본다는 것은 성적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칠 듯했다.
성적만이 최고였던 시절이다. 방학 때 자습 시간에 서양 고전 문학 작품을 읽다가 걸려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적이 있었다. 시험에 나오지 않는 것을 읽고 있다면서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책을 압수당했다. <데미안>이라는 책이었다. 사실 재미없는 책이었다. 그런 책을 뭐 하러 보나 싶을 만큼 재미없었는데, 선생님이, 그것도 국어 선생님이 책을 압수해서 가는 것을 보자니, 갑자기 그 책이 불멸의 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고등학교까지는 인성을 강조하였다지만, 사실 순응하라는 소리에 다름없었다. 물의를 일으킨 아이들에게 잘 사는 방법이란 결국 인간이 되는 것보단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 법을 무식하게 터득하는 것이라면서, 왜 그런 거냐고 묻지 않는 맑은 뇌의 소유자가 되는 것도 중요하다 했다. 누구의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은 오래도록 체화되어 그런지, 그냥 기억되었다. 누구라도 그런 말을 해준 것처럼.
은사는 촌지 받는 법에 익숙하여서, 학생보다 하등 나을 것 없는 인간이라도 늘 잘 사는 법부터 챙기는 것이 몸에 이롭다는 예시처럼 남았다. 어쩐지 추워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차라리 잠에 빠지는 것이 나았다. 기숙사에서 고전을 읽다가,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며 공개적으로 망신당하는 것보단.
#3
어지간히 좀 하지. 그때 공부한 게 너무 질려서 대학에 와서는 뜬구름 잡듯 여행 다녔다. 반바지를 입는 것을 어색해했지만, 달마다 더운 나라로 다닐 때에는 어쩔 수 없이 은근슬쩍 반바지를 입었다. 채도가 선명한 나날이었다.
바빠지기 직전의 예과 의대생이었다.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주어진 확실한 휴가라고 해야 할까. 이번 생에 늠름한 나비로 환골탈태하여 푸른 하늘로 날아오르려 했으므로, 모두가 그가 나비가 될 것이라 믿었다. 자신이 가고자 했던 어디인가로 방향만 잡으면 그곳은 곧 보일 것 같았다. 모든 것이 보장될 만한 위치에 설 것 같았다. 그럴 만한 능력이 있는 것으로 평가되었고 부러움을 샀다. 심지어 혁신조차 해낼 것은 젊고 당찬 야심을 마음껏 이야기해도 되는 나이였다. 견고한 세상의 틀조차 깨부수고자 했던 젊은 시절이었다. 찌들었던 곳 면면이 구태스럽고 억압적이었던 너무도 지긋지긋한 그곳으로부터 의기양양하게 이별을 고하는 일은 시간문제로 보였다.
그토록 바라던 이상적인 공간으로 나아가려는 갈망이 움텄고, 움트면 다 되는 줄 알았는데, 어느 날 보니 움막에서 ‘움’짝달싹할 수 없었다. 울고 싶었다.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이유로.
의약분업 문제로 의사와 정부, 약사 간의 첨예한 갈등이 지속되던 때에 그는 여행을 자주 다녔다. 그러다 한 동아리에 가입해 농활 봉사활동을 다니기도 하였다. 더운 날에 몸을 쓰며 땀을 흘리고 싶던 때였다. 진정한 봉사처럼 느껴졌다.
그때 그녀를 다시 보았다. 패션에 별 신경을 쓰지 않은 듯하였지만, 어쩐지 자연스럽게 세련되어 보이는 그녀를. 청바지가 오래되어 남루해 보였지만, 그건 어쩐지 남 시선을 신경 쓰지 않고 봉사에 몰입하는 모습으로 비쳤다. 색 바랜 청바지, 찢어진 청바지 처음 보았다지만, 사실은 청소년 시절 학교에서 인기 많던 그녀의 모습과 겹쳐 보였다. 늘 우리는 학교에 갇혀 지냈다. 그런 시절에 종종 기숙사 담장을 넘어서 떡볶이나 오뎅, 라면 등을 먹고 오기도 하였는데, 그럴 때도 종종 밖에서 그녀와 그녀의 친구들을 마주치기도 했다. 알던 사이는 아니어서 스쳐 지나기는 하였다.
그때 그 시절에 생각하던 가치와 꿈도 그의 인생을 스쳐 지나가기는 하였다. 그때는 어쩌면 영원히 하지 못할 어떤 일들을 새겨 넣자며, 질퍽해진 지면에 각자가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써 내려갔다. 눈물 때문이었나? 그 문장들이 흐릿해진 건. 아마도 그런 건 아니었을 것이다. 번지지 않은 잉크 자국은 지면에서 먼지 털리듯 떨어져 나간 것인지 인생에 영구한 건 없는 것인지 분명히 지면에 적혀있어야 할 문장들이 감쪽같이 없어졌다. 차라리 메모지를 잃어버렸다면 알찬 수고가 한순간에 무의미해진다며 덤덤하게 웃었을 텐데.
수상한 일 하나 없이, 아니, 원래 없어도 된다는 것처럼 어이없을 만큼 조용하게 돌아갈 흔적이 없어진 것 같았다. 애초에 어디에도 그런 순간은 없었던 것처럼.
어쩐지 돈 냄새가 났다. 돈벌레가 습기 가득한 곳에 빠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지루하고 진득해진 나날들마저 무심코 돌아보았을 때 기억의 끝자락에서 휙 내려앉아버렸다. 그건 마치 길거리에서 종종 마주쳐서 얼굴은 익숙하지만 사적으로는 전혀 알지 못하는 행인 같았다. 그는 낯선 시선이 자신에게 닿았다고 느끼곤 어색했는지 거추장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 있는 일이라는 듯이, 약간 이상하다면서 흘끔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제 갈 길을 갔다.
이제는 다른 갈림길의 가치와 목표를 선택해야만 했다.
#4
피서 철만 되면 가려던 관광지 대신 농활에서 낫을 들던 시절을 떠올린다. 이제는 다들 침대에 눌어붙어 에어컨을 켜고는 잠을 청하며.
억지로 친구들의 여행에 따라온 그는 수시로 스마트폰을 본다. 꺼놓으라며 빼앗으려던 친구의 강권으로도 말릴 수 없었다. 뉴스가 계속 업데이트된다. 전공의 파업 사태가 장기화되는 문제로 온통 시끄럽고, 정부의 안일한 대책을 비판하는 논조의 뉴스가 많다. 그 사이로 잘못된 대처로 환자 한 명이 수술 중 사망한 뉴스가 묻히듯 흘러간다. 거대한 시류의 휩쓸려 어쩌면 사람들은 기억하지 못할 것이다.
유명한 의사의 의료사고로 한창 시끄러워졌을 때조차 함께 묶여서 논란의 중심에 서지도 않았다. 안도할 무렵이었으나, 여전히 그 생각이 그를 잡아챘다. 수없이 복기하던 순간의 판단으로 머리가 뜨거워지던 순간은 지났지만, 여전히 미열이 남았다. 그건 비가 내려도 식지 않았다.
모처럼 신을 떠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