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희원이 Sep 04. 2024

아픈 남자와 오래된 비밀

삼행시 & 콜라주

※ 콜라주 재료
[삼행시]꽃사슴과 꽃망울
[삼행시]관절염과 만보기
[삼행시]오늘과 내일은 지나고, 그렇게 몇 번이고 지나고
[삼행시]너의 이름, 어쩌면 너의 그리움
[삼행시]습관의 경계는 모호하여서 은유로만 말해지고





#1

그때 남자는 꿈을 꾸었다. 차를 몰고 국도를 달리는데, 도로로 사슴 한 마리가 느닷없이 뛰어들어서는 차를 들이받고는 도로에 목을 늘어뜨리고는 죽어가고 있었다. 그런데 사람들은 태연하게 “사슴이 죽는 거 봐라. 좀 안 되긴 했는데, 어차피 생명이란 다 죽는 거지, 뭐.”라면서 제 갈 길을 갔다. 남자는 자신이 치어놓고도 그런 말을 들으며, 점점 태연해졌다. 남자는 점점 목을 축 늘어뜨리고는 도로에서 죽어가고 있었다.

그러자 문득 슬퍼졌다. 자신이 ‘로드킬을 당하는구나’ 하는 생각에 이르자, 살아야겠다는 생각보다는 울적해졌다. 어째서 자신이 슬픔에 휩싸여 도로의 차들을 향해 뛰어들었는지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그저 다시 한번 복기하듯이 차를 향해 맹렬히 돌진하였다. 기어코 SUV를 훌쩍 뛰어넘었다. 도로 건너편에서 반대편을 향해 사뿐히 날아올랐다고 하는 편이 적절했다. 그러고는 반대편으로 사뿐히 내려앉았다. 사슴인지 남자인지 헷갈린 채로, 낭랑한 소리로 한 번 울고는 하산하듯 총총 어디론가 사라졌다. 남자는 도로에 누워있는 듯한 시선으로 멀어지는 사슴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너무도 시선이 많을 곳에서, 너무도 많은 시선에 적나라하게 들키고도 남을 곳에서, 어쩐지 아무런 시선을 느끼지 못한 채, 도로인지 모를 이상한 곳에 누워서는 어째서 차들이 지나가지 않는지 궁금해 하였다. 분명 도로였던 것 같은데,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아도 도로 같지 않았다. 눈은 쌓이고 사람들의 흔적이 지워진 곳에서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들킬 수 없다는 것은 은밀한 죽음을 의미했다.     유감스럽지만 이런 사건은 울음이 다 그치기 전에, 조금 더 양보하여서 야밤이 다 지나기 전에, 끝나기 마련이었다. 기적은 드물고 햇살은 짧았다. 점점 추위는 깊어지고, 다들 뒤늦게 지나치며 어떤 죽음을 발견할 것이었다.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라도 남자가 죽었다고 생각할 것이었다. 그렇게 점점 죽음을 생각했다. 점점 죽음이 남자를 생각했다. 죽음이 죽음을 생각했다.  

그렇게 죽음이 오고야 만다는 생각이 들자 갑자기 아련해지고 꽃망울이 터지던 봄이 그리워졌다. 눈이 녹고 봄까지만 살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박한 바람이었다. 그러나 절박한 바람이었다. 어쩐지 그 순간의 감정이 평면적이고 담담하고 일상적인 미소를 머금은 채 느껴지는 것 같았다.      


#2

습하고 무더운 날에는 무릎이 시큰거렸다. 인대가 늘어나서 그런가, 비가 오려는 날에는 뼈마디가 쑤셨다. 몸의 통증은 경험의 과학이라고 합의하는 나이에 이르자, 오래 전 자신이 사업가로 성공적인 삶을 살아가던 일도 이제는 희미하게 느껴졌다. 관절염 때문에 지팡이를 짚고 일어섰지만, 그런 때에도 당당했던 중년의 시절을 떠올릴 때면 여전히 무용담을 풀어놓고 싶기도 했다. 가족들은 이제 지겹게 들어서 위로조차 할 생각 없이 무덤덤하게 흘려듣는 이야기였으므로, 또 짜증을 섞어서 반응하기도 하였으므로, 그럴 때면 남자는 모처럼 호기를 부려보고 싶은 마음마저 가신 채 의기소침해져서는 만보기를 찼다. 집에서 제자리 걷기 연습을 하든지, 밖을 가볍게 돌든지 천천히 불편한 몸을 이끌고 움직이려 했다.

종종 오래 전 지인들에게 연락이 오기도 하였지만, 굳이 만나려고 하지 않았다. 만나서 예전의 성공을 회상한다면야 좋겠지만, 대개는 예상치 못한 실패를 아는 이들이었다. 확실한 성공 뒤에 뒤따르던 쓰디쓴 맛에 무기력해졌던 자신을 기억하던 사람들이었다.

경제적 능력이 취약해졌을 나이에 이르자 호기롭던 기운도 다 옛말. 그때의 한 순간에 모두 증발한 듯했고, 몇 번의 시도를 했으나, 운이란 늘 그때에만 있는 것 같았다. 그렇게 점점 현실의 벽에 부딪혀 언제 그렇게 성공하던 적이 있었던가 싶다. 계량기 돌아가는 소리에도 민감해졌고, 하여튼 아직 여력이 남아 있는 것을 감사해야 할지 딱히 알 수 없었다. 그럼에도 말뿐인 여생이란 단어를 접어두고 밤마다 차갑게 어두워지는 것은 싫었다. 영영 고립되는 것도 싫었다. 은둔자의 삶으로 스스로를 규정하고 싶지 않았다. 서서히 유채꽃밭으로 자신의 삶을 묻어두는 준비를 하고 싶지도 않았다. 어찌보면 마지막 로망을 선택할 수 있기를 바랐다. 여전히 해처럼 매일 뜨기를 바랐다.

그럴 때면 그녀의 눈빛이 떠올랐다.     

 

#3

그때 그 순간의 세상은 하늘이 푸르렀다. 립밤을 바른 너는 입술로 선율을 문지르며 감나무가 있는 곳으로 가기 위해 담장 밑에 섰다. 어쩌면 그곳에서 사진을 찍었을 것이다. 우연히 협력업체에 들렀다가 그곳에서 근무하던 여자를 보았다. 여자는 남자의 오래 전 짝사랑이었다. 사춘기 시절의 그녀는 예뻤고, 그 청초한 아름다움은 약간 퇴색하였더라도 여전히 단정한 미모는 약간은 우울해진 눈빛 아래에 놓여 있었다. 30대 후반의 그녀는 한 아이의 엄마였다. 세월은 흘렀고, 젊은 시절의 마지막 끝자락을 간신히 붙들고 있었다.

그때부터였다. 종종 그녀에게 연락을 하고, 혼자서 아이를 돌보는 워킹망을 알게 모르게 경제적으로도 지원해 주었다. 거기까지였다. 마음속으로는 예전의 추억 때문에 안쓰러워하면서, 그 이상의 감정을 억누르려 했다. 더 깊은 감정을 키울 수는 없었다. 그녀의 남편은 먼 타국 땅으로 선원으로 돌고 있다고 하는데, 그 말이 사실인지는 알 수 없으나, 그렇게 당시에는 혼자 사는 것을 우습게 보는 사람들의 시선 때문에 남편이 있는 것처럼 가장하는 경우도 많았으니, 어쩌면 그 남편이란 사람이 정말로 있는지도 알 수 없고, 먼 옛날에 그녀와 제 자식을 버리고 잠적해버린 것일 수도 있으나, 자세히는 묻지 않았다. 그 질문만큼은 원천 봉쇄되기도 했지만, 그로서도 가족이 있는 몸이었다. 딸아이와 아내에게 권위 있는 가장으로 행세하던 자신이 딴마음을 품는 것에도 한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그런 남자는 종종 검은 셔츠를 즐겨 입었는데, 한 번은 여자가 말했다. 이러한 버릇은 어쩐지 어둡고 늠름하게 자신을 포장하려는 사람의 애처로운 습성이라며 걱정한 적이 있었다. 남자는 괘념치 않는다는 듯 웃었다. 그녀는 또 이런 말도 했다.

하찮아 보이는 슬픔조차 ‘여독이 풀리지 않아 여전히 세상을 앓는’ 사람에겐 여전히 무거운 것이라고.

여러 모로 남자의 도움을 뿌리치기 어려운 형편이었음에도, 여자는 늘 남자에게 그것을 원하지 않는다고 하니, 남자로서는 더 애가 탈 뿐이었다.  연속적인 습관의 경계는 모호하여서 언제부터 습관이 된 것인지도 모른 채 우리 안에서 은은했다. 남자로서는 적어도 그렇게 믿었다.  실수로 전생을 알아챌 수만 있다면 지금 인생의 앞쪽에 숨겨진 어떤 사건을 알 수 있을 텐데. 그게 너무 궁금한 적도 있었다.

자신이 생각하는 대로, 때로는 착각하는 대로 밀어붙여도 아무도 그것을 문제 삼지 않던 시절이었다. 그는 많은 사람을 직원으로 두고 소위 성공했다는 평가를 받던 스타트업 기업의 청년실업가였다. 청년이라 불렸지만 중년의 나이를 넘어설 만큼 시간이 꾸준히 흐르고 있었다.  

   

#4

사업 부도가 확정되고 한동안 방황할 때 남자는 그녀의 집 앞으로 찾아간 적이 있었다. 그녀와의 관계라고 할 것은 없었다. 그녀를 만나고 싶기도 했지만, 먼발치로만 보았다. 경제적으로 무너진 자신이 내세울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자괴감 때문에 그녀 앞에 나서기는 싫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냥 가서 말 한마디 정도, 차 한 잔 정도는 해줄 사이였고, 자신이 도와주었던 것을 생각한다면, 그 정도의 선의는 기대하는 것이 무리 없었지만, 언제나 당당한 남자, 기대고 싶은 남자로만 기억되기를 바라였기 때문일까. 그녀 앞에 나서지 못했다. 그리고 그때 정말로 그녀와 함께 장을 봐서 집으로 들어가는 평범한 사내 하나를 보았다. 그녀의 남편일까. 아니면 다른 사내일까. 알 수 없었으나, 어쩐지 자신이 그녀에게 그리 특별한 존재는 아니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에 마음이 괴로웠다.

그러나 그 사내가 그녀와 어떤 사이인지는 알 길이 없었다. 남편에 관해서도 실제론 전설처럼 도사리면서 실체를 알 수 없는 이야기 같았다. 에둘러 말해지고, 짧게 언급되고, 곧 그에 관해서는 이야기가 닫히곤 했으니까.

그녀의 집앞에서 잠시 서성였다. 오래 버틸 수는 없었다. 아무것도 아닌 관계였으므로. 따지고 보면 그랬다. 친구 사이라고 믿고 싶었지만, 그녀도 그렇게 생각할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순간 어쩐지 신세가 초라해졌다. 연주를 위하여 만들었지만, 실패한 습작처럼 서랍 안에 보관되었던, 이를테면 이름이 잊힌 처용가. 처용가에 관해서 여자에게 들은 적이 있다. 여자는 취미로 글을 쓴다고 했었다. 그 글 이야기 중에는 처용도 있었다. 근원을 알 수 없고 알 필요도 없어서 그저 방향 모를 바람에 넘실대는 색바랜 종이의 낡은 냄새들이 여러 날의 기억과 겹쳐서는 공중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노을이 하늘을 물들여가고 있을 무렵, 그녀의 집에는 불이 켜지고 여자는 부엌에서 저녁 준비를 하는 것 같았다.      


#5

좋은 밤을 좋아한다며 언제나 검은 셔츠를 입곤 하였는데, 우주의 종말도 언젠가는 있다는데, 그래도 리치가 닿는 가까운 순간에는 그래도, 이를테면 오늘과 내일은 지나고, 그렇게 몇 번이고 반복하여 지나는 시간을 거쳐 기어이 기억나지 않을 전생을 말한다. 부자연스러운 터부와 배덕한 운명을 지겹도록 말한 뒤에야 비로소 거추장스럽게 스치던 모든 것이 사랑스러워질 것이다. 그때에 이르러 문득, 들판에 서서는 무심코 되돌아보게 될까? 우연을 가장한 필연으로 멀지 않은 곳에서 선선한 바람이 휘돌아오고, 남자는 웃거나 울 것이다. 혹은 담담할 수 있을까? 기억을 견디는 법을 오래도록 익혀서. 또는 아예 기억이 증발하여서.     



          



이전 24화 아버지의 부도와 남겨진 가게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