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소설: 빌드업 & 콜라주
반달, 꽃에 닿았다 #5-2
♬ 어제의 버킷리스트와 오늘의 회고
실로 오랜만에 집에서 곤히 잤다. 새벽 중간 중간에 깨던 버릇도 며칠 만에 잦아들었다. 병원에서 침상 밑에 마련된 보호자 자리에서 쪽잠을 자면서 언제든 대기하던 습관이 남아있던 터였다. 한동안 주말에도 아버지 보호자로 돌아가면서 당번처럼 보호 임무를 맡았다. 그러다 몸이 지쳐 평일에 연차를 며칠 쓴 것이다. 모처럼 푹 쉬고 싶었다. 어젯밤부터 간병인이 올 때까지 야간 당번을 하느라 잠을 제대로 못 잤다. 교대를 하고 와서는 씻고 간단히 아침 식사를 하고 잠을 청했다. 아침 햇빛을 가리기 위해 커튼을 쳤다.
집에서도 오전 잠을 청하느라 그랬는지 몇 번이고 중간에 잠을 깨서는 시간을 확인하고는 잠이 오질 않아서 스마트폰을 뒤지기도 하였지만, 이내 잠이 들고는 몇 시간 뒤에야 다시 눈이 떠졌다.그러기를 여러 번이었다.
그날, 연차 휴가가 시작된 날, 기다렸다는 듯이 몸이 아프기 시작했다. 긴장했던 몸이 풀어지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풀린 몸에서 간신히 붙잡고 있던 독소가 제멋대로 흐르다 덧나고 억지로 낫기를 반복했던 곳에 상처를 다시 내는 것 같았다. 뭔가 하나의 버릇이 깨어져 나가고 원래 그 자리에 있어야 할 모든 것이 조금씩 자리에서 비껴난 채로 일상의 균열을 일으켰다. 으레 있어야 할 업무와 일정과 예측이 다 빗나가버린 시점이었다. 그런 일도 있기 마련이지만, 막상 닥치면 새로운 변동의 앞날을 쉽사리 알 수 없어 불안하기도 하였다. 무언가 짓누르는 부담감도 있었다. 이래도 되나 싶었다.
무기력했다. 끊임없이 피곤했다. 자고만 싶었다. 두통도 있는 것 같았다. 지끈거렸지만, 심하지는 않았고, 그렇다고 괜찮지도 않았다. 어정쩡해서 아프다고 하기도 그랬다. 그저 몸 상태가 좋지 않았다. 계속 잠에 빠졌다. 밥을 먹고, 잠시 컴퓨터로 이메일을 확인하고, 오랜만에 뉴스를 뒤져보았다. 의료 현장의 소식을 뉴스로 그렇게 유심히 여러 편을 오랜 시간을 들여서 읽는 일은 그리 자주 있지는 않았다. 늘 현장에 바쁘고, 빠른 판단이 필요하고, 호출이 있으면 언제라도 뛰어가야 했다. 그런 상황에서 여유롭게 무언가를 다각도로 살핀다는 것은 쉽지 않았다. 오직 필요한 순간에 올바른 선택을 위해서만 쓸 수 있는 표현이었다. 낭비하며 할 수 있을 일이 거의 없었다.
모처럼 낭비하여도 되는 게 시간이었다. 더는 잠이 오지 않을 때까지 잠을 자도 되었다. 밥을 먹고 오전잠을 자고, 밥을 먹고 오후잠을 잤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눈을 떴을 때 마루에서 산이 올라왔다. 지평선은 멀어지고 노을은 천장에 가득 드리웠다. 마치 온통 노을 빛깔의 바다에 잠겨 있듯이 유영하는 그림자로 방안이 넘실대는 듯했다. 그 순간 지평선이 멀어지는 것을 알아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고, 꿈을 꾸고 있다고 생각했다. 꿈을 꾸고 있으니, 얼른 깨어야 하겠다고.
땀을 흘리지 않았지만, 몸은 어쩐지 열기가 남아 있었다. 마치 바깥 풍경을 보면서 뛰놀던 아이가 숨을 헉헉거리는 것처럼 여름의 열기가 묻어 있었다. 선풍기 바람을 강풍으로 맞추어 놓았지만, 직접 바람을 맞는 다리 쪽은 차갑고 침대 자리를 누르는 등은 뜨거웠다. 선풍기의 바람은 더위의 멱살을 잡고는 조용히 을러댔지만, 뒤로 밀린 더위가 내 몸에 부딪혀 안간힘을 쓰는 듯했다. 바깥으로 내쫓았어야 할 더위를 엉뚱하게도 몸 안으로 들이고 있었다. 정 오고 싶으면 조금 있다 오라며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버릇처럼 말하지만, 실은 언제나 지금의 때란 없다는 듯이 더위에는 면상을 구기고 만다. 반갑지 않은 녀석은 제때에 와도 반갑지 않곤 했다. 그럴 때면 녀석의 잘못이 아니라는 것을 알지만, 굳이 말해주지는 않은 채 입을 꾹 다물곤 시선을 피했다.
에어컨의 냉방 온도를 더 내렸다. 그리고 예약 꺼짐 시간도 해제하였다. 선풍기 바람이 날 설 때까지, 그래서 서늘함에 몸서리 쳐질 때까지 놓아두기로 했다. 감기에 걸릴까 봐 이불을 뒤집어쓰고는, 그렇게 추위를 느낄 순간을 기다렸다.
그러다 생각에 잠겼다. 꿈일 수도 있었다.
그해 여름은 아주 더웠다.
너무 더워서 땀이 흘러 교복을 다 젖게 했다. 선풍기를 틀어도 더운 바람 때문에 숨이 막혔다. 에어컨이 고장 나서 작동하지 않던 이틀 간 기말시험을 보느라 고역이었다. 장마가 끝나자마자 찌는 더위로 교실에 있는 학생들은 땀을 흘리며 부채를 부쳤다. 역부족이었다. 이상기온 현상이라고도 했다. 누군가는 에어컨을 발명한 사람을 칭송했지만, 그 사람 때문에 지구가 이렇게 된 것이라는 볼멘소리도 들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에어컨은 꼭 필요할 때 고장 나 버렸다. 어쩌면 고장 날 징후를 오래도록 모른 척 방치했던 것일지도 모른다. 그 탓에 막상 꼭 필요한 순간에 수리 기사를 불러 놓고도 이틀을 기다려야 했다. 에어컨이 고장 나지 않은 교실의 학생들은 우월해 보였다. 선택받은 듯했다. 결국 지하 독서실에 시험 좌석을 배치하고 일부 에어컨이 고장 난 학생들이 시험을 치를 때까지만 활용하기로 했다. 시험을 다 보고 나면 독서실 형태로 다시금 바꾸어 놓아야 했다. 그때까지는 학교에서 공부하지 않고 인근 스터디카페로 향했다. 하기야 대개 학원을 다니느라 근처에 스터디카페에 다니곤 했으니, 굳이 학교 독서실이 절실하지는 않았다. 그보다는 더운 것이 싫었다. 땀을 흘리면서 시험을 본다는 것은 성적에도 안 좋은 영향을 끼칠 듯했다.
성적만이 최고였던 시절이다.
그 당시 방학 때 자습 시간에는 감독 선생님에게 각종 물건이 압수되곤 했다. 그중에 기억나던 물품이 있었는데, 전교 1등을 도맡아 하던 남학생의 책이었다. 서양 고전 문학 작품을 읽다가 걸려 공개적으로 망신을 당한 것이다.솔직히 이해하기 어려웠지만, 선생과 학생 사이에 신경전이 있었던 것인지 알 수 없어도, 어쨌든 당시 감독을 서던 선생님은 시험에 나오지 않는 것을 읽고 있다면서 아이들이 보는 앞에서 학생의 뒤통수를 때리더니, 책을 압수했다. <데미안>이라는 책이었다. 사실 재미없는 책이었다. 그런 책을 뭐 하러 보나 싶을 만큼 재미없었는데, 선생님이, 그것도 국어 선생님이 책을 압수해서 가는 것을 보자니, 갑자기 그 책이 불멸의 책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그 아이는 유명하지 않을 수가 없었지요. 학교에서 제일 공부를 잘하는 아이였으니까요. 늘 전교 1등을 도맡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동네 학원에서는 그 아이를 데려가려고 혈안이 되었고요. 학생들에게, 또 학부모들에게는 ‘엄마 친구 아들’이요, 우상이었으니 그 아이가 선택한 학원이라면 무게감이 생길 수밖에 없었거든요. 우리요? 친하지 않았어요? 학교 다니면서 말을 해본 경우가 두 번? 세 번? 여하튼 손에 꼽을 정도였고, 간단한 대화 정도였으니, 우리가 친하다고 할 순 없겠죠. 같은 반이거나 옆 반이었는데, 3년 내내 서로의 이름은 알아도 친하다고는 할 수 없는 동창이었어요. 그래도 제가 아주 인기가 없는 편은 아니었으니 (웃음) 아마 걔도 내 이름 정도는 알았을 거예요. 게다가 그 뒤로 한 번 대학교 때 농활에서 우연히 만나기도 했고요. 같은 대학을 다녔지만, 사실 의대는 다른 대학이나 다름 없잖아요. 그 뒤로는 동창회에서 한두 번 더 보았는데, 그때도 대화를 한 건 아니었어요. 건배 정도는 했었죠. 하지만 그 아이가 좀 귀엽게 생긴 편이기도 해서, 공부를 잘하는 너드 같은 천재과의 아이로 기억하고 있어요. 이제 얼굴은 희미하지만요. 졸업사진으로 있을 텐데, 찾으려면 꽤 고생 좀 해야죠. 어디 있는지 모르겠거든요. 농활 때도 함께 술잔을 들고 찍은 사진이 있을 텐데, 꼼꼼하게 추억을 모셔두는 편이 아니라서요. (웃음) 아, <데미안> 사건으로도 기억되는 아이죠.”
고등학교까지는 인성을 강조하였다지만, 사실 순응하라는 소리에 다름없었다. 물의를 일으킨 아이들에게 잘 사는 방법이란 결국 인간이 되는 것보단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는 법을 무식하게 터득하는 것이라면서, 왜 그런 거냐고 묻지 않는 맑은 뇌의 소유자가 되는 것도 중요하다 했다. 누구의 말인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은 오래도록 체화되어 그런지, 그냥 기억되었다. 누구라도 그런 말을 해준 것처럼.
은사는 촌지 받는 법에 익숙하여서, 학생보다 하등 나을 것 없는 인간이라도 늘 잘 사는 법부터 챙기는 것이 몸에 이롭다는 예시처럼 남았다. 어쩐지 추워서 이불을 뒤집어썼다. 차라리 잠에 빠지는 것이 나았다. 기숙사에서 고전을 읽다가, 시험에 나오지 않는다며 공개적으로 망신당하는 것보단.
“제가 공부를 엄청 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요. 저도 나름대로 괜찮은 성적을 받았다고도 할 수 있죠. 그만큼 엄청 스트레스 받으면서 공부를 한 건 맞아요. 너무 신경을 썼던 탓인지, 대학에서도 한동안 놀게 되더라고요. 그래봤자 학고를 맞으면서 했다는 건 아니에요. 대학에 들어가서 남들이 할 만한 건 다 경험해보자는 식이었죠. 딱 그 정도였어요. 어찌 보면 학점 관리를 해가면서 했다는 점에서 무작정 여행을 다니면서 결석하고 그러는 건 아니었죠. 집에서 입지 말라던 미니스커트도 입고, 평소 해보고 싶은 과감한 패션 스타일로 환골탈태하고는, 다니지 말라던 록카페에도 자주 다니고요. (웃음) 지금처럼 불금이란 말은 없던 때였지만, 정말 목요일부터 까맣게 불태웠죠. 인생의 가장 아름다운 시기에 주어진 확실한 휴가라고 해야 할까요? 아, 농활 활동이라든지 이것저것 다양한 봉사활동에도 참여 했었어요. 교회에서도 그런 기회를 접해서 해외로도 잠깐 나가는 봉사활동으로 외국 아이들과 교류를 하기도 했었고요. 그러다가 동아리 활동을 하면서 교회와는 거리를 두기도 했었죠. 제게도는 좀 답답하고 해야 할까요? 어찌 보면 여성의 시각에서는 불편한 점이 많았다고 해야 할까요? 그런 것을 조금씩 깨달아가던 때였어요. 사실 엄청 열혈하게 견고한 세상의 틀조차 깨부수고자 했던 것은 아니에요. 그만한 신념도 없고, 대단한 이상과 목표가 있었던 것도 아니에요. 그냥 불편한 게 있었고, 그게 왜 그런지 설명해주는 선배들을 만나니 조금은 혹했다고 해야 할까요? 찌들었던 곳 면면이 구태스럽고 억압적이었던 너무도 지긋지긋한 그곳으로부터 의기양양하게 이별을 고하고는 싶지만, 그렇다고 현실을 외면하기는 어려운 평범한 여학생이었죠. 느끼한 교수를 친구들과 욕하기는 하지만, 학점에 신경 쓰지 않을 수는 없는 것처럼요.”
“당시에도 이미 운동권 학생회가 인기가 급속히 떨어지던 시점이었어요. 그러니 제가 마르스크적인 신념과는 거리가 멀게 그런 생각에 젖어 있거나 페미니즘의 전사였다고 하기는 어려워요. 저는 충분히 현대 자본주의 시대를 살아가는 신세대 여학생이었거든요. 주체적인 여성이란 무엇인가 하는 걸 되개 심각하게 생각했다보다는 어떻게 하면 좋은 기업에 취직해서 높은 연봉을 받을 수 있을까, 결혼은 언제 해야 하나, 하는 정도를 생각하는 사람이었죠. 그저, 점점 사회는 견고해지는데 사회학도로서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점점 사라지는 상황에서 선배들 중 일부의 말이 듣기 좋아서 농활에 참석해보는 거였어요. 당시에 귀농해서 농부로서 살아가는 대선배님도 계셨거든요. 그렇게 농촌과 연결된 것이죠.
두세 번인가 다녀온 적이 있는데, 그중 몇 번째인지는 기억나지 않지만, 데미안도 온 것이죠. 그래요, 그 동창, 데미안이요. 원래 이름은 좀 헷갈리네요. 박성현이었나? 정확하지 않아요. 데미안으로 기억된 후, 그리 특별히 어려운 이름도 아닌데, 잘 안 떠올라요. 그래도 이름과 얼굴 말고는 제법 선명하죠. 그때 봤을 때 그리 나쁜 인상도 아니었고, 조금 설렐 만큼 의학도로서 의젓하게 자라줄 것 같은데, 요즘에는 뭐하고 지낼지 궁금하네요. 어디선가 의사를 하고 있겠지요. 대학병원에 남았거나 개인병원을 차렸거나요. 벌써 시간이 그리 흘렀어요. 마음에 맞는 좋은 여자를 만나서 결혼했을 것 같아요. 귀여웠던 것으로 기억하니, 얼마 전 의료사고 논란으로 신문에 났던 유명 의사처럼 예쁜 사람을 만나서 잘 살고 있겠죠? 아, 맞아요. 그 의사 문제는 저도 잘 모르지만, 솔직히 유명 연예인과 결혼하다는 것으로 알고 있을 뿐이에요. (웃음) 웃을 일은 아닌데 말이죠. 그리고 의사가 유명 연예인과 결혼하는 것도 그리 이색적인 일도 아니고요. 의사가 좀 잘 생기기까지 한 게 반칙 아닌가 싶은 생각은 들어요.
여하튼, 데미안 그 친구, 그때 그 시절 제가 생각하던 가치와 꿈의 궤적에서 잠시 교점을 만들었다고 해야 할까요. 또는 상당히 가까운 거리로 서로의 궤적이 스쳐지나간 것 같기는 해요. 연락한다고 했었는데, 몇 번 만날 뻔하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어긋났거든요. 아, 박성권이에요. 그 아이 이름. 회사를 그만둘지 말지 고민하는 이 시점에, 왜 데미안이 떠올랐는지는 잘 모르겠어요. 비몽사몽에 고등학교 시절을 되돌아보게 되었네요.”
“네? 지금도 그런 봉사활동을 꾸준히 다니냐고요. 꾸준히는 고사하고, 아예 다니지 않죠. 대학 이후로는요. 선배들 중에 간혹 직장 생활하면서도 연락 주는 경우가 있었는데,, 이제 결혼하고는 그마저도 연락이 없어요. 다 먹고 사느라 바쁘죠.
그리고 가끔 어렵게 눈치 보며 쉬는데, 그럴 때면 농활 같은 극기훈련 대신 그냥, 호텔에 가서 에어컨 바람을 틀어놓고 호캉스를 즐기게 되죠. 침대에서 스마트폰으로 맛집을 검색하다가요. 그러다가 뉴스에서 전공의 파업 사태를 알려주거나, 정부의 미흡한 대처를 보고는 궁금해서 읽기는 하죠.바쁜 일정을 쪼개서 가족과 다음 장소로 이동하면서요. 남의 일에 그 정도 이상으로 힘쓰고 공분하기가 좀처럼 쉽지 않아요. 그래요, 그때와는 다를 수밖에 없죠. 지금에 적응하며 살아야 하니까요. 지금을 바꿀 수 없다면요.”
그때는 어쩌면 영원히 하지 못할 어떤 일들을 새겨 넣자며, 질퍽해진 지면에 각자가 하고 싶은 버킷리스트를 써내려갔다. 눈물 때문이었나? 그 문장들이 흐릿해진 건. 아마도 그런 건 아니었을 것이다. 번지지 않은 잉크 자국은 지면에서 먼지 털리듯 떨어져 나간 것인지 인생에 영구한 건 없는 것인지 분명히 지면에 적혀있어야 할 문장들이 감쪽같이 없어졌다. 차라리 메모지를 잃어버렸다면 알찬 수고가 한 순간에 무의미해진다며 덤덤하게 웃었을 텐데.
수상한 일 하나 없이, 아니, 원래 없어도 된다는 것처럼 어이없을 만큼 조용하게 돌아갈 흔적이 없어진 것 같았다. 애초에 어디에도 그런 순간은 없었던 것처럼.
어쩐지 돈 냄새가 났다. 돈벌레가 습기 가득한 곳에 빠르게 나타났다가 사라지고, 지루하고 진득해진 나날들마저 무심코 돌아보았을 때 기억의 끝자락에서 휙 내려앉아버렸다. 그건 마치 길거리에서 종종 마주쳐서 얼굴은 익숙하지만 사적으로는 전혀 알지 못하는 행인 같았다. 그는 낯선 시선이 자신에게 닿았다고 느끼곤 어색했는지 거추장스럽다는 표정을 지었다. 처음 있는 일이라는 듯이, 약간 이상하다면서 흘끔 바라보았다. 그러고는 제 갈 길을 갔다.
이제는 다른 갈림길의 가치와 목표를 선택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