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림 소설: 빌드업 & 콜라주
♬ 아버지의 부도와 남겨진 가게
마음먹은 대로 늘 당차고 야무지면 좋겠지만, 설령 그렇다 하여도 세상일이란 게 마음먹은 대로 되지는 않았다. 은근하게 해가 되는 일투성이였다. 너무 좋게 들리는 일이란 늘 위험한 요소가 있었다. 전화를 걸어와서 이걸 놓치면 안 된다는 보험이란 말이 안 되는 상품이었다. 그렇게 좋은 것을 전화까지 걸어주면서 하라고 해줄 리 없었다. 남는 것 없는 장사란 말도 그랬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건데 말이지.”
너무 기대를 많이 해도 안 되었다. 정말로 될 것 같은 일, 믿기지 않는 기적 같은 일이란 자주 있지도 않았고, 때때로 그런 일은 아예 없었다. 될 법한 일이고, 엄청난 돈이 걸린 일이라면, 공정하게 이루어지는 것만 바랄 수도 없었다. 억울하게도 누군가의 의도였는지 우연이었는지 와전된 소문으로 무효 처리된 일도 많았다. 자기들이 돈 들여 해준 것도 없으면서 괜히 개업하는 곳에 와서는 맛이 있네 없네 말을 얹는 것이 야속할 때도 있었다.
“참, 맛이 있네 없네.”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니었다. 마치 자력으로 16강에 진출하려는 축구 국가대표팀처럼 긴장해야 했다. 남들에게는 전혀 중요한 일이 아니어도, 당사자들에겐 저마다 국가적인 중대사와 맞먹었다. 눈 뜨고도 코 베이는 세상이라는데, 농담으로라도 타인의 선의에 의존해서는 안 되었다. 친구였던 사람이라도 다급한 상황에서는 자기부터 보신하려는 본능을 따르곤 했다. 혼자라면 모를까, 배우자가 있고 자식이 있다면 어쩔 수 없이 그리되곤 했다.
애초에 그런 못 볼 꼴을 볼 일을 만들지 말아야 했다. 연대보증으로 친구의 연이 끊기곤 했다. 믿던 사람이 막상 막다른 골목에 다다라 벼랑 끝으로 몰리면, 조용히 책임을 외면한 채 사라져버리기도 했다. 그러면 그 빚은 고스란히 남은 자들의 몫이 되었다. 유서에는 대개는 다들 저마다의 상황을 하소연 하며, 어쩔 수 없음을 변명하고, 미안해하는 내용이 담겨 있곤 했다. 죽은 자를 원망하면서도 모든 걸 되돌릴 수도 없었다.
아버지는 빚보증을 잘못 섰다. 빚보증을 잘못 서고는 바지런히 살았다는 것이 다 소용없게 되었다. 한때 그곳은 랜드마크가 될 것이라 했다. 공허한 꿈으로만 남았고 친구 관계는 엉망이 되었다. 아버지에게도 원하지 않고, 뜻하지 않던 빚이 남았다. 회사를 정리하고, 작게나마 남은 돈으로 가게를 해야 했다. 아버지는 그 삶에 온전히 적응하지 못했다. 한동안 친구를, 그 주변을, 알 수 없는 모두를 원망했다. 나약해져 있었다.
오래 전 강하고 냉정하기까지 한 사업가다운 모습은 거의 없다시피 했다.
아버지는 성공의 척도를 경제적 부를 일군 것으로만 가늠하던 세대의 한국 남자였다. 적어도 성공가도를 달리던 사업가 시절에 아버지의 표정에는 늘 자신감이 넘쳐 있었다. 자신이 목표를 세우고 일군 성과를 보더라도 그럴 만했다. 그는 자신의 기준을 확고히 했고, 그것이 틀렸다고 생각한 적이 없었다. 주도면밀했고 추진력이 있었다. 남들을 믿게 할 만큼 자신에 대한 확신도 있었다. 누가 뭐라고 할 수 없을 만큼 열렬했고, 때로는 그 때문에 주변 사람들이 힘들었다. 아버지는 마지노선을 정하면 자신만의 논리로 무장한 채 선명한 이치로 상대를 설득했고, 때로는 강하게 이끌었다. 명확한 기준을 따라야했고, 때로는 그 기준이 변덕스럽고, 가혹한 구석이 있더라도, 누구도 쉽사리 이에 이의를 제기하지 못했다. 그랬다가는 한동안 우회적인 보복을 참아야 했다. 권위에 도전한 대가였다.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부여되는 가치란 작은 세계의 주인인 아버지의 기준에 따라 새롭게 서열이 부여되었다. 그리고 그것을 효용의 잣대로 스스럼없이 평가했고, 그렇게 부여된 새로운 의미는 때로는 폭력이 되기도 했다. 아버지가 장악한 세계 안에서 그것은 진리였으므로, 그것을 하나의 객관적 가치로 받아들여야만 했다. 그것은 현명한 한 사람의 위대한 판단 같은 것이었다. 언제나 맞을 수밖에 없었다. 때로 틀린다면 그 책임의 대가는 아버지를 대신할 누군가가 받고는 응당 참아내야만 했다.
피가 났다. 아버지는 피를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고 했다. 그때부터는 피를 두려워해서는 안 되었다.
“네 엄마는 피를 무서워했지. 줌마렐라 신드롬에 빠져 있었고. 언젯적 감성인지도 모를 소녀의 꿈이나 간직하고 있다니!”
혀를 차던 아버지는 힘이 없는 이상이란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것이라 했다.
“힘이 없으면 아무것도 지키지 못하고, 어차피 그런 것은 아름다울수록 허망하지. 깊은 상처는 견디는 것이어야 하지. 들짐승에게 공격당하지 않도록 숨기고 있어야 해. 기회를 엿보아서 안전한 곳을 찾아내고, 거기서 치료를 해야만 하겠지. 상처란 거추장스럽지만, 생길 수밖에 없으니, 그것을 들키지 않아야 했어. 그리고 오래 전부터 난 그렇게 이겨냈다. 그리고 이렇게 여기에 서게 되었지.”
청춘의 미련은 비효율적인 것으로 치부했다. 아버지는 하찮은 것과 고상한 것을 구분했다. 아쉽게도 그의 관점에서 하찮은 것은 돈이 되지 않는 행위나 선택이고, 고상한 것은 돈을 벌게 하는 강한 마인드 같은 것이었다. 돈을 벌지 못하게 하는 숭고한 마음 같은 것은 그다지 쓸모없는 것으로 보았다. 그냥 그런 건 나중에 돈을 많이 벌고, 더 넓은 네트워크를 구축하기 위해 투자해야 할 겉치레 정도로 여겼다.
아버지는 배신을 당하고, 빚을 떠안은 뒤, 마지막 상처를 숨기지는 못했다. 충격으로 쓰러진 뒤, 다리 하나를 절었다. 그것이 오른쪽 다리이든 왼쪽 다리이든 중요하지 않았다. 그는 때로는 얼굴이 일그러지기도 하였고 팔을 주무르기도 했다. 누가 보아도 아버지는 온몸이 불편해 보였다.
가끔은 지팡이를 짚고 바깥으로 산책을 나가기도 했으나, 누군가 동행을 하기 마련이었다. 누구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는 불완전해진 자신을 대하고는 한동안 우울증도 앓았다. 재기를 꿈꾸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잃었고, 나이가 들었다.
아버지는 예전 같을 수 없었다. 경제적 성공으로 모든 가치를 가늠했으므로, 그 자신의 상태를 받아들이지 못한 채, 버티다, 어느 날부턴가는 살기 위해 작아지고 초라해진 모습으로 말수도 적고, 자신감 없는 말투로 이내 자신의 의견을 접어버리곤 했다. 그는 조용히 TV를 보았고, 엄마의 도움을 받으며 잔소리를 견뎌냈다. 그는 자신의 상처를 매순간 내보이며, 도움을 받아야 하는 자신을 솔직하게 내보일 수밖에 없었다.
간신히 지켜낸 작은 돈으로 마련한 가게에서 엄마는 우리 식구를 지켜낼 생활비를 마련했고, 몇 년의 고생 끝에 그럭저럭 살만은 하게 되었다. 오래 전 알고 지내던 기업가들이 종종 찾아와서, 아버지를 보기도 하였으나, 몇 년 뒤부터는 그마저도 발걸음이 드물었고, 아버지가 오래 전 추억을 되짚어 말하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에게 영광스럽고 활기찬 시절이 있었다는 것을 알기는 어려웠다.
가족들은 그때 아버지가 그토록 무모한 투자와 보증을 하지만 않았다면 어땠을까 하는 아쉬움을 토로할 때도 있었지만, 어느 때부터는 그마저 부질없다는 것을 알았다. 점점 그때의 버릇은 온 몸에 씻겨져 나갔다. 가게의 간판을 두 번쯤인가 바꾸고 반찬 가게로 자리를 잡아갈 때, 엄마는 이미 많이 늙었고, 나는 엄마의 반찬 담는 노하우를 물려받아서 비교적 안정적으로 가게를 운영했다. 큰돈을 만지지는 못했지만, 동네에서 무리 없이 오랫동안 운영하는 가게로는 드문 편이었다. 맞은편에서는 동생이 엄마가 처음 시작했던 식당을 물려받아서 운영했다.
직장을 그만두고 장래를 걱정하던 내게는 엄마의 반찬가게를 물려받은 셈이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버스를 타곤 했다. 새로운 아파트로 입주해서는 아직 우리 가족이 함께 살았다. 돌아가신 아버지의 사진이 걸린 거실에서 홀로 소파에 앉아 TV를 보고 있을 엄마의 집으로 터벅터벅 돌아오는 길에 서서는 종종 나는 나 자신의 앞날을 생각한다. 도착할 수 없었고, 도착하고 싶지 않았던 그런 순간에 그것에 견줄 만한 후회가 있었는지 일일이 기억을 뒤져보곤 하였다. 한때는 눈물이 흔하던 시절도 있었는데 이제는 그럴 수도 없었다. 꼿꼿이 서는 것마저 못하면 인생이 영영 끝나버릴 것만 같아서, 함부로 은둔하듯 웅크릴 수 없었다. 아이였을 때는 아버지처럼 늠름하고 당당하고 싶었지만, 이제는 겨우 견뎌내던 순간이 쌓여서 삶을 만든 엄마의 삶을 대견하고 존경스럽게 여겼다. 물론 둘 모두의 삶 중 그 어느 것 하나도 온전히 흉내 내기 벅찼다. 섣불리 흉내 내었다가는 사람들이 비웃듯 수군거리며 흘끔거릴 것 같아서, 낯 뜨거워져 짝 몸을 돌려 서고는 다른 곳을 보기도 했었다. 달아나고 싶을 만큼 발바닥이 뜨거웠다.
“가끔은 남편이 일찍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함께 걷기도 한답니다.”
그렇게 궁여지책으로 반찬가게에서 일을 배우며 운영하였는데, 힘들기만 했던 순간이 지나고, 어느 때엔가는 보람도 있기는 하였다. 이를테면, 받아쓰기를 잘하던 치과 선생 아이가 고등학교에서도 여전히 공부를 잘하고, 우리 가게의 풀떼기 반찬에 익숙해져 이제는 우리 집 것을 찾는다고 하니, 한 사람의 식습관으로 남았다는 것, 밭두렁 먹던 녀석이 언제 그리 컸는지 새삼 놀라 약간의 의미 없는 탄성을 지르기도 했다.
꽃이 한껏 피는 계절에는 늘 과장하여도 좋을 텐데, 여태껏 자고 일어나 반복적으로 걷는 길에서 꽃을 유심히 본 적은 드물다. 늘 그렇듯 아름다운 순간에는 그 아름다움을 미처 몰랐다. 아버지도, 어머니도 그랬을 것이다.
“남편이요? 그때 고시 보다 낭인되어 남탓만 하던 시절에 정말 헤어질 뻔했는데, 어찌하다 보니 결혼도 하고 자식도 생겼네요. (웃음) 딱 모든 게 맞는다고 할 수는 없어도, 오래된 관계란 게 그럭저럭 맞추어지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후회요? 뭘 하더라도 후회는 있고, 또 잘한 부분도 있지 않을까요? 사실 고등학교 동창이고 의대를 다니던 그 아이, 농활에서 함께하기도 했던 그 아이 생각이 가끔은 나기도 해요. 좋아한다는 그런 감정이 아니라, 그 순간의 청춘과 약간의 설렘? 그런 것과 함께 호출되는 아이기도 하거든요. 이제는 이름이 가물가물해졌어요. 박성현이던가? 정말 이름조차 가물가물해졌네요. 얼굴은 말할 것도 없고요. 그때의 사진이 지금도 있을 리 없지요. 정리를 잘하는 편이 아니거든요. 음식 장사를 하면서 그게 제일 고역이랍니다. (웃음) 우리 남편에게도 그렇겠지만, 누구나 엄청 특별한 운명적 존재가 아니더라도, 문득 뭐하고 살까 하는 사람은 있기 마련이죠. 아마도 의사가 되어서 돈 많이 벌고 있지 않을까요? 좋은 의사가 되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