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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철나무꾼 Jun 29. 2024

외롭지만 표현하고 싶지는 않아

거인 이야기의 거인처럼

 아주 어렸을 때, 길을 걷다 유아 영어 교육용 비디오를 파는 아저씨를 만났다. 그때까지만 해도 비디오로 영상을 접하던 시기였는데, 그때 그 영어 비디오가 내가 기억하는 인생 첫 비디오일 것이다. 돈을 허투루 쓰지 않는 엄마가 그땐 아저씨의 말에 설득이 되었는지, 예상치 못하게 애니메이션으로 된 교육용 영어 비디오를 볼 수 있었다.


  비디오의 내용은 밝지만은 않았다. 교훈을 주기 위함이었을까? 한 가지 기억나는 이야기가 있다. 정확한 제목은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내용은 이랬다.

겨울날. 여러 명의 아이들이 있었고, 그들은 거인의 집에 놀러 갔다. 아이들이 성가셨던 거인은 혼자 있고 싶어 집의 담벼락을 쌓아갔다. 큰 키로 하나의 성곽을 완성한 거인은 이제 아이들이 찾아오지 않을 거란 생각에 기뻐했지만 이내 그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스스로 고립을 자초한 것이다.


 그토록 차가워 보였던 겨울날은 냉정했던 거인의 마음을 보여주는 듯했다. 결국 봄이 찾아오고, 생각을 고친 거인이 성벽을 허물고 다시 아이들과 잘 지냈다는 결말이었는지,

아니면 계속해서 고립된 채 자신이 쌓은 성 안에서 죽어갔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다만 분주하게 담벼락을 쌓아 올리던 거인의 손길만이 기억날 뿐이다.


 어제는 잠을 설쳤다. 울면서 잠든 것 같았는데 세시 반에 깨서 잠을 잘 수 없었다.

사무치게 외롭다. 남편에게 말을 해볼까 했지만 나보다 더 힘든 시기를 보내고 있는 것 같아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런 외로움의 근원이 어디서 오는 걸까 생각해 보았다.


 내면의 소리를 무시한 채 외부에서 나를 인정하고 사랑해 주기만을 바라서.


그것도 이유일 수 있겠다.


 최근에 읽기 시작한 책 <홀로서기 심리학>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자유를 갈망하는 ’성의 주민‘과 의존적 성향이 강한 ’마을 주민‘이라는 두 가지 유형의 사람을 소개한다.

‘성의 주민’은 개인주의가 심하고 늘 경계하며, 그런 나머지 타인과 원만한 관계를 맺지 못하는 사람이고, ‘마을 주민’은 타인에게 너무 의존한 나머지 너무도 쉽게 흔들리는 사람이다.


 책을 읽고 나는 나를 ‘성의 주민’이라고 생각했다.

두꺼운 성벽 안에서 고립된 채 세상을 바라보는 시야가 점점 좁아지는 동시에 외로움과 소외감을 함께 떠안는 ‘성의 주민’은 타인과의 교류가 너무 적어서 타인의 감정에 귀 기울이고 받아들이는 능력이 저하된다고 했다.


 너무 놀랐던 것은 공감능력도 퇴화가 될 수 있다는 점이다. 예전에 사망신고만 받아도 울컥하면서 엄마 없이 혼자 살아갈 아기가 눈물 나게 안쓰러웠던 나는,

이제 가까운 사람의 힘듦과 슬픔에도 위로하는 방법을 몰라 헤맨다.


 양극성 장애의 재발 이후, 지인 중 안 좋게 연락을 끊은 사람이 몇 명 있어서 인간관계에 대한 회의가 생긴 것도 그 이유 중에 하나인 것 같다.


 책에서 소개하는 내담자 ‘니나’가 성의 주민으로 대변되는 인물인데, 사례를 읽어보니 너무 내 이야기 같아서 놀랐다.

내가 극히 싫어했던 공감능력 없고 개인주의적인 사람이 몇 년 후 내가 된 것이다.


 이런 폐쇄적인 마음을 좀 더 열고, 표현하고, 혼자만의 세계에서 빠져나오고 싶은데 쉽진 않다.

그래도 우울했던 기분이 많이 올라와서 무언가를 하고 싶다는 생각, 잘 살고 싶다는 의욕은 거의 되찾았다.

시간과 약의 힘인 걸까?


 감정을 표현하고 좀 더 나를 사랑하고 받아들인다면 타인과의 교류에서도 어색함이나 불편함을 느끼진 않을 텐데.

사무치게 외롭다는 말도 이런 데서 기인하는 것 같다.


 외롭고 괴롭다는 이유로, 그리고 왜인지 모를 서운함 때문에 남편의 연락에 미온적으로 대답한 적이 있었다.

그건 대화가 아니었다.


가끔은 외롭다고 말을 하고 싶다.

이것도 내 힘으로 통제할 수 없는 영역일까? 아니면 통제와는 무관한, 내가 극복해야 하는 일일까?

어느 날 사는 게 너무 무료하고 힘들다는 남편의 호소에 내가 죽기만큼 듣기 싫었던, 엄마가 해준 말 ‘사는 게 원래 그렇지. 뭐 특별한 게 있는 줄 아니?‘를 그대로 읊는 나를 보면서 소름이 끼쳤다.


 타인을 진심으로 위로하는 법, 상대방을 편안하게 마주하는 법, 나 자신의 감정을 분명하게 표현하는 법.


 그래도 조금은 알려주고 보여줬으면 좋았잖아.


 나 자신의 감정, 이 글에서는 분명히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나는 지금 혼자인 것 같다. 그래서 너무 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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