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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na Aug 19. 2022

계산기가 필요해

인생은 0 이다.

대학 병원에서 써준 의뢰서를 들고 찾아간 서울 병원에서 뇌파 검사를 다시 해보기로 했다. 뇌파 검사실에 조그마한 모니터에 연결된 여러 개의 선들이 늘어져 있었고 바로 그 옆에는 1인용 침대가 놓여 있었다. 검사실로 들어가니 선생님께서 침대에 편안히 누으라고 하셨다. 아침부터 고단했던 서울행에 나는 금세 침대와 한 몸이 되어  긴장이 풀렸고  따뜻한 이불속의 온기는 나를 따뜻하게 감싸주어 곧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렇게 한동안 잠을 자고 있는데 선생님께서  갑자기  질문을 하셨다.

"100에서 9를 빼면 얼마죠?"

잠에서 정신이 돌아오기도 전에 질문을 하니 그 쉬운 산수 문제도 암산이 안 되는 것 같았다.

"91이요."

"그러면 91에서 7을 빼면 얼마죠?"

"어... 80... 4 인가?"

평소에도 숫자에 약한 나로서 잠결에 들이닥친 갑작스러운 암산 문제는 나를 당황스럽게 만들었다. 

"그럼 84에서 6을 빼면 얼마인가요?"

'아.. 제발 그만.. 틀리면 얼마나 쪽팔릴까 계산기라도 있었으면..'

수능처럼 느껴진 몇 개의 산수문제가  오가고 난 후 뇌파 검사가 끝이 났다. 검사 시간 동안 얼마나 긴장을 했던지 손바닥에 땀이 날 정도였다.

나는 산수뿐 아니라 모든 수에는 약한 편이다. 송금을 할 때 계좌번호를 틀리는 것은 비일비재하고  전화를 걸어야 하는 경우에도 다른 사람에게 전화를 거는 경우가 다반사다. 이처럼 수에 약한 내가 잠도 덜 깬 상태에서 암산을 했으니 손에 땀이 나고도 남을 일이다.

뇌파 검사지를 전해받은 의사 선생님께서는 빙그레 웃으시며 그래프를 보여주셨다.

'내가 푼 문제의 답이 틀리기라도 한 건가?'

잔뜩 긴장하며 앉아있는데 선생님께서는 아주 기분 좋은 말을 해주셨다.

"여기 이 그래프가 수면상태에 보이는 뇌파이고 이건 꿈을 꿀 때 나오는 뇌파예요... 뇌파 상태는 큰 문제가 없지만 측두엽에 뇌파가 약간 이상이 있어요. 환자분은 측두엽 뇌전증인데 심하지 않은 편이라 약으로 조절이 될 거예요."

그 말을 들은 남편과 나는 처음으로 해맑게 웃었다. 해마에 이상도 없고 병도 심각하지 않다니 그동안 걱정했던 무거운 마음이 한 번에 가벼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오늘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수학을 100점 맞은 기분이었다.


어느 날 나는 세상을 숫자로 표현한다면 무슨 숫자가 어울릴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그리고 나는 그것에 어울릴만한 숫자로 0을 지목했다.  다시 말해 세상은 0을 맞추고 살고 있다는 뜻이다.

예를 들어 누군가가 세상에 태어나면 다른 누군가는 죽음을 맞이하고 누군가가  눈물을 흘리는 일이 생기면 누군가는 웃을 일이 생기고 누군가가 빈곤할 때 누군가는 풍족을 누리게 된다는 뜻이다.

이런 원리로 세상은 0을 맞추기 위해 각 사람들에게 때로는 +를 때로는 -를 적절하게 나누어 준다. 그렇기에 지금 불행하다고 해서 영원히 불행할 것처럼 생각할 필요가 없거니와 지금 모든 것이 잘 된다고 해서 그것을 자랑삼아 우쭐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0의 원리로 보면 지금 내가 겪는 시련이 누군가에게는 행복으로 가 있을 테니 얼마나 다행스러운 일인가. 나의 불행이 다른 사람에게도 전해져야 한다고 생각하는 미성숙한 사람이 아니라면 우리는 현재 처해있는 모든 상황에 겸손해질 수가 있을 것이다.

우리는 상황이 +이던-이던 그 연산기호에 집중할 필요가 없다. 세상은 한시에 오차도 없이 정확한 때에 우리의 상황을 0으로 맞추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마음의 여유를 누려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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