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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na Aug 19. 2022

정리의 달인 죽음까지 정리하다

유서 남기기

나는 분명 죽어가고 있었다.

육체는 정해진 때를 향해 걸어가고 있고 나의 기억들은 정해진 때를 향해 달려가며 사라지고 있었다.

육체가 사라지는 그때와 기억이 사라지는 그때가 같은 시간이면 얼마나 좋을까?

아니면 육체가 사라지는 그때가 기억이 사라지는 그때보다 빨리 오면 얼마나 좋을까?



아빠가 계셨던 요양병원에서는 종일 침대에 누워계신 90도 넘은 할머니와 할아버지들이 많았다.

그중 대부분은 치매에 걸리셔서 자식들도 알아보지 못하는 분들이셨다. 그나마 거동이 가능하신 분들은 하루 종일 간병인 분들 옆에 붙어 다니며 아이처럼 행동하는 분들이셨다.

본인이 식사를 했는지, 화장실은 다녀왔는지, 왜 병원에 있는지 아무것도 모르지만 늘 해맑았던 분들... 또는 무언가에 뿔이 나서  아이 마냥 소리를 치고 역정을 내시는 분들. 나는 그런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케어하시는 간병인 분들이 너무나 존경스러워 보였다.


그런데 내가 치매가 걸렸다니... 지금 이렇게 멀쩡한데 곧 나도 그 할머니들처럼 될 거라니... 두려움이 엄습했다.



사라지는 기억들을 붙잡아야 했다.

일기를 쓰고 편지를 쓰고 메모를 남기며 기록을 했다.

나는 내 모든 것을 기록하며 정리했다.

물건을 정리하며 느낄 수 있는 편안함이 기록을 하면서도 느껴졌고 그 편안함에 이끌려 나는 나의 유서를 쓰기 시작했다.

언제가 될지 모를  그 마지막을 손수 정리하고 싶은 마음이었을까?

생활비 통장에서 빠져나가는 보험이나 공과금과 이유가 있는 여러 가지 자동이체들을 적어 남편에게 알려주려고 하니 유서가 아닌 가계부 같은 모양이었다.

뭔가 슬프지만 감동적인 유서를 쓰고 싶었지만 유서마저도 현실을 반영해야 함에 씁쓸한 생각이 들었다.

남편에게 전할 이야기를 마무리하고 가족들에게 보내는 마지막 편지를 쓰려하니 단 한자도 생각나지 않았다.

나와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낸 사랑하는 가족들과의 이별을 위한 편지를 쓰자니 눈물만 흘러내렸다.

나는 그저 사랑한다는 말로 유서를 마무리했다.

아직은 시간이 있을 테니 사랑해라는 말이 유서에만 남겨지지 않도록 지금 바로 사랑한다는 말을 해야 할 것 같다.



종종 드라마에서 나오는 재벌들이 사후 상속문제를 분명히 하고자 유언을 남기는 경우를 보게 된다.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유서라는 단어를 적으면 유서를 남기고 극단적인 선택을 한 유명인이나 사람들의 뉴스가 줄지어 나온다.

이렇게 보면 유서는 좋은 이미지보다는 좋지 않은 이미지와 더 잘 어울리는 것 같다.

재벌들이 남기는 유서는 자신들이 죽고 난 후 일어날 수 있는 분쟁을 막기 위한 것이며 후자의 경우들은 자신들이 그런 선택을 할 수밖에 없었던 감정의 호소이다.

비록 전자와 후자의 경우가 크게 달라 보일지라도 그 속을 들여다보면 사랑에 대한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보았다. 자신이 죽어서도 자식들이 싸우지 않고 잘 지냈으면 하는 부모의 마음, 사랑의 부재가 일으킨 안타까운 소식들..( 그들의 마음을 헤아려 줄 사랑이 가득한 누군가가 있었더라면..)

만약 충분한 사랑이 있다면 유서가 필요할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그렇기에 우리의 마지막 유서에 남겨질 유언은 사랑한다는 말이 되었으면 좋겠다.


"나는 당신을 사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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