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 증상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는 말을 들은 후부터 나는 완벽하게 치매 환자가 되어가고 있었다. 그것도 아주 빠른 속도로...
12시간마다 먹어야 하는 약을 위하여 알람을 맞추고 그것도 모자라 시시때때로 남은 약 개수를 확인했다.
"오빠 나 오늘 약 먹었어?"
"아까 먹던데? 왜 기억이 안 나?"
"아니. 기억나. 그냥 긴가민가해서 확인한 거야."
나는 사실 기억이 나지 않았다.
약을 먹었는지 몇 개의 약이 남았는지... 결국 나는 포장된 약 하나하나에 요일을 적었다.
월 1, 월 2, 화 1, 화 2...
모든 것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로 했다. 먹고 있는 약도 뇌를 고치는 약이 아닌 비타민 정도로 생각하기로 마음먹었다.
그런데 그런 마음도 약 부작용이 올 때면 무너져 내렸다.
주체할 수 없는 우울감이 들어 죽고 싶은 감정이 찾아들 때면 금방이라도 창문 밖으로 몸을 던지고 싶은 마음이 들었고 이유 없이 화가 치밀어 오를 때는 미친 사람처럼 소리를 지르기도 하고 말리는 남편을 밀어내며 발버둥을 쳤다.
그러다가 감정이 격해지면 과호흡으로 인해 털썩 주저앉기를 반복하는 날이 많아졌다.
나는 변해가는 내 모습이 두려웠다.
이제 나는 내가 아닌 나가 되어갔다.
'결국 모든 사람들은 나를 감당할 수조차 없어지겠지?'
어느 밤 나는 나와 나란히 누워있는 남편에게 말했다.
"오빠, 만약에 내가 정말 많이 아프면 날 병원으로 보내줘요. 그래야 내가 편할 거 같아. 그리고 정말 미안해."
"응. 그렇게 할게. 그렇지만 그럴 일은 없을 거야. 그러니깐 미안해할 필요가 없어."
"그래. 정말 그랬으면 좋겠다."
"걱정 마. 내가 니 옆에서 끝까지 지켜줄 거야."
나는 그 말에 피식 웃었지만 이 순간의 행복이 조금만 더 길어지길 기도했다.
건망증이 심해지고 기억조차 나지 않는 경우가 빈번해졌다. 나는 되도록 모든 것을 기록했다.
휴대폰 메모장에 기억해야 할 사항들을 빼곡히 적어갔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가족들 한 명 한 명을 떠올리며 편지를 썼다.
서운한 것도 많았고 원망스러운 적도 있었던 가족들이지만 마지막으로 남기는 글이라 생각하니 그저 고맙고 사랑하는 마음만 느껴졌다. 메모장에 빽빽하게 쓰여 있는 글들을 읽고 다시 읽으면서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말로는 전하지 못한 이야기들을 머릿속에 기억하고 기억을 했다. 그리고 오랫동안 그 편지들이 나의 메모장에만 머물러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시한부의 삶이 이럴지도 모르겠다. 좀 더 오랫동안 사랑하는 사람들을 기억하고 싶은 그런 마음일 것 같다. 육체가 죽어가는 아픔과 정신이 죽어가는 아픔을 겪는 우리에게는 오늘이 가장 건강하고 오늘이 가장 아름답고 오늘이 가장 행복한 날이 아닐까 싶다.
나는 오늘도 내가 알지 못하는 내일을 향해 걸어가고 있다. 그러나 그 내일도 오늘만큼 건강하고 아름답고 행복한 날이 되길 간절히 바라본다.
나는 가끔 내가 아닌 내가 된다.
그럴 때마다 나는 머릿속으로 '이건 내가 아니야'라는 말을 외쳐댄다.
그러나 그런 외침도 나의 행동을 제어하지 못한다. 격해지는 호흡과 난폭해지는 행동들 나조차 감당하기 힘든 이런 나를 부둥켜안아주는 남편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그제야 남편의 목소리가 귓가에 들려오면 아이처럼 큰 울음소리를 내며 울어버리는 나.
나도 이렇게 힘든데... 남편은 얼마나 힘들까? 미안한 마음과 서러운 마음에 한바탕 울고 나면 속은 후련해지지만 마음의 빚은 하루하루 늘어만 간다.
"오빠는 내가 치매가 될 거라고 했을 때 어땠어? 결혼한 거 후회했지?"
"나는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한 적이 없고 내가 이 여자를 끝까지 지켜야겠다는 생각만 했는데?"
"진짜? 좀 감동인데. 그렇지만 내가 더 많이 아프게 되면 달라질 수도 있을걸?"
마흔 살과 마흔한 살 나이에 만나 5개월 만에 결혼을 하고 신혼 두 달 만에 뇌전증 진단과 치매가 될 수 있다는 아내랑 살아가고 있는 이 남자 내 남편.
나랑 만나지 않았어도 나랑 사랑만 하지 않았어도 나랑 결혼만 하지 않았어도 좋았을 텐데...
세상에 없는 불쌍한 남자를 만들지 않기 위해서라도 나는 이 병을 이겨내야 할 것 같다.
가끔씩 찾아오는 내가 아닌 나도 거부하지 않고 받아들이기로 마음을 먹고 나니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나를 만나야 할지 모르지만... 두려워하지 않길 나에게 행운을 빌어본다.
나이가 드는 것은 참으로 좋은 면이 많은 것 같다. 그중에서 가장 좋은 점을 들자면 너그러움, 즉 수용적인 마음을 갖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일명 철이 난다는 말이 이에 해당하는 말일 것 같다. 물론 나이가 들어도 철없는 사람들도 많겠지만 대부분은 나이가 들면서 진정한 어른이 되어가는 것 같다.
철이 없을 땐 누군가와 대화를 할 때면 내 말을 하기에 바빴지만 철이 들어가면서 말을 하는 것보다 중요한 것은 상대방의 말을 들어주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와의 의견 차이가 난다고 해서 그것이 틀린 것이 아니라 다를 수 있다는 이해를 갖게 되었으며 모든 것들을 너그럽게 감싸 안을 수 있는 큰 마음을 갖게 되었으니 나이가 드는 것은 늙어가는 것이 아니라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 아닐까?
우리 모두는 상황에 얽매여 살아가는 연약한 인간들이기에 인생에서 힘든 일들은 다 비켜갔으면 하는 마음들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런 일은 있을 수 없다는 것은 모두가 알고 있다. 그렇다면 이런 일들이 다가왔을 때 우리는 어떤 마음을 가지는 것이 좋을까?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안간힘을 써서 밀어내려고 하면 할수록 그 힘든 일은 나를 더 지치게 만들 뿐이다. 이럴 때일수록 우리는 힘을 빼고 마음의 여유를 가지면서 모든 일을 받아들일 필요가 있다. 그렇게 그 일을 기꺼이 받아들일 때 희한하게도 힘들었던 일들이 조금씩 해결되어가는 경험을 하게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