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은 성실하고 나를 아주 아껴주는 사람이다. 3년이 지난 지금도 그 사랑은 변함이 없다.
오늘 아침에도 나는 남편에게 똑같은 질문을 한다.
"오빠는 여전히 나를 사랑해?"
그러면 남편은 늘 똑같은 대답을 한다.
"응. 더 많이 사랑해"
나를 있는 그대로로 사랑해주는 사람.
상처투성이인 나를 안아주는 사람.
나도 이 사람에게 따뜻한 사람이 되고 싶다.
3년 전 어느 날이었다.
여느 때처럼 과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왔다. 11월 늦가을에 쌀쌀함이 온몸으로 스며들어 컨디션이 좋지 않게 느껴졌다. 마지막 수업은 집에서 하는 수업이라 긴장이 풀렸다.
'이제 하나만 하면 끝이야. 끝나면 푹 쉬어야지'
아이들의 숙제 검사를 마치고 책을 펼쳤다...
뭔가 분주한 소리가 들렸다.
아이들이 쫑알거리는 소리.
남편이 나를 흔들어 깨우는 소리.
엄마가 현관문을 열고 들어오는 소리.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내가 죽은 걸까? 엄마는 왜 울고 있지?'
"혜진아, 정신을 차려봐. 눈을 떠봐."
아주 깊은 잠에 빠진 나를 흔들 어깨 우는 느낌이었다. 무거운 눈을 가까스로 떴을 때 걱정하는 가족들의 모습이 보였다.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
수업 도중 나는 의식을 잃고 쓰러졌다고 했다. 심한 과호흡 상태로 기절을 한 것이었다. 남편은 놀란 아이들의 소리를 듣고 올라와서 호흡을 확인했다. 살아있었다.
다음날 아침 일찍 집 앞에 있는 동네병원을 찾았다.
"제가 어제 수업 중에 기절을 했다고 해서..."
"아.. 혹시 기절했던 상황이 기억이 나나요?"
"아니요. 전혀 기억이 나질 않아요"
"음. 그러면 큰 병원을 찾아가는 게 좋을 거 같아요. 의뢰서를 써줄 테니 큰 병원으로 가보세요."
나는 의뢰서를 받아 들고 병원을 나왔다. 남편은 오히려 나보다 걱정을 하는 눈치였다.
"별일 아닐 거야. 걱정 마"
그 길로 큰 병원을 찾았다. 정확한 진단을 위해서 CT촬영을 해야 한다고 했다. 직감적으로 무언가가 잘못되어간다는 것이 느껴졌다.
촬영이 끝난 후 선생님께서는 사진을 보여주며 설명해 주셨다.
"사진상으로 보이는 이 부위가 해마입니다. 이곳이 하얗게 보이죠?"
'해마? 해마는 기억력과 관계되는 것이라고 들었던 거 같은데... 무슨 말을 하려고 그러는 거지?'
"좀 더 큰 병원에서 정밀 검사를 해봐야겠지만 환자분께서는 해마체 경화입니다."
"혹시 그게 치매 같은 건가요?"
"음. CT상에서는 그렇게 보이는데 좀 더 정밀한 검사를 받아보세요."
의사는 손바닥만 한 종이에 '해마 경화'라는 글을 써서 건네주었다. 나는 믿을 수가 없었다. 내가 치매라니?
남편과 나는 아무 말을 하지 않았다. 나는 대학병원에 전화를 걸어 다음날 진료예약을 했다.
집에 도착하자 눈물이 났다. 늘 죽는 것은 두렵지 않다고 말하던 내가 기억을 잃어가는 병에 걸렸다고 생각하니 두렵고 슬픔이 밀려왔다. 결혼한 지 2개월 차. 앞으로 좋은 기억만 만들어가며 살자고 약속했는데 나는 기억을 잃어버리는 사람이 되었다고 생각하니 눈물이 흘러내렸다.
나는 살았지만 죽은 사람이 된 것이었다.
남들만큼만 살아보자고 그렇게도 열심히 살았는데...
이제는 사랑하는 사람과 행복하게 살자고 했는데...
모든 것이 거짓말이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뒷날 예약해둔 대학병원을 갔다. 뇌파 검사를 포함한 몇 가지의 검사가 이루어졌다. 냉철하게 생긴 의사 선생님은 텀블러에 들어있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길게 늘어져있는 검사지를 보았다.
"사진 상으로는 해마 체경 화가 맞습니다. 약하지만 뇌파에서도 문제가 보이고요."
"그럼 저는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아직은 심하진 않지만 약을 먹어야 합니다. 일단 일주일분의 약을 드릴 테니깐 먹어보시고 다시 오도록 하세요."
하고 싶은 이야기가 많았지만 그냥 하기가 싫었다. 내가 이것저것 물어본다고 해서 달라질 게 없으니깐..
하루에 두 번 약을 먹었다. 이상하게도 약을 먹은 후로는 신경이 예민해졌다. 지금의 상황과 약 때문에 나는 성난 고양이처럼 털을 세우고 하악 거리는 꼴이었다.
엄마와 함께 다시 의사를 만나러 갔다.
"약 먹으면 다 나을 거니깐 걱정하지 마."
'나도 그랬으면 좋겠어'
진료실 문을 열고 엄마와 함께 나란히 앉았다.
"선생님, 그런데 저는 아이들을 가르치는 일을 하는데 그 일을 계속할 수 있을까요?"
"아직은 괜찮지만 그만두셔야 할 겁니다."
"그럼 운전은요?"
"운전이나 수영은 절대 하셔서는 안됩니다."
"젊은 사람은 진행속도가 빠르다고 하던데..."
"아무래도 그렇습니다"
더 이상의 질문은 하지 않았다. 엄마는 말이 없이 눈을 떨구었다.
처방전을 받아 들고 약국으로 가는 길에 엄마가 말했다.
"무슨 의사가 저러노? 의사가 환자한테 약 먹으면 낫는다고 해야지.."
엄마 앞에선 울어서는 안 된다. 그렇지만 자꾸 목이 칼칼하게 메어왔다.
"엄마 괜찮아. 그리고 지금부터 우리 더 행복하게 지내자."
'내가 엄마를 기억할 수 있을 때까지 말이야.'
나는 그렇게 행복할 것을 약속했다.
누구에게나 하루라는 24시간이 주어진다. 그리고 그 24시간이 365번이 되면 일 년이 되고 365번이 적게는 한두 번에서 많게는 백여 번이 되어 생의 기한이 된다.
누구에게나 동일하게 주어진 이 24시간이 각자에게 얼마큼 주어졌는지는 오직 신만이 알지만 치매로 기억이 없어지는 시간과 삶에서 죽음으로 향하는 시간 중 어떤 것이 더 길까라는 엉뚱한 생각을 해보게 된다.
나에게 죽음으로 기억이 사라지는 순간이 빠를지 치매로 기억이 사라지는 순간이 빠를지는 모르지만 기억이 남아있는 이 시간이 나에게는 가장 건강하고 젊은 시간이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