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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Gina Jul 10. 2022

100mg의 위력

내려놓음과 기적의 상관관계

우리 부부는 10월에 결혼을 했다. 그리고 나는 한 달 후인 11월에 뇌전증 진단을 받았다. 그리고 치매가 될 것이라는 충격적인 말도 함께...

연애 5개월 만에 결혼을 하면서 서로에 대해 알아 갈 시간도 모자랄 판에 기억이 사라지는 병이라니...

말은 안 했지만 남편은 또 얼마나 속앓이를 하고 있을까라는 생각에 나는 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마음으로는 더 많이 사랑해주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처방받은 약에 적응하는 동안 부작용은 나뿐만 아니라 가족들마저도 힘들게 했다.

무엇보다 가장 심한 부작용은 스스로 감정을 컨트롤할 수 없는 것이었다.

급격히 우울해질 때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나를 위협했고 주체할 수 없는 분노가 일 때면 미친 사람처럼 날뛰었다. 그러다 조금 안정이 되면 나 자신이 저지른 행동들에 후회와 죄책감이 찾아왔다.

이렇게 살다가는 정말 큰일이 일어날 것 같았다.


"하나님, 저는 원망하지 않아요. 하지만 조금 슬플 뿐이에요. 그렇지만 하나님께서 하실 수 있으시면 제 병을 고쳐 주세요. 그러나 고쳐지지 않는다고 해도 저는 괜찮아요."


마흔까지 살면서 내가 깨달은 것은 겪어야 할 일들은 겪어야 한다는 것과 발버둥 치며 달아나려고 하면 잠시는 피할 수 있지만 결국 그것을 만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안간힘을 쓰기보다 몸의 힘을 빼고 다가오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가장 힘들지 않은 방법이다. 그럼에도 희망적인 것은 결국 모든 일에는 끝이 있다는 것이며..


"서울을 한번 가보는 게 어때요? 여기는 지방이니까 아무래도 서울보다는 모든 면에서 차이가 날 수도 있으니 큰 병원을 한번 가보세요."


집사님의 말씀은 희망처럼 느껴졌다. 병을 나을 수 있다는 희망보다는 지금의 상태를 완화시킬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생긴 것이다. 국내에서 가장 유명하다는 전문의에게 진료예약을 하려면 적어도 몇 개월을 기다려야 한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는터라 서둘러 진료예약을 하기 위해 휴대폰을 들었다.

나는 운이 좋게도 환자 한 명이 예약 취소를 한 시간에 예약을 할 수 있었다.

일주일 뒤 찾아간 병원에서 모든 검사가 다시 이뤄졌다.

준비해 간 MRI 사진과 소견서, 뇌파검사를 통해 나는 다시 진단을 받게 되는 것이었다.


"MRI 상에서는 심각한 상태는 보이지 않습니다."

"네? 해마에 문제가 있다고 들었는데요? 그럼 치매가 아닌가요?"

"해마에는 이상이 없고요. 아마 MRI 촬영 시 머리가 비스듬히 들어간 것 같아요. 종종 있는 일입니다."

나는 어이가 없이 입이 벌어졌다. 이런 실수가 있을 수 있다니 생각할수록 기가 찼다.

"그런데 뇌파검사에서는 조금 이상이 보이네요. 혹시 어렸을 때 열병을 앓은 적이 있나요?"

"아니요, 그런 적은 없었을 텐데.."

"그렇다면 가족 중에 뇌전증이신 분이 계신가요?"

"아니요, 그런 분도 없으신데.."

"환자분은 왼쪽 측두엽에서 뇌파상 뇌전증 반응이 나타나고 있어요."

의사 선생님은 그동안 내가 겪었던 몸의 반응들을 족집게처럼 이야기하셨다.

"아내가 약을 먹은 이후로 예민해졌어요."

"아, 그 약이요? 약의 부작용이 심해서 저는 제 환자에게는 처방하지 않습니다. 성격이 정말 달라질 수가 있죠. 아마 환자님도 그랬을 거예요. 새로운 약을 처방해 줄 테니 이 약을 먹어봅시다."

"그럼 저는 이 약을 언제까지 먹어야 하나요?"

"뇌전증은 완치가 없는 병이라 생각하셔야 합니다. 그렇지만 병을 완화시킬 수 있는 약이 있으니 절대 빠지지 말고 약을 먹어야 합니다."

"약을 안 먹으면 어떻게 되나요?"

"약을 먹으면 증상이 나타나지 않기에 종종 다 나았다고 착각해서 약을 먹지 않는 경우가 있어요. 제 환자 중 에도 여러 명이 세상을 떠났어요. 안타까운 일이죠."

선생님은 약을 빼먹지 말라는 말을 신신당부하셨다.

치매는 해프닝으로 끝난 일이라 생각이 들 수도 있지만 나는 기적이 일어난 것이라고 믿었다.

고작 100mg의 알약 하나로 내 모든 삶이 송두리째 바뀌었던 악몽 같은 한 달간의 치매가 완치가 되고 이제 뇌전증 환자로 평생을 살아가야 하지만 내 아름다운 기억들이 소중히 간직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잃어봐야 그것이 소중한 것인 줄 아는 바보 같은 나에게 치매는 많은 것을 깨닫게 해 준 소중한 병이었다.



언젠가 예능프로에서 한 여자 가수가 자신의 무명시절 이야기를 하는 것을 들은 적이 있다. 지금은 이름만 대면 모르는 사람이 없는 유명가수가 되었지만 그때 당시만 해도 연예인인 줄도 모르는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던 시절을 보냈었다고 했다.

그러던 어느 날 출연한 오디션 프로에서 그녀의 이름을 떨치게 되는 계기를 만들게 된다. 그때 그녀는 그 프로를 마지막으로 출연한 후 자신의 꿈이었던 가수를 그만 두기로 마음먹었던 때였다고 했다. 그런 마음을 먹기까지 정말 힘들었을 테지만 자신의 꿈마저도 내려놓으니 오히려 한결 마음이 가벼워졌다고 했다. 그녀는 그 마지막 무대에서 경쟁이 아닌 자신만의 무대를 즐기면서 그 무대를 마무리했고 바로 그 순간 기적이 그녀를 찾아왔다. 그리고 그녀는 자신의 꿈을 이루어냈다.

우리는 종종 혼자의 힘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들에 부딪치곤 한다. 이런 일이 생길 때는 신이 나타나서 기적을 베풀어 줬으면 하는 마음이 든다. 만약 신의 도움을 받고자 한다면 해답은 바로 "내려놓음"이라고 할 수 있다.

간절히 바라는 일일수록 우리는 내려놓을 줄 알아야 한다. 그러나 그것은 정말 힘든 일이다.

"나는 정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았어"라고 말하지만 우리의 마음을 찬찬히 들여다보면 끝내 내려놓지 못한 하나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우리가 완전히 내려놓지 못한 이유는 용기가 부족해서라기 보다는 두려움이 크기 때문일 것이다. 정말 완전히 내려놓았다가 아무것도 되지 않으면 어떻게 할까라는 두려움이 스멀스멀 올라와서 마지막 한 가닥이라도 잡고 싶은 마음이 드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감하게 그 한가닥마저도 털어버려야 한다.

기적을 바라는 일이 있는가? 정말로 모든 것을 내려놓았는지를 먼저 확인해보자. 마치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툭툭 털어버리는 순간 기적은 우리 앞에 벌어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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