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에게 다정해지기로 했다.(2)
안녕.
첫인사가 어려웠던 건 어쩌면 그다음 말을 시작하기가 어려워서였는지도 몰랐다.
거실을 휘몰아치던 햇살은 바닥으로 고요히 내려앉아있었다. 그는 기다렸다. 이미 다 식어버린 찻잔을 인내심 있게 붙잡고 있었다. 약속도 잡지 않고 갑자기 방문했을 땐 이 정도의 어색과 침묵은 각오한 모양이었다. 내내 서두르지 않았다.
하지만 나는 말해야 했다.
살면서 아니 죽기 전에 한 번은 있어야 할 일이었다고 생각했다. 일정한 소리로 시간이 가고 있음을 알려주는 초침 때문에 마음이 급해졌다. 시계가 째깍거릴 때마다 그가 증발하고 있는 것 같았다. 기다린 적은 없었지만, 지금 사라지면 다시 기회가 없을지도 몰랐다. 차분히 가라앉은 햇살도, 식어버린 차 향기도 나의 대사를 기다리고 있었다.
미안해.
모든 긴장의 끈이 풀렸다. 터져 나오는 눈물에 햇살은 깨지고 향기는 자취를 감췄다. 해는 일찍 저물었고 밖은 시간을 뛰어넘어 밤이 되었다. 눈물로 일그러진 눈으로 바라본 그의 얼굴도 일그러져 있었다. 밤 그림자가 살짝 그의 얼굴에 드리운 것 같았다. 나의 사과가 우리의 화해로 이어질 수 있을까. 그의 얼굴에는 점점 더 깊은 밤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가 사라질 것 같은 두려움에 나는 서둘렀다.
치유받았어야 했어.
괜찮지 않다고 말해야 했어.
한동안 문을 닫고 나오지 않았어야 했고
화도 내야 했어
억울하고, 분하다고 소리쳐야 했어.
그래야 했어. 충분히.
......
그런데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어.
그의 눈이 비어있었다.
눈물은 없었지만 슬픔은 눈물로만 표현되는 것은 아니었다. 아파 본 사람이 아는 눈. 아파서 울었을 눈이고 두려움에 떨었을 눈이다. 원망과 외로움에 사무쳤을 눈이다. 쏟아진 눈물에 존재는 잠겼을 테고, 잠긴 존재가 마를 때까지 갇혀있었던, 눈이다. 나의 눈물이 사치로 느껴졌다. 울 수 있는 눈물이 남아있다니...
그는 내내 어루만지기만 하던 찻잔을 들어 올렸다. 이미 다 식어버리고 향도 날아간 차에서 무슨 맛이 날까? 그도 무엇을 해야 하는지 알지 못하는 것 같았다. 나는 처형을 기다리는 사람처럼 그 앞에 앉아 있었다. 이제 기다림은 나의 몫이었다.
괜찮아.
무죄. 예상했던 가장 강력한 형벌. 나는 그에게서 다시는 격리되지 못할 것이다. 그는 나를 감옥에 보내지 않았다. 대신 그의 곁에 나를 두는 것을 택했다. 나는 항소하지 않기로 했다. 판결은 마무리되었다. 간신히 웃어 보였다. 그가, 오래되고 낯선 내가.
오래되고 낯선 나.
상처로 얽힌 얼굴로 웃으며 나를 찾아왔던 그는 분명 오래된 나였고, 낯선 나였다. 나는 그 모순적인 나와 마주하며 괴롭고 다행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나는 가장 잔인한 시간과 오래된 상처를 마주해야 했다. 세월이 차마 어루만지지 못한 고된 아픔이었다.
질책하고 다그치고 과소평가며 자신을 괴롭히는 것은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나는 그때 외면을 선택했었다. 인생의 나락에서 떨어진 나를 그 구덩이에서 꺼낼 생각을 하지 않았다. 어둡고 무섭고 아득했다. 그래도 나는 외면했다. 고통의 신음을, 두려움의 떨림을 구덩이에 그대로 묻어버렸다. 나는 나에게서 가장 아픈 그를 떼어내 구덩이가 가두어 외면했다. 외면은 방치로 이어졌고 방치는 기억의 수정 혹은 삭제를 요구했다. 나는 모든 요구에 순순히 응하며 그를 잊어갔다. 잊을 거라 했다. 잊었다고 생각했다. 잊은 줄 알았다.
그런데 사람을 죽이지 못하는 아픔도 있었다. 어떤 기억은 왜곡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날수록 뚜렷해질 뿐. 오래되고 낯선 나와 마주하며 고스란히 아픔을 감당해 온 그와 만나며 무엇이 그를 죽지도 못하고 끝끝내 나를 다시 찾게 만들었을까 생각했다. 그는 무엇을 바랐던 걸까?
상처받고 아팠을 그에게, 나에게,
친절하게 대해준 적 없는 그에게, 나에게,
용기 내어 안아준 적 없는 그에게, 나에게,
나는 무엇을 해야 할까?
그런 건 없어.
네가 할 수 있는 그런 건 없어.
그였는지 나였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말했다.
아무것도 안 해도 돼
그였는지 나였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말했다.
그냥, 같이 있으면 좋을 것 같아.
그였는지 나였는지 모르겠지만 누군가 말했다.
별도 하나 없이 깊은 밤을 바라보며 칠흑 같은 어둠도 무섭지 않다고 말했다.
그였는지 나였는지 모르겠지만, 중요하지 않았다.
따뜻한 차도 눈이 부신 햇살도 없었다.
그저 깊은 밤, 적막 속에서
나인지 그인지 혹은 우리인지, 중요하지 않았지만, 함께 있었다. 더할 나위 없이 좋았다.
나는 나에게 다정해지기로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