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편의점 패밀리마트 앞에 갔으나 소녀가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에 어디로 가버린 것일까. 나는 두리번거리며 소녀를 찾았다. 거리는 평소의 주말 저녁과 다름없이 많은 사람이 오가고 있었다. 편의점 안 들어가 봐도 없었다. 다시 밖으로 나와서 주변을 살폈다. 너무 당황한 나머지 소녀의 존재가 진짜였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이름을 크게 불러 보고 싶었다. 하지만 미망! 하고 외치려는 순간 나 자신이 미련한 망아지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나는 편의점 앞에서 망연히 서 있었다.
아저씨, 이제 왔구나!
등 뒤에서 소녀가 불쑥 나타났다. 활짝 웃으며 두 손으로 내 팔을 잡았다.
아, 여기 있었구나. 난 또 가버린 줄 알았네.
아직 안 가. 시간이 좀 남았어. 엄마가 보낸 기사들이 오고는 있어. 어디로 오라고 할까?
우리는 다시 걷기 시작했다. G 시민공원까지는 20분이 넘는 거리였다. 밤공기는 차가웠다. 하지만 며칠 전에 비해 날씨가 많이 풀렸기에 걷기 힘들 정도로 추운 건 아니었다. 바람도 불지 않았다. 차도에는 차량 행렬이 길게 늘어서 있었다. 보도에는 사람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우리는 한 번 먹으면 중독되고 만다는 마약 떡볶이를 파는 노점상을 지났다. 왕만두와 김치만두를 파는 가게의 입구에는 커다란 솥이 놓여 있었고 하얀 연기가 모락모락 피어올랐다. 붕어빵과 옛날식 호떡을 파는 노점상 아줌마는 옆자리의 지갑 노점상과 뭔가 티격태격하고 있었다.
넌 아빠가 없니? 하고 소녀에게 물었다.
소녀는 슬픈 표정을 짓더니 고개를 저었다. 아빠는 기억나지 않아. 오래전에 죽었어. 바로 이 별에서 아빠가 죽었어. 난 아빠 무덤을 찾아 여기에 왔다가 조난당한 거야. 나는 고개를 돌려 소녀의 얼굴을 살폈다. 소녀는 무심한 표정으로 어두운 거리를 바라보았다. 이내 빙긋 웃었다. 아빠 무덤은 못 찾았지만 난 괜찮아. 아빠가 살던 이 별에 와서 좋았어. 나는 속으로 생각했다. 정말 황당한 이야기군. 어쨌든 아빠가 없다는 건가. 소녀의 말을 모두 믿기 어려웠지만, 어쩌면 소녀의 아빠가 진짜 이 세상에 없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G 시민공원에 도착하자 날이 완전히 저물었다. 사방이 어두웠다. 겨울이라서 그런지 공원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이곳을 선택하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소녀와 나는 공원 입구로 들어섰다. 중앙 시계탑 근처에는 등불이 켜져 있었다. 나와 소녀는 중앙 시계탑에서 조금 떨어진 벤치에 앉았다. 소녀는 숄더백을 옆에 내려놓고 나무상자를 다시 꺼냈다. 그리고 자기 무릎 위에 놓았다. 세 개의 빨대를 꺼내어 세 개의 구멍 속에 넣고 이리저리 조정하기 시작했다. 빨대가 안테나 역할을 하는 것인지 아니면 다른 기능을 가진 것인지 궁금했다. 문득 유치한 소녀의 상상에 동조하는 나 자신이 우스웠다. 나는 소녀의 옆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우주 라디오인 나무상자를 바라보았다. 그저 평범하기만 했다.
소녀가 고개를 들어 밤하늘을 응시했다. 나도 밤하늘을 보았다. 오후에 맑았던 하늘이 밤의 장막에 가려 깊고 푸른빛을 띠고 있었다. 별이 하나둘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나는 벤치에 등을 기댔다. 소녀는 다시 귀를 기울여 라디오를 듣기 시작했다. 그 모습이 MP3 음악을 자주 듣던 진이와 닮아 보였다. 이제 곧 그들이 올 거야. 15분 안에 이리 오기로 했어. 소녀의 눈망울이 공원의 가로등 불빛에 물들어 반짝였다. 잘 되었네. 나는 애써 여유로운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녀는 조용히 라디오를 발밑에 내려놓았다. 그리고 다시 밤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어두운 하늘에 눈길을 주다가 속삭였다. 도와줘서 고마워. 사실 배가 너무 고팠어. 고향에 돌아가면 아저씨에 대해 엄마에게 말할 거야. 고마운 사람이라고.
멀리서 사이렌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경찰이 벌써 온 것일까? 괜히 가슴이 울컥했다. 내가 왜 경찰에게 신고한 것인지 후회스럽기도 했다. 하지만 사이렌 소리는 이내 멀어졌다. 안도했다. 소녀에게 사실대로 말해야 하는 게 아닐까. 나는 망설이며 우주 라디오를 바라보았다. 순찰 경찰관이 오면 소녀를 데리고 갈 게 분명했다. 하지만 소녀는 지금 다른 일행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었다. 물론 나는 다른 누군가가 우주를 가로질러 소녀를 찾아오는 외계인이라고 믿지 않았다. 텅 빈 나무상자가 지구로 다가오는 우주선과 교신하는 통신수단일 수는 없었다. 외계 우주선이 서울 상공에 나타날 일도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소녀에게 미안한 마음이 커졌다. 약속 시간을 한 시간 정도 늦출걸. 후회가 밀려왔다. 하지만 경찰은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나의 신고 전화를 장난 전화로 치부해 버릴 수도 있었다. 신고할 때 나는 이름과 주소를 적당히 꾸며댔다. 전화를 받은 여자 경찰관이 신고자의 이름과 주소를 확인해 보면 그런 사람이 없다는 걸 쉽게 알아낼 수 있을 거였다. 그랬으면 좋겠다고 중얼거렸다. 소녀는 여전히 밤하늘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빨리 엄마가 보고 싶어.
내가 지구를 방문한 외계인과 조우하게 될 확률은? 즉, 외계인이 남몰래 지구를 방문했을 때 다른 사람이 아닌 나와 마주칠 확률은 얼마일까? 나는 머릿속으로 확률을 계산하기 시작했다. 아내에게 배운 이런저런 계산법을 모방하려고 노력했다. 우리 은하에 지적인 외계 문명이 만 개가 있다고 가정하고, 이제 이들 외계인 문명이 자신들의 외교 대표를 한 명씩 지구에 파견했다고 설정했다. 그리고 외계인 대표들은 지구 어딘가에 숨어 있다고 가정했다. 지구의 총인구가 70억 명이라고 대충 어림잡으면, 만 명의 외계인 가운데 하나가 우연히 내 앞에 나타날 확률은 70억 분 1에다가 1만을 곱하면 될 것 같았다. 따라서 확률은 대략 7만 분 1이라고 할 수 있었다. 로또에 당첨될 확률보다 훨씬 높았다. 하지만 나는 나의 계산에 아무런 확신을 가질 수 없었다.
나는 소녀에게 물었다. 그들은 멋진 우주복을 입고 우주비행선에서 내려오는 거니? 내가 생각해도 어이없는 질문이었다. 소녀는 풋 하고 웃었다. 아니야, 그냥 평범한 옷차림으로 나타나 날 데려갈 거야. 여기 사람들 눈에 띄면 안 되니까. 모든 사람이 플레이아데스로 가길 원하면 골치 아파. 그래서 몰래 떠나야 해. 아저씨는 특별하니까 머 원한다면 같이 가도 돼.
겨울밤 공기가 점점 더 쌀쌀해졌다. 공원에는 마른 나뭇가지 덤불들이 여기저기 있었다. 공원 입구 밖에서 자동차가 움직이는 소리가 들렸다. 어느 순간 조용해졌다. 갑자기 커피가 마시고 싶었다. 주변을 둘러보니 커피 자판기가 보이지 않았다. 그때 공원 입구에 경찰 순찰차 한 대가 들어서는 모습이 보였다. 파란색과 붉은색 경광등이 반짝거렸다. 가슴이 뛰기 시작했다. 나는 죄책감을 느끼며 소녀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들은 언제 오니? 하고 물었다. 소녀는 조만간, 하고 대답했다. 순찰차가 정지하고 양쪽 문을 동시에 열렸다. 두 명의 경찰관이 차에서 내렸다. 그들은 주변을 살피며 천천히 걸어왔다. 나는 황급히 일어나 소녀의 팔을 잡아끌었다. 잠깐 저쪽으로 숨자. 소녀는 의아한 표정으로 나를 올려다보았다. 나는 소녀에게 말했다. 저기 오는 사람들이 널 데려갈 거야. 그러니 어서 숨어. 소녀가 경찰관들이 오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갑자기 활짝 웃었다. 벌떡 일어나며 내게 말했다. 맞아. 저 사람들이 바로 그들이야. 나를 플레이아데스로 데려갈 거야. 엄마가 보낸 사람들은 평범한 이 동네 사람들 차림으로 올 거라고 했어.
나는 할 말을 잃은 채 소녀를 바라보았다. 왜 그들은 빨리 오지 못하는 걸까? 경찰관이 먼저 오다니! 속으로 중얼거렸다. 마음이 초조해졌다. 이윽고 두 명의 경찰관이 중앙 시계탑 앞을 지나 우리가 있는 곳으로 다가왔다. 나와 소녀를 발견하고선 정중히 경례했다. 젊은 경찰관이 말을 건넸다.
가출 소녀를 보호하고 있다고 신고하신 분인가요?
나는 딱히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아 멍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다른 경찰관이 조금 더 다가오며 말했다.
선생님이 신고하신 인상착의를 가진 소녀가 며칠 전에 실종된 소녀와 비슷합니다. 청록색 코트를 입은 붉은 단발머리 여자아이. 여기 신고 때에 접수된 사진이 있어요.
나는 경관이 내민 A4 용지를 받아서 들었다. 팩스로 전송된 흐릿한 흑백 사진이었다. 어두워서 뚜렷하게 알아볼 수 없었다. 사진 속 여자아이는 내 곁의 소녀와 비슷해 보였다. 아니 전혀 달라 보이기도 했다. 하지만……. 나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그때 소녀가 내 팔을 잡았다.
아저씨, 나 이제 가야 해. 이거 아저씨 가져. 김밥 사줬으니까. 이거 선물이야. 이 우주 라디오 있으면 아무리 멀어도 내 목소리 들을 수 있어.
소녀는 두 손으로 빨대가 꽂혀 있는 나무상자를 내밀었다. 나는 엉겁결에 그걸 받았다. 경찰관이 내게 다시 경례했다. 소녀는 두 경찰관을 따라나서며 환한 웃음을 지었다. 그들과 함께 이야기를 주고받으며 천천히 걸어갔다. 순찰차에 오르기 전에 뒤를 한 번 돌아보더니 나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차에 올라탔다. 순찰차가 방향을 돌렸다. 천천히 공원 입구를 나섰다. 이내 도심의 불빛 사이로 사라졌다.
나는 텅 빈 공원 한가운데에서 적막감에 휩싸였다. 이런저런 생각에 잠겼다. 달이 나타났다. 플레이아데스는 겨울철 달 주변에서 자주 관찰되었다. 나는 밤하늘을 살폈다. 황소자리 근처에 별들이 반짝거렸다. 흐릿하게 빛나는 별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플레이아데스 별자리에서 예전에 보지 못한 별 같았다. 저게 바로 메로페가 아닐까. 이 세상에는 수많은 메로페가 있을지도 몰라. 학교에서 따돌림을 당한 아이, 거리를 방황하다가 팸이 된 소녀, 아빠를 찾아 방문한 지구에서 길 잃은 공주, 그들 모두가 자신의 흐릿한 존재감으로 인해 괴로워하는 메로페가 아닐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경찰차에 오르기 전에 내게 손을 흔들며 미소 짓던 소녀의 순진한 얼굴이 다시 떠올랐다. 해변에서 먼 곳을 바라보며 웃는 진이의 얼굴도 떠올랐다. 밤하늘 높이 달이 떠 있었다. 구름 사이로 무언가 반짝였다. 이내 달빛이 구름 뒤로 사라졌다. 갑자기 뻣뻣해진 내 척추가 풀리는 걸 느꼈다. 나는 소녀가 남겨 준 우주 라디오를 든 채 어둠을 응시하며 멍하니 서 있었다.
얼마의 시간이 흐른 뒤 마침내 집으로 가는 방향을 기억해 냈다.
[끝]
읽어주신 모든 분에게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