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키의 임무 (2)

단편소설

by Dark Back of Time

단편소설


아키의 임무 (2)



나는 지구 속 거인에게 이름을 지어주었다. 신중하게 궁리한 끝에 ‘아키’라고 정하고 그 이유를 속으로 중얼거렸다. 아키는 아주 키가 크기 때문에 누구라도 아키를 처음 만나면 고개를 쳐들게 될 거야. 깜짝 놀라 자신도 모르게 “아, 키!” 하고 감탄하겠지. 나처럼 말 못 하는 병에 걸린 아이도 저절로 입을 열게 될 거야. 덩치에 비해 순진한 거인은 ‘아키’라는 이름을 좋아할 거야. 물론 아키를 만난 사람은 한 명도 없고 앞으로도 아키를 만날 사람은 아마 없을 테지만. 그런데 자신을 소개할 일이 없는 아키에게 이름이 과연 필요할까?


그런 의문이 들자, 나는 내가 직접 거인을 만나러 찾아가 아키! 하고 불러주고 싶었다. 물론 아키는 우물보다 백 배도 더 깊은 지구 한가운데 살고 있으니 만나기 힘들 것이었다. 그래도 나는 아키에게 이름을 지어준 아이였다. 자부심이 생겼다. 내가 마음속으로 아키를 부르면 아키도 분명히 들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아키는 마음의 힘을 사용하니 내가 부르는 걸 당연히 들을 수 있을 거였다. 이미 나를 친구로 여기고 기뻐하고 있을 게 분명했다.


그래, 아키야, 내가 근사한 이름을 지어 주었으니, 한순간이라도 나를 잊지 마. 아무리 피곤하고 졸음이 몰려오더라도, 아무리 몸이 아파도 나를 꼭 잡아줘야 해, 알았지.


나는 말을 못 해도 그림은 피카소보다 훨씬 잘 그렸다. 그래서 당장 아키를 그리기로 했다. 둥근 지구 한가운데에 있는 아키를 그렸다. 아키를 둘러싼 지구 핵은 붉은색으로 칠했다. 나는 영재답게 지구 내부를 정확히 그릴 수 있었고, 지구 핵이, 펄펄 끊는 주전자의 물 보다 백만 배는 더 뜨겁다는 사실도 알고 있었다. 그 속에서 아키는 얼마나 답답할까. 물론 아키는 인내심이 강해서 씩씩한 모습으로 견디고 있을 거였다. 나는 아키의 몸을 시원한 바다처럼 파란색으로 칠했다. 아키는 잠들면 안 된다. 그래서 두 팔을 양쪽 어깨 위로 번쩍 쳐들고 있게 했다. 아키 눈은 항상 나를 지켜봐야만 한다. 그래서 투명하고 신비한 보라색으로 빛나게 했다. 아키는 나뿐 아니라 아버지와 할머니, 이모도 잊지 않아야 한다. 그래서 머리를 수박 보다 열 배는 더 크게 그렸다. 아키 머리에서 신비한 중력이 우리 집을 향해 곧장 뻗쳐 오게 했다. 그리고 그림 위에 <아키>라고 커다랗게 적었다. 누구라도 아키를 쉽게 알아볼 수 있게 되어 기뻤다.


아빠는 아키 그림을 보고 즐거워했다. 우와, 땅속에 사는 파란 괴물이구나. 그런데 이름이 왜 아키니? 나는 아빠를 향해 두 손을 머리 위로 쳐들어 아키의 키가 굉장히 크다는 걸 강조했다. 말을 할 수 없어서 생각을 정확하게 전달하기 어려웠다. 하지만 아빠는 금방 이해하고 미소를 지었다. 이크! 아키가 화나면 땅이 온통 흔들리겠구나. 조심해야겠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눈으로 말했다. 아빠, 걱정하지 마. 아키는 절대 화내지 않아. 내가 멋진 이름을 지어준걸. 아빠는 조용히 나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알아들었다는 뜻으로 엄지손가락을 세운 뒤 나를 안았다.


나 역시 아빠가 하고 싶은 말을 이해했다. 아빠의 소원은 한결같이 내가 입을 여는 거였다. 눈이 아니라 입으로 소리를 내어 말하길 원했다. 아빠가 나를 안고 말했다.


다연아, 넌 말을 할 수 있단다. 엄마가 있었을 때, 너는 소리 내어 노래도 같이 부르곤 했어. 넌 원래 말을 잘했어. 아빠는 네가 다시 말을 하길 원해.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아빠의 소원은 내 소원이기도 했다. 아빠와 내가 나란히 아키를 만나러 갈 필요가 있을지도 몰랐다. 아키를 실제로 만나면 저절로 내 입이 열리게 될 테니까. 내가 소리 내어 말을 하면 아빠는 너무 좋아서 펄쩍 뛰어오를 것이었다. 그러곤 공중에 떠서 아키에게 악수를 청할 게 틀림없었다. 내가 말을 하게 되면 동네 사람들도 놀라겠지.


동네 사람들은 나를 잘 몰랐다. 하지만 휴일에 아빠와 함께 공원으로 산책을 나가면 나를 아는 체했다. 사람들은 내가 태어날 때부터 벙어리인 줄 알았고, 내가 글을 아주 잘 읽는다는 사실은 몰랐다. 그래서 나를 아베론의 야생 소년을 대하는 듯했다. 그 야생 소년은 어릴 때에 언어를 배우지 못했다. 엄마와 아빠도 없이 야생 동물들과 함께 살았기 때문에 말을 배울 기회가 전혀 없었다. 그러나 나는 달랐다. 아빠는 내게 책을 자주 읽어주었고, 나는 이미 모든 글자를 터득했다. 무엇보다 내 마음은 침묵과 거리가 멀었다. 아니, 나는 항상 침묵에 잠겨 있었기 때문에 더 충실하게 말을 고를 줄 알았다. 말은 침묵에서 탄생했다. 사람들은 그런 진리를 모르는 것 같았다. 오히려 쓸데없는 말만 많이 했다. 아무 의미도 없는 말을 너무 쉽게 했다.


다연이 눈매가 참 초롱초롱하네요, 하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나는 그들이 입으로 하는 말보다 눈으로 하는 말을 더 잘 알아들었다. 그들이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이랬다.



벙어리라니 참 불쌍하네.


그래도 동네 사람들의 시선을 개의치 않았다. 나는 일곱 살이지만, 공원에서 아파트까지 이어지는 동네 거리의 모든 상점들의 간판을 읽을 줄 알았다. 김민 헤어 스튜디오, 포천 얼음 막걸리, 빵 굽는 몽마, 곰장어와 조개, 꿀레찔레, 주점 열두마당. 엘리베이터 안에 붙어있는 전단지의 작은 글자들도 초롱초롱한 눈으로 말끔히 읽을 줄 알았다. 이손 공인중개사, 경화루-오셔드시면 자장면 5000원. 이 정도면 충분했다. 내 또래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았다.




다음 주 일요일에 이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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