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단편소설
현아 이모가 보고 싶어 거실로 달려가 수화기를 들었다. 현아 이모의 전화번호를 눌렀다. 잠시 신호가 가더니 누군가 전화를 받았다. 허스키한 목소리였는데, 현아 이모의 남자 친구 같았다. 나는 전화기 옆에 놓인 녹음기의 재생 버튼을 눌렀다. 얼마 전에 아빠가 현아 이모나 할머니에게 전화할 수 있도록 녹음해 준 파일이었다. 아빠는 내가 집에서 혼자 지내다가 몸이 아프거나 긴급한 일이 생기면 전화를 할 수 있도록 여러 가지 녹음 파일을 만들어 주었다. 현아 이모에게 전화할 때는 우선 1번 녹음 파일을 틀면 되었다. 나는 녹음기를 들어 수화기에 바짝 가져다 댔다. 아빠의 목소리가 천천히 흘러나왔다. 다연이 입니다. 수화기 저편에서는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전화를 받은 남자가 아무런 대답도 못하고 망설였다. 다연이란 이름은 여자 이름인데 목소리는 어른 남자라서 의아해하는 것 같았다. 나는 다시 1번 파일을 재생했다. 다연이 입니다. 그러자 남자가 물었다. 실례지만, 누구시죠? 나는 그냥 전화를 끊어버릴까 하고 고민했다. 하지만 현아 이모가 꼭 보고 싶었고 적어도 이모의 목소리라도 듣고 싶었다. 그래서 다시 한번 재생 버튼을 눌렀다.
다연이 입니다.
남자가 물었다.
누구세요? 누구 찾으세요?
나는 두 번째 녹음 파일을 클릭했다.
현아 이모 부탁합니다.
네? 누구신데요?
다연이 입니다.
뭐 이런 사람이 다 있어?
그때 ‘내가 받아 볼 게’하는 현아 이모의 목소리가 들렸고, 잠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다.
여보세요? 민현아입니다.
다연입니다.
현아 이모의 목소리가 이내 밝아졌다.
아, 우리 다연이구나.
나는 손가락으로 수화기를 쳤다.
톡톡. (이모, 나야.)
다연아, 잘 지내니? 요즘 이모가 바빠서 자주 못 갔어. 미안해.
톡톡. (이모, 보고 싶어.)
다연아, 이모가 오늘 일 끝나고 갈게. 기다려.
이상한 통화 방식이지만 현아 이모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어서 좋았다. 나는 현아 이모가 타로 카드 점을 칠 때, 과장된 몸짓으로 말하는 걸 좋아했다. 두 손을 번쩍 들고 눈을 크게 뜬 현아 이모의 모습이 떠올랐다. 현아 이모의 목소리는 타닥거리는 빗방울보다 신나고 경쾌했다.
비가 계속 내렸다. 베란다로 나가 창문을 조금 열었다. 열린 창문 사이로 빗물이 날아들어 얼굴을 때렸다. 몸은 추었지만 얼굴은 시원했다. 나는 고개를 내밀고 아래로 떨어지는 빗방울을 바라보았다. 지구 표면을 향해 비가 끝없이 떨어지고 있었다. 빗방울 소리가 빠른 음악이 되어 계속 귓가에 울렸다. 다연아, 하고 부르던 이모 목소리도 머릿속에서 맴돌았다. 찬바람이 스며들었다. 기침이 나왔다. 나는 창문을 닫고 창에 낀 서리를 소매로 닦았다. 문득 빗방울들이 모두 한 점을 향해 떨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아, 아키의 중력이 빗방울을 잡아당기는 것이야. 이 빗줄기를 따라가면 아키와 만날 수 있게 될지도 몰라. 그런데 이 빗물은 땅 속 깊이 스며들어 뜨거운 아키의 몸을 시원하게 적셔 주겠지. 나는 입을 벙긋거렸다. 비야, 고마워.
오후 내내 흐렸던 바깥세상은 비와 함께 어둠에 잠기고 있었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는 이런저런 생각들이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나는 땅 속의 아키에 대해, 머나먼 별에 혼자 살고 있을 엄마에 대해 생각했다. 검은 망토를 입고 수정구슬 점을 치는 현아 이모도 떠올렸다. 현아 이모의 수정구슬은 붉은빛과 푸른빛이 번갈아 감돌았는데, 볼 때마다 신비로웠다. 나는 현아 이모가 빨리 왔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현아 이모의 수정구슬이 아키의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런데 할머니는 현아 이모를 싫어했다. 할머니는 현아 이모의 도깨비 같은 망토 옷차림이 마음에 안 든다고 했다. 화장도 너무 진해서 마녀 같다고 했다. 보기만 해도 기분이 나쁘다는 거였다. 현아 이모는 할머니와 마주칠 때마다 밝고 큰 소리로 인사를 했지만 할머니는 언제나 슬그머니 고개를 돌리곤 했다.
엄마와 현아 이모와 할머니를 번갈아 생각하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었다. 그리고 이상한 꿈을 꾸었다. 꿈에서 아키가 아무런 이유도 없이 사라졌고, 아키가 사라진 걸 내가 깨달은 순간, 내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오르기 시작했다. 멀리서 아빠의 몸도 하늘로 떠오르는 게 보였다. 할머니와 현아 이모도 다른 쪽에서 하늘로 둥실 날아오르기 시작했다. 나는 아빠를 향해 외쳤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당황한 아빠는 나를 향해 손짓하고 있었다. 현아 이모와 할머니도 나를 불렀다. 내 심장이 터지는 것 같았다. 나는 아키에게 도움을 청하려고 아키를 불렀지만 역시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고 눈물만 흘렀다.
어느새 나는 어두운 우주를 떠돌고 있었다. 내 눈물은 방울방울 맺혀 차가운 우주 공간으로 사라져 갔다. 이윽고 나는 붉고 황폐한 별에 혼자 내렸다. 커다란 언덕 위로 모래바람이 일고 있었다. 나는 모래 언덕 위에서 눈물에 젖은 채 주변을 살폈다. 엄마도 없고 아빠도 없었다. 기운 넘치는 현아 이모도 없고 씩씩한 할머니도 없었다. 나는 언덕 아래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다시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갑자기 모래 언덕이 흔들리기 시작했다. 땅이 갈라지고 모래가 땅속으로 쏟아져 내렸다. 붉은 거인이 괴성과 함께 땅 속에서 솟아올랐다. 아키였다. 아키의 몸은 온통 붉었다. 아키가 세상 밖으로 뛰쳐나온 순간 몸의 열기가 식으면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그리고 서서히 푸른색으로 변했다. 아키는 커다란 눈을 부릅뜨고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반갑고 놀랍고 슬픈 감정이 뒤섞인 채 아키를 향해 외쳤다. 소리 없는 외침이었지만 세상 끝까지 길게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아키이이이이!
다연아.
현아 이모가 속삭였다. 나는 눈을 떴다. 눈물이 얼굴을 적시고 있었고 눈물 사이로 현아 이모가 보였다. 현아 이모는 내 눈물을 닦아 주었다. 나는 현아 이모에게 안겼다. 아빠가 방에 들어왔다. 현아 이모가 아빠를 돌아보았다. 형부,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다연이 열이 너무 심해요. 입원시켜야 될 것 같아요. 아빠는 아무런 말없이 침통한 표정으로 나와 현아 이모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현아 이모가 나를 일으켜 두꺼운 옷을 입혀 주는 동안, 아빠가 휴지통에 뭔가를 버리는 게 보였다. 할머니가 두고 간 흰 봉투였다.
다음 주 일요일에 다음 편이 이어집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