맥락 없는 선택도 좋다.
원래 오늘은 오스카 와일드의 단편소설에 관해 쓰려고 했다. 그의 명료한 문장, 뛰어난 위트, 촌철살인 유머는 언제나 내 마음을 뒤흔들었다. 오죽하면, 여러 작품에 출연하는 윈더미어 부인이 나올 때마다 반가워서 정중하게 고개 숙여 손등에 키스하고 싶어질 정도였으니. 하지만 결국 쓰지 못했다. 누군가를 너무 좋아하면, 가까이 다가가지 못하고, 주변만 맴도는 것과 좀 비슷한 현상이다. 한 문장을 쓰고 나서 자기 검열에 빠져 고개를 갸웃하고, 뭔가 확인할 게 생각나서 여기저기 검색하는 일만 되풀이했다. 마침내, 나는 아직 오스카 와일드를 거론할 단계가 아님을 깨달았다. <아서 새빌 경의 범죄>와 <캔터빌의 유령>. 딱 이 두 작품, 유쾌한 이 두 작품에 국한하여 글을 쓴다고 할지라도, 아직은-아니야-아직-너-멀었어 라는 깃발이 내 보잘것없는 전두엽 언덕 위에서 마구 펄럭이는 것이다.
그래서 다른 이야기를 쓰기로! 아직 화요일이다. 좌초할 순 없다.
책 고르는 이야기로 선회해 보자. 보통의 독자는 책을 고를 때 보통 어떤 기준으로 고르는 걸까? 무엇을, 어떤 작품을 왜 읽어야 하는가? 이 문제는 내게 늘 막연한 문제였다. 골칫거리는 아니었는데, 딱히 특별한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몇 가지 책 고르는 기준이 생겼다.
첫째, 지인의 소개를 받아 고른다. 이때 지인이란, 글을 쓰거나 나보다 독서 항해술이 월등히 뛰어난 사람들이다. 친근하고 믿을만한 인격의 소유자라면 더할 나위 없이 좋다. 이런 사람의 추천 도서는 거의 백발백중 만족스럽다. 허먼 멜빌의 『모비 딕』, 애나 번스의 『밀크맨』, 전경린의 『내 생에 꼭 하루뿐일 특별한 날』, 은희경의 『새의 선물』 같은 책이다. 대학교 시절 교양 영어 담당 강사가 수업 교재로 쓴 제임스 조이스의 『더블린 사람들』도 이 방식으로 읽게 된 경우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단, 이 작품은 반드시 원문 영어로 읽어야 한다. 제임스 조이스가 어휘 수준을 조금 낮춰서 썼다는 이 작품의 영어 문장은 그야말로 다이아몬드 커터로 다듬어진 것처럼 빈틈없고 단단하다. 그 당시 내 입에서 아름답다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수업 시간에 교재 읽다가 매료당하다니.
둘째, 아주 마음에 든 작품을 읽고 난 뒤에 저자에게 반해 그 저자의 다른 모든 작품을 찾아 읽는 경우다. 『몰타의 매』를 쓴 더실 해밋에 반해서, 반평생 그의 작품을 구해 읽으려고 무척 애썼다. 다행히 이제는 대부분 작품이 번역 출간되었다. 20여 년 전에는 『몰타의 매』와 『피의 수확』 두 권밖에 구할 수 없었다. 그래서 미국을 출장 가는 친하게 지내던 K 박사에게 더실 해밋의 이름을 적어주고 원서를 한 권만 구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K 박사는 단편집 2권을 가져와서 선물로 내밀었다. 책값도 받지 않았다. 이 두 권에 담긴 이야기들이, 훗날 출판사 현대문학에서 발간한 <세계문학 단편선> 시리즈의 더실 해밋 편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레이먼드 챈들러의 모든 작품도 마찬가지이다. 어느 추리 문고에서 처음 읽었던 『필립 마로우의 우수』는 너무 멋져서 너무 자주 읽었다. 이 책은 훗날 원제목대로 『안녕 내 사랑아』로 재출간되었다. 애나 번스의 맨부커 수상작『밀크맨』은 지인이 소개해 준 책인데, 나는 충격적으로 좋았다. 그래서 그 뒤에 애나 번스의 초창기 장편소설 『노 본스』가 출간되었다는 소식을 듣고선 책방으로 번개처럼 달려갔다. 『노 본스』를 읽고서는 충격적인 충격을 받았다. 상대 진영인 적을 고발하는 게 아니라, 자기 진영의 폭력을 고발한 이 작품은, 남에게 권장하기도 좀 힘들다. 폭력적인 비참한 상황을 읽고선 숙연해졌다. 동시에 읽는 이의 머리를 찢어지게 웃기는 대목도 자꾸 나와서 난감했다. 애나 번스의 『노 본스』는 한 마디로 독후감을 쓰기에도 난감한 책이다. 몇 번 시도했지만 끝내 쓰질 못했다. 그래도 난 애나 번스의 두 작품을 정말 사랑한다.
셋째, 책을 소개하는 책을 통해 소개받아 고르는 방법이다. 20세기 서구의 명작소설의 경우, 나는 『클라시커 50 현대소설』을 통해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했다. 클라시커(Klassiker)는 최고의 예술가, 대가, 명작을 뜻하는 독일어이다. 독일에서 문학, 음악, 미술, 역사, 인물 등 각 분야에서 우리가 알아야 할 명작과 명인을 책마다 50선을 선정해 담아 소개한 시리즈의 제목이다. 우리나라 <해냄> 출판사가 번역해서 국내에 소개했는데, 『클라시커 50 현대소설』과 『클라시커 50 고전소설』에 실린 작품 해설을 읽고 마음에 드는 작품들을 골라서 읽었다. 서양 사람들은 문학을 왜 이렇게 멋지게 소개하는 거야, 감탄하기도 했다. 아스트리드 린드그렌의 『삐삐 롱스타킹』이 세계적인 아동 문학인 것을 이 책 소개로 처음 알게 되었다. 막상 읽어보니, 아동 문학임에도 너무 재미있었다. 소설 쓰는 문우들에게 소개했을 정도였다. 초등학교 들어갈 무렵의 내 딸은 이 책을 읽고 맨날 삐삐를 흉내 내곤 했다.
이처럼 명작을 소개하는 책들이 꽤 많이 나와 있다. 최근에는 로라 밀러가 책임 편집한 『문학으로의 모험』에서 소개한 작품들을 하나하나 골라 읽고 있다. 순수문학과 판타지와 모험소설 모두 아우르고 있다.
넷째, 특정 작품에서 언급된 다른 작품이 궁금해서 선택한다. 코니 윌리스의 SF 장편소설 『개는 말할 것도 없고』에서는 끊임없이 코믹한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이 코미디는 제롬 K. 제롬이 쓴 『보트를 탄 세 남자-개는 말할 것도 없이』에서 제목을 따온 것이다. 코니 윌리스는 제롬의 책에 푹 빠졌고, 자신의 SF 소설에서 오마주처럼 『보트를 탄 세 남자』를 인용했다. 호기심이 생긴 나는 당장 달려가 『보트를 탄 세 남자』를 구해 읽었다. 이 작품은 인생의 통찰이고 철학이고 뭐 그런 거 별로 없다. 오직 웃기기 위해 웃기는 상황만 연속적으로 나온다. 나 역시 푹 빠졌고, 속편인 『자전거를 탄 세 남자』도 구매했고, 기념으로 원작 영어판도 하나 사다 두었다. 영어판이 좋은 점은 멋진 고전적인 삽화가 근사하게 나온다는 점이다. 한글 번역판을 읽다가, 영어 원서를 펼치고 삽화를 보면서 흐뭇하게 웃던 시절이 그립다. 우리가 좋아하는 작가가 좋아한 작품은 우리도 만족시킬 가능성이 매우 높다.
유머 소설에 대한 애정은 다시 출판사 현대문학의 <세계문학 단편선> 33번으로 출간된 『펠럼 그렌빌 우드하우스』의 탐독으로 이어졌다. 이 작품은 순수하고 우아한 유머와 위트로 점철된 생활 모험담이다. 영국식 유머는 한국식 해학과는 약간 다른 느낌이다. 춘향전 등에서 엿보는 한국의 해학은 서민적인데 비해, 우드하우스 작품 속의 영국식 유머는 귀족적이고 젠틀하고 사랑스럽다. 개인적으로는 우드하우스의 단편 가운데 하인 지브스가 맹활약하는 <지브스> 시리즈를 무척 애정한다. 배꼽 잡는다.
다섯째, DKZ 방식의 도서 선택 방법이다. 이 방식은 ABC 방식의 반대인 경우이다. ABC 방식이란 바로 위에서 언급한 넷째 방식의 책 고르기를 줄여서 부르는 말이다. A라는 작품을 통해 B라는 작품을 소개받고 다시 B를 통해 C를 소개받는 것을 간략하게 줄여서 ABC 방식이라고 한다. 내가 손수 5분 전에 만든 명칭이다. 그럼 DKZ 방식은 뭔가? 다시 말하지만, ABC 방식과는 정반대이다. ABC 방식은 상당한 독서력을 보유한 독서가가 가장 흔히 책을 선택하는 방식이다. 그런데 이 방식에는 커다란 문제점이 하나 있다. 편식을 일으킨다는 것이다. A와 B와 C는 서로 영향을 주고받은 작가들의 책이다. 따라서 근접한 취향으로 묶을 수 있다. 취향은 아니어도, 어쨌든 끼리끼리 묶은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식의 편식 독서는 자칫 그 무리와 멀리 떨어진 작품들을 외면하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D… K… Z… 이런 식으로 동떨어진 작품들 가운데에서도 명작이 존재하는 법이다. 그런데 단지 취향 때문에 그런 명작을 멀리할 수는 없다. 폭넓은 독서가 매우 중요하고 필수적인 독서이니까 말이다. 그럼, 이러한 DKZ 방식의 책 선택을 어떻게 구현할 것인가? 저마다 다를 것이다. 내 경우는 그저 우연에 의존한다. 직접 서점을 방문하여 이 코너 저 코너 한가롭게 떠돌며 이 책 저 책 자꾸 펼쳐보다가, 우연히 흥미가 끌리는 게 있으면 그걸 선택한다. 서점이 아니라 도서관을 떠도는 것도 좋다. 서점을 떠도는 것은 마치 관광지를 여행하는 것 같다. 도서관을 떠도는 것은 마치 숨어있는 도시로 숨어드는 것 같다. 서점에서는 참신한 매력의 신간 위주로 만나게 된다. 도서관에서는 절판된 책도 우연히 만날 수 있다. 흡사 보물 찾기와 비슷하다. 구석의 구석에서 낡은 책을 하나 꺼내 들어 먼지를 툭툭 털고, 선 채로 몇 쪽을 읽다가 그만 책 속으로 점점 빠져드는 경험은, 훗날 판타지 소설로도 써 볼 만할 것이다. 하지만 놀라지 마시라. 이미 그런 판타지 작품이 우리 주변에 꽤 많다. 우디 앨런이나 재스퍼 포드는 책 속으로 들어가는 이야기를 우리에게 오래전에 소개했다. 우디 앨런은 어느 단편에서 그런 장면을 다뤘고, 재스퍼 포드는 『제인 에어 납치사건』에서 이 아이디어로 큰 성공을 거둔 뒤에 연작으로 속편을 계속 썼다. 여자 주인공 서즈데이 넥스트는 나의 우상이기도 하다.
작가 코넬리아 푼케는 『잉크하트』라는 작품에서 책 속의 등장인물을 현실로 불러내는 능력자 이야기를 썼다. 아직 안 읽었다. 늦어도 올해 안에 읽어 볼 참이다. 이 작품에서 주인공 능력자가 책 속에서 불러낸 강도 두 명이 현대 사회에서 큰 말썽을 일으킨다고 한다. 주인공은 문제를 해결하려고 딸과 함께 책 속으로 직접 들어간다고! 아, 딸과 함께라니! 진정 내가 쓰고 싶은 걸 누군가 이미 다 써버렸구나!
DKZ 방식은 한 마디로 다른 누구의 영향도 받지 않고 자신이 직접 현장에서 독자적으로 책을 고르는 방식이다. 내 경우 이 방식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크다. 이 방법과 네번째 ABC 방법이 결합되면 대책없이 책을 사들이게 된다. 절제해야 하므로 균형있게 사용해야 한다. 다음 회에서 소개할 두 권의 책은 이 DKZ 방식으로 접근한 수확물이다. 인문학 서적인데 흥미롭다.
다음 회 제목을 미리 공개한다. 왜냐하면 약속을 통해 맥락을 지키기 위함이다. 너무 자주 맥락을 비틀면 그것 역시 큰 문제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음 호에서 내가 항해할 곳은 그 제목부터 무척 진지하고 흥미롭다. 내가 만든 제목이지만 마음에 든다. 다음과 같다.
기대하시라... 물론, 시간 있으시면.
블랙핑크의 우아한 로제의 변신이 너무 멋진 음악이 하나 나왔다. 이 음악 들으며 글을 작성했다.
브루노 마스와 로제가 함께 부르다니!
게다가 한국 술 게임 <아파트>라니!
감동스럽다. 무엇보다 노래가 병맛처럼 흥겹고 놀랍다.
제2의 강남 스타일로 뜨길 기원함!!!
출처 : 유튜브 <기몽초 GiMongCho> 가사 해석이 있는 동영상을 일부러 골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