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소설
<듀오 헤븐>의 마지막 편을 썼습니다. 그런데 분량이 예상보다 길어서 (8)화와 (9)화로 나눠서 발행합니다.
(9)화는 오늘 밤 0시에 발행할 예정입니다.
나는 더 이상의 실수는 스스로 용납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포커 선수 애니 듀크가 떠올랐다. 의중을 알 수 없는 상대방의 올인 선언, 당장 자신의 손안에 있는 무척 괜찮은 패… 애니 듀크와는 다르게 나는 손안에 패라고 할만한 것도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물러서야 할 때가 아닐까? 이 게임에 더 참여했다가는 무슨 꼴을 당할지 몰랐다. 하지만… 티티의 눈은 진실해 보였다. 내가 잃을 게 뭐가 있다고? 기껏해야 이 하룻밤 술값이 전부 아닌가? 좀 많이 나온다 한들 그게 뭐 대수인가. 그런 생각을 했다. 그래서 나는 그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지 않았다. 당당하게 맞서기로 했다. 나는 티티에게 말했다. 조해선 씨를 저의 집에 들이는 건, 거절하겠습니다. 사정이 딱하긴 해도 그럴 순 없지요. 아마 내 인생에서 누군가의 부탁을 단호하게 거절한 것은 이게 처음이었을 것이다. 나답지 않게 곧바로 거절한 것이, 묘하게도 어른스러워지는 기분을 가지게 했다. 재규어 몸매를 지닌 예쁜 여자의 부탁을 단칼에 거절하다니! 이 얼마나 어른스럽단 말인가. 하지만 이내 이유를 알 수 없는 어떤 죄책감 비스름한 감정이 나를 사로잡기 시작했다. 도대체 뭐지? 이 모든 이야기는 어디까지가 진실이고 어디서부터가 거짓일까? 이 여자 티티는, 아니 이 여자 티티와 조해선은, 도대체 무슨 속셈일까? 나는 뭔가 사기를 당하는 느낌이었고, 85C 컵만큼이나 부풀어 오르는 의혹을 걷어낼 수 없었다. 동시에 사정이 딱한 신경쇠약에 시달리는 여자를 외면하는 매정한 남자가 된 기분도 떨치기 어려웠다. 티티의 이야기가 사실 같다는 느낌도 강하게 들었다. 나 역시 20대 시절에 공장 지역과 인접한 어느 자취방에서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그 자취방 역시 유흥지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일 층은 오락실이었고 이 층은 커피숍, 그리고 삼 층의 내 숙소에 오르려면 좁고 가파른 계단을 올라가야 했다. 계단 끝에는 냄새나는 공용 화장실이 있었고 화장실 옆으로 난 복도를 따라가면 작은 방들이 일렬로 들어서 있었다. 방은 모두 네 개였고 부엌이 딸린 방의 구조는 모두 같았다. 내가 기거했던 방은 거기서 철 계단을 반 층 더 올라가야 했다. 지금 생각하면 그 모든 구조가 비현실적일 정도로 이상했다. 문은 턱없이 좁고, 그 비좁은 문을 통과하면 문만큼 좁은 복도가 다시 나타났다. 문과 방 사이에 또 다른 복도가 있다는 건 이상했지만, 그건 그 공간 사이로 또 다른 방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 또 다른 방의 사용 용도는 전혀 알 수가 없었다. 부엌이 나왔고 이윽고 그 방이 나온다. 내가 기거한 그 방은 다른 방보다 훨씬 컸고 커다란 창도 있었다. 그러나 창은 한때 병원이었다가 폐쇄된 옆 건물 때문에 삼 분의 일이나 가려져 있었고 창틀은 오래되어 녹이 슬고 곰팡이가 자라고 있었다. 창은 이상하게도 언제나 절반 정도 열려 있었다. 비 오는 날에는 커다란 비닐로 나머지 절반을 막아야만 했다. 그 집에서는 정말 신경이 날카로워져서 전혀 쉴 수가 없었다. 어디선가 바스락거리는 소리도 끝없이 들렸다. 잠을 푹 잘 수가 없었다. 휴일에도 마음이 편하지 않았다. 나는 한 달 만에 계약을 파기하고 적금을 해지한 뒤에 다른 곳으로 이사해야만 했었다. 티티는 실망한 눈빛이었다. 내가 너무나 단호하게 거절한 탓에 한동안 아무런 말도 하지 않고선 묵묵히 테킬라만 마셨다. 이윽고 얼마의 침묵이 흐른 뒤, 티티가 다시 말문을 열었다. 그럼 다른 부탁 하나만 들어주세요. 다른 부탁? 나는 긴장했다. 자칫하면 테킬라 한 병이 더 테이블에 올라올지도 몰랐다. 위기의 순간이었다. 침착한 표정으로 평정심을 유지하려고 노력했다. 별 건 아니에요, 하고 티티가 말했다. 나는 어깨를 으쓱했다. 티티는 나에게 조해선 씨의 방에 가서 물건들을 좀 챙겨달라고 했다. 어이없고 황당한 부탁이었다. 티티는 별 것 아니란 듯이 이렇게 덧붙였다. 그 방에 귀신이 출현한다는 소문이 있긴 해요. 그 방에서 누군가 자살했고 또 다른 누군가 사고로 세상을 떠났다고 해요. 그 뒤로 귀신이 달라붙었다는 말도 돌아요. 나는 소리 내어 웃었다. 21세기입니다. 귀신이 어디 있겠어요, 하고 내가 긴장을 풀며 답했다. 티티는 고개를 저었다. 아녀요. 저는 영혼이 있다고 믿어요. 그래서 그 방에 저 혼자 다시 가기는 어려워요. 그 방에 있는 해선이 물건과 옷가지 등을 챙겨 와야 해요. 말을 마친 티티는 열쇠를 하나 꺼내더니 내 앞으로 내밀었다. 지금 올라가셔서 큰 가방에 해선이 짐을 좀 싸다가 내려와 주시면 정말 고맙겠습니다. 티티는 꾸벅 고개를 숙였다. 나는 깜짝 놀랐다. 티티는 테킬라를 한 잔 더 마시며 무심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요, 바로 이 건물 오 층에 있는 방이 해선이가 있었던 그 방이어요. 제발, 이번 부탁만큼은 거절하지 말아 주세요. 나는 다시 술이 확 깨는 느낌이었다. 듀오 헤븐의 해양 시계가 눈에 들어왔다. 바다를 항해하는 함선들은 모래시계나 물시계 같은 육지에서 사용하는 시계를 쓸 수가 없었다고 한다. 파도가 휘몰아치는 대양 한가운데에서 폭풍이 몰아쳐도 정확하게 작동하는 기계식 시계만이 항해에 필요한 유일한 시계였다고 한다. 해양 시계는 듀오 헤븐의 사면에 가득한 서구 중세 문명이 남긴 미신적인 환경 한가운데에서 꿋꿋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뱀파이어를 연상시키는 창백한 남자와 사악한 욕망에 사로잡힌 악녀가 등장하는 포스터, 프랑켄슈타인 스타일의 인물화, 중세 고딕풍의 저택과 마녀의 형상들, 그리고 이제 보니 저쪽 한 군데에는 기사들이 입었던 강철 갑옷이 놓여 있었다. 어딘지 모르게 돈키호테를 떠올리게 했다. 게다가 직원들에게 “켄”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남자와 닮은 종업원이 주방 앞에서 부동자세로 서 있는 모습까지. 나는 이 모든 게 비현실적으로 보이기 시작했다. 눈앞에 여배우를 지망하는 매혹적인 젊은 여자가 내게 간절한 눈빛으로 애원하며 앉아 있었다. 술이 확 달아나는 듯했지만 이내 세상이 출렁거리는 느낌이었다. 나도 모르게 티티가 건네준 열쇠를 쥐고선 오 층으로 올라가서 짐을 챙겨주고 싶었다. 나는 손을 내밀어 열쇠를 쥐었다. 그때, 안돼요!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나와 티티는 고개를 들었다. 우리가 앉아 있던 테이블에 누군가 와서 서 있었다. 미연 씨… 미연 씨였다. 미연 씨가 서 있는 것이었다.
(계속) 다음 편은 오늘밤 0시(=내일 0시)에 이어집니다
대문 출처 : 움베르토 보초니, <거리의 힘들>과 <동시적 시각들>에 대한 연필 습작. 1911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