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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nXpaper Nov 26. 2024

질병과 정체성에 관한 것들

시름시름 앓다가 일어났다

나이를 먹는다는 건, 삶이 미라(mummy)처럼 점점 건조해지는 것과 비슷한 게 아닐까. 그것은 부패하지도 않고 분해되지도 않고 수분만 조금씩 빠져나가는 상황이다. 주변의 모든 사물과 현상이 바삭해지는 것이다. 물론 과거의 윤곽은 아직 온전하게 보존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는 영예롭던 시절의 그림자에 불과하고, 아침에 일어나도 문득 뭔가 잃어버린 기분은 도무지 지울 수가 없고, 미래는 짙게 다가오는 안개처럼 여겨진다. 그 안갯속을 거닐면, 서서히 푯말이 하나씩 눈앞에 드러날 것이다. 거기 쓰인 것은 아마도 우울한 내용일 것이다. 예를 들어 <기억상실의 시대> 혹은 <폐허의 왕국> 혹은 <무너지는 제국>처럼 부정적인 상징 언어들이 아닐지 싶다.      


우울한 기분은 앓고 나면 더 심해진다. 딱히 큰 병은 아니지만 며칠 내내 앓았다. 몸이 미지근하고 열도 있다가 없다가 했다. 잠에 빠진 적도 많았다. 어제는 병원에 갔더니 의사가 천식을 의심할 만한 증세는 아직 없다며 며칠 두고 보자고 했다. 감기약과 기관지염약을 처방받았다. 며칠 전보다는 훨씬 낫지만, 여전히 컨디션이 좋지 않다. 문득 수전 손택의 문장이 떠오른다.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손택은 이렇게 적었다.     


병은 인생의 밤이자 부담스러운 시민권에 해당한다. 누구나 건강의 왕국과 질병의 왕국, 두 곳의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난다. 다들 좋은 쪽의 여권만 쓰고 싶어 하나, 한 명씩 늦든 이르든 잠시나마 자신이 다른 쪽 왕국의 시민임을 확인하게 된다.     


손택의 책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기억나는 것은 바로 위의 문장이다. 그런데 또 다른 내용이 기억에 남아 있다. 질병을 문학적인 표현으로 동원하지 말라는 거였다.     


우리가 삶을 이해하는 가장 수월한 방법 가운데 하나가 바로 은유인데, 우리는 그런 은유를 거의 무의식적으로 사용한다. 그래서 질병을 자주 은유의 수단으로 동원하기도 한다. 이런 질병의 은유는, 단순한 질병 자체를 혐오스러운 것으로 왜곡하고 환자에게 심리적인 고통과 절망감을 준다는 것이다.


우리는 건강의 왕국과 질병의 왕국, 두 곳의 시민권을 가지고 태어난다.

      

수전 손택은 유방암으로 투쟁하면서 질병이 인간의 역사에서 어떻게 은유로 사용되는지 자세히 추적한 것 같다. 암은 욕망을 억누른 결과이고 결핵은 영혼을 혹사하는 작가들이 걸리는 병이고, 에이즈는 신의 심판이라는 식의 편견 어린 은유를 멀리하라는 거였다. 질병은 저주가 아니며 신의 심판도 아니며 그저 질병에 불과하다는 견해인데, 맞는 말 같아서 되도록 질병을 다른 상징으로 사용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무의식적으로 쓴 적이 있는지는 잘 모르겠다.     


아무튼, 몸이 아프다 보니 이런저런 생각이 많이 떠올랐다. 아픈 것이 꼭 나쁜 건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될 수 있다. 건강의 왕국으로 돌아왔다고 해서 질병의 왕국을 쉽게 잊을 수 있는 건 아니다.      


질병은 자아에 대한 정체성을 자극하는 것 같다.


그러고 보니 나는 20대 시절에 병원에 입원한 적이 있었다. 보름 정도 예상했던 입원 기간이 3주로 늘어나는 바람에 무척 답답해했던 기억이 난다. 병원에서 책도 많이 읽은 기억도 난다. 간호사와 농담하던 기억도 난다. 어느 간호사는 내게 뜨개질한 목도리를 선물했다. 빨리 퇴원하라며. 고마웠지만 우울한 시기였기에 데이트하자는 말은 차마 꺼내질 못했다. 환자에 대한 동정심인지, 이성에 대한 호기심인지 좀 헷갈리기도 했고.      


여름 끝자락에 입원했다가 퇴원했을 때는 세상이 달라 보였다. 우선 낙엽이 지는 가을이 갑작스러웠고 낯설었다. 여름의 한순간에서 가을의 한가운데로 곧장 순간 이동한 느낌이었다. 그래서 아마 세상이 더 다르게 보였던 것도 같다.      


몸이 차츰 나아지는 것 같다. 회복되면, 유튜브는 자제하고 글을 열심히 써야겠다. 정말로 뻣뻣한 미라가 되기 전에 빨리 좋은 글을 써야겠다. 이런 결심은 앓고 난 덕분이 아닐까.      



     

제주도 여행 갔을 때, 아내와 딸과 기념품샵에 들른 적이 있었다. 그곳 중 하나에서 딸이 선물로 사준 기념품이 하나 있다. 일본 아동문학 작가 가도노 에이코가 쓴 『마녀 배달부 키키 2편-키키와 재채기약 마법』이다. 주인공의 캐릭터가 마음에 든다. 하지만 딸이 써 준 문장이 더 마음에 든다.


아빠에게  제주 여행을 기념하며.. 마법과 같은 삶을 살길 !!


그렇다. 나는 딸의 아빠이다. 선물은 우리정체성에 대한 깨달음을 가져다 준다.



제주 여행 기념  딸의 선물은 <마녀 배달부 키키>였다.  



     

스티븐 핑커가 쓴 『글쓰기의 감각』은 주로 영어 문장을 잘 쓰는 방법을 논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나라 작가와 독자에게 굳이 권할 만한 책은 아닌 것 같다. 그런데, 1장 <잘 쓴 글>에서는 정말 잘 쓴 글을 네 개 소개하고 있다. 그중 하나가 특히 마음에 든다. 삶과 존재와 죽음이라는 미스터리와 함께 개인의 정체성에 관해 쓴 글이다. 특히 어린 시절의 언니와 찍은 사진을 보고 서술한 문장은, 앓고 난 뒤의 내 가슴을 울린다. 글쓴이는 리베카 골드스타인이다. 그녀의 정체는 바로 스티븐 핑커의 아내이고, 철학자이고 소설가이다.


여기, 그 잘 쓴 글을 옮겨 본다.     



한 사람을 바로 그 사람으로, 다른 사람이 아닌 오직 그 사람으로, 시간이 흐르면 변화를 겪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속 존재하는 통일된 정체성으로 만드는 것은 무엇일까, - 마침내 그의 존재가 더 이상 계속될 수 없을 때까지, 최소한 문제적이지 않게 계속될 수는 없을 때까지?     


나는 지금 여름 소풍날 찍은 어린아이의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는데, 아이는 작은 한쪽 손으로는 언니의 손을 붙들고 반대쪽 손으로는 큼직하게 자른 수박 조각을 위태롭게 든 채 그것을 작은 ㅇ 같은 제 입과 교차시키려고 애쓰는 모습이다. 그 아이는 나다. 하지만 왜 그녀가 나일까? 나는 저 여름날에 대한 기억이 전혀 없고, 아이가 수박을 입에 넣는 데 성공했는가 못 했는가 하는 사실을 남들과는 달리 알고 있지도 않다. 매끄럽게 이어진 일련의 물리적 사건들이 그녀의 몸을 내 몸으로 바꾼 것은 사실이고, 그러므로 그녀의 몸이 곧 내 몸이라고 말하고 싶기도 하며, 어쩌면 정말 신체적 정체성이야말로 개인의 정체성의 전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시간이 흘러도 지속되는 신체라는 사실에도 철학적 딜레마가 있다. 일련의 물리적 사건들을 거친 탓에 저 아이의 몸은 지금 내가 내려다보는 내 몸과는 다르고, 그녀의 몸을 구성했던 원자들은 지금 내 몸 속에 없다. 우리 둘의 몸이 비슷하지도 않은 정도라고 한다면, 우리 둘의 시각의 차이는 그보다 더 클 것이다. 그녀는 내 시각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 그녀에게 (스피노자의) 『에티카』를 이해해 보라고 한다면 어떻겠는가. - 지금 나도 그녀의 시각을 이해할 수 없기는 마찬가지이다. 지금 나로서는 언어 습득 이전 단계였던 그녀의 사고 과정을 대체로 헤아릴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그녀는 주름이 달린 흰 피나포어를 입은 저 작고 결연한 존재는, 나다. 그녀는 유년기의 질병을 이겨 내고, 열두 살에 로커웨이 해변에서 격류에 휩쓸려 익사할 뻔했던 사고를 견뎌 내고, 그 밖의 드라마들도 겪어 내어, 계속 존재했다. 만약 그녀가 - 즉 내가 - 겪었다면 계속 그녀 자신으로 존재하는 것이 불가능한 모험들도 있었을 것이다. 만약 그런 것을 겪었다면, 지금 나는 다른 사람으로 존재할까, 아니면 더 이상 내가 존재하지 않게 되었을까? 만약 내가 자아 감각을 모두 잃는다면 - 조현병에 걸리든 귀신에 쓰이든, 코마에 빠지든 진행성 치매에 걸리든, 아무튼 그래서 나로부터 내가 없어진다면 - 그때의 나는 그런 시련을 겪는 나일까, 아니면 애초에 나라는 전제가 존재하기를 그친 것일까? 그렇다면 그곳에 존재하는 것은 다른 사람일까, 아니면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일까?     


죽음은 내가 그것을 겪은 뒤 나 자신을 간직할 수 없는 저런 모험들 중 하나인 셈일까? 사진에서 내가 손을 잡고 있는 언니는 죽었다. 요즘도 나는 매일 그녀가 아직 존재할까 존재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누군가가 무척 사랑했던 사람이란 너무나 중요한 존재이기에, 세상으로부터 그렇게 깡그리 사라질 수는 없을 것만 같다. 우리가 자기 자신이 하나의 세상임을 아는 것처럼,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도 분명 하나의 세상이다. 그런 세상이 어떻게 단숨에 존재하기를 그칠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만약 내 언니가 아직도 존재한다면, 지금 그녀는 과연 무엇일까, 그리고 과연 무엇이 지금의 그녀를 기억에서 잊힌 저 여름날 어린 동생에게 웃어 보이는 아름다운 소녀와 동일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는 것일까?     



리베카 골드스타인의 『스피노자 배신하기』(Betraying Spinoza)에서 발췌된 한 대목이라고 한다. 검색해 보니 이 책은 국내에 아직 번역되지 않았다. 번역되면, 달려가서 한 권 소장하고 싶다.


리베카 골드스타인 - 철학자이고 소설가라고. 저서 <스피노자 배신하기>는 번역되면 꼭 읽어보고 싶다.


영어문장 잘 쓰기 지침서인 이 책에서 스티븐 핑커는 아내 리베카 골드스타인의 저서의 한 대목을 발췌해 <잘 쓴 글>이라고 폼나게 소개한다. 좀 웃겼으나, 읽어보니 잘 쓴 글이 맞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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