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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IanXpaper Dec 10. 2024

최인훈의 크리스마스 캐럴 읽기

기이하다기 보다는 너무 웃긴 대화


크리스마스가 다가오면 생각나는 소설이 있다. 최인훈의 『크리스마스 캐럴』이다. 모두 5개 작품으로 이뤄진 연작소설인데, 처음 두 편이 특히나 재미있다. 그래서 나는 크리스마스이브에 할 일이 없을 때 다시 읽곤 한다. 읽을 때마다 큭큭하고 웃는다. 출판사와 평론가들의 진지한 서평도 참조할 만하지만, 개인적으로는 서평이 약간 불만스럽다. 진지한 사람들은 이 책의 매력을 살리기보다 오히려 감추는 데에 급급한 게 아닐까, 하고 의심하게 만든다. 이 작품의 즐거움을 딱히 애써 작문하여 소개하기는 쉽지 않다. 그냥 발췌해 보여 주면 그걸로 충분할 것 같다.           



  아버님이 부르신다기에, 나는 읽던 책을 덮고 사랑방으로 건너갔다. 내 방은 뜰아랫방이다. 

  아버님은, 그의 맏딸이자 내 누이동생인 옥이와 마주 앉아 있었다. 

  “아버님 부르셨어요?”

  아버님은 한참 말없이 나를 쳐다보더니 옥이더러

  “얘, 내가 너희 오래비를 불렀던가?”

하고 물으셨다.

  “글쎄요. 저도 그걸 생각하던 참인데, 아빠는 어떻게 생각하세요?”

  “네 말마따나 글쎄다.”

  “아무튼 저렇게 오셨으니깐, 부르신 걸로 하시는 게 어떨까요?”

  “그도 그렇군. 얘 그럼 내가 불렀다. 게 앉아라.” 아버님은 빈 방석을 가리켰다.      


  나는 자리에 앉으면서 불가불 한마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아버님, 저를 부르셨든 않았든, 저는 조금도 상관 않습니다. 저는 여기 이렇게(나는 손바닥으로 내 무릎을 가볍게 두들겼다) 존재하니깐요. 즉 존재는 본질에……”

  철썩하는 소리에 나는 놀라서 말을 그쳤다. 아버님이 손바닥으로 방바닥을 두드리신 것이다. 

  “얘야 너무하는구나. 어쩌면 그러니?”

  “어쩜 그래요? 아이 참.”

  목에 건 진주 목걸이가 좌르르 소리를 내게 머리를 저으면서, 옥이도 말하는 것이었다. 

  “아버님, 그리고 옥아. 내가 잘못했는가 봅니다. 저는 이런 일로 해설라무내……”

  나는 당황해서 말을 끊었다. 이북 출신인 어떤 친구놈의 사투리가 불쑥 튀어나왔기 때문이다. 

  아버님과 옥이는 약 1분간 손뼉을 치면서 웃었다. 그것은 쓰인바 박장대소란 말을 이루기 위함이었다. 

  나는 그들에게 박수 소리가 너무 크다는 뜻의 주의를 주었다. 그들은 곧 충고를 받아들여, 웃음과 손뼉 치기를 멈추었다. 


  나는 아버님에게 물어봤다.

  “그런데 용건은 무엇이오니까?”

  아버님은 의아스런 얼굴로

  “얘 너 이상스런 말을 쓰는구나?”

  “죄송합니다. 다 제가 이르지 못한 탓입니다. 아버님, 마음 상하셨지요?”

  나는, 방바닥에 이마를 대고 어깨를 떨면서 흐느껴 울 자세를 잡기 위해서, 우선 오른팔을 눈으로 가져가려고 했다. 나의 속셈을 재빨리 알아챈 옥이는

  “오빠, 그만하세요.”

하고 날카롭게 쏘아붙였다. 지금은 그만두었지만, 한때 성악가가 되겠다던 그녀의 목청은 훌륭한 것이었다. 나는 그런 감동을 감출 필요는 없는 것이었다. 

  “얘 넌 목청이 좋아. 나의 심심한 존경을 받아주련?”

  그러자 아버님이 사정없이 나를 공격하였다. 

  “얘 철아. 넌 언제 그 철이 들겠니, 원 실없는 애두……”


  나는 아버님을 지켜보았다. 이마에 잡힌 주름이 유난히 깊어 보였다. 노인을 괴롭혀드려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불현듯 떠올랐다. 나는 별 수 없이 양반의 씨라는 증거에 다름 아니었다. 

  “아버님 잘 알았어요. 그건 그만하시구 절 부르신 용건을 말씀해주세요.”

  옥이는 정이 담뿍 어린 눈매로 나를 건너다보았다. 

  “음 그 얘길 해야겠구나. 그런데 너 오늘 무슨 날인지 아니?”

  나는 조금 어리둥절했다. 

  “아버님 그런 모양으로 말씀하시면 유감스럽습니다. 아닌 밤중에 홍두깨로 대체 무슨 말씀을 하시려는 겁니까?”

  “글쎄 대답이나 해라.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니?”


  그러자 나는 문득 짚이는 점이 있어서

  “저어, 혹시 할아버지 제삿날이 아니었던가요?”

하고 이판사판으로 넘겨짚었다. 

  아버님의 낯빛은 대뜸 어두워졌다. 그리고 한숨을 쉬셨다. 그리고 재떨이를 끌어당기시더니 절반 남은 꽁초를 집어 들어 피워 무셨다. 그리고 말씀하시는 것이었다. 

  “참 너두 너구나 나도 모르는 할아버지가 또 계시는 모양이구나. 네 말대로라면, 철이는 과거를 창조하는 모양이구나?”

   나는 낯이 뜨거워졌다. 그렇기로서니.

  “설령 제가 실수했기로서니 그렇게 놀리시는 건 어른답지 않으십니다.”

  “싸우지는 말자. 여태껏 우리들의 우정으로 봐서라도 요만 일로 서로 언짢아져서야 되겠니. 그건 그렇구 오늘은 크리스마스이브란 말이다.” 

  “그걸 물으신 것인가요?”

  “그렇다.”

  딴은 오늘이 양력으로 섣달 스무나흗날이니까 크리스마스이브임에 틀림은 없다.


  “저도 그쯤은 알고 있어요.”

  “그래서 옥이가 오늘 밤, 밖에서 자고 오겠다는구나.”

  “이 추운 날씨에요?”

  “응?”

  “감기가 들 겁니다.”

  “너는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있니?”

  “오늘 밤은 영하로 내려간다고 아까 라디오로 말하던데요?”

  이때 옥이가 상냥스럽게 풀이해주었다. 밖에서 잔다는 말은, 한데서 잔다는 말이 아니라, 외박한다는 뜻이니까 그렇게 알아달라고 했다.

  “그래? 아버님 제가 그만 실수를 했습니다. 그러니까 오늘 밤이 크리스마스이브니깐드루 옥이가 외박 허가를 해주십사 한다 이런 말씀이지요?”

 아버님은 바로 그렇다는 고갯짓을 하셨다.


 “그런데 저는 왜 부르셨어요?”

 “넌 그렇게 밖에 말 못 하겠니?”

 “아버님 왜 자꾸 그렇게 말씀하셔요? 꼬지 마시고 순하게 해주세요.”

 “오빠 말이 맞아요. 저두 아까부터 그렇게 여쭙고 있는 중이었어요.”

 “아무튼 내 생각은 외박은 안 된다는 거야. 이 점이 가장 중요해.”

 “글쎄 아빠는 그저 안 된다니 왜 안 돼요?”

 “그럼 내가 묻겠다. 옥아 넌 교인이던가?”

 “아이 참 누가 교인이래요?”

 “그럼 크리스마스가 어쨌다는 거니?”

 “크리스마스니깐 그렇죠.”

 “뭐가?”

 “크리스마스지 뭐긴 뭐야요?”


 “철아 네 생각은 어떻니?”

 “글쎄요.”

 “너는 무엇이든 글쎄요구나. 좀 이건 이렇구 저건 저렇다는 식으루 시원시원해질 수 없겠니?”

 “아버님 불초의 이 자식을 꾸짖어주세요.”

 “넌 나를 상대로 신파를 할 셈이냐?”

 “아빠, 너무 오빠를 나무라지 마세요. 오빠는 좋은 인간이에요. 그리구 그 사람은 고독한 사람예요.”

 “그래? 철아, 넌 고독하냐?”

 “글쎄요.”

 “또 글쎄요구나.”

 “아직 생각해본 적이 없어서……”

 “네 일이니깐 잘 생각해보아라.”


 “아빠 그럼 전 가요.”

 옥이는 일어날 기세를 보였다.

 “안 된다!”

 아버님이 얼마나 꽥 소리를 지르셨던지 옥이는 새파래지면서 주저앉았다. 나는 좀 심하시지 않은가 생각했다.

 “글쎄 왜 그러세요?”

 “몇 번 말해야 알겠니?”

 “다들 오늘 저녁은 밤샘을 하는걸요.”

 “왜 그런다더냐?”

 “아이 속상해, 왜는 왜야? 크리스마스니깐 그런대두요.”     


(이하 생략)     



출판사 서평은 다음과 같다.      


한 가족의 기이한 대화를 통해 소통 장애와 강박 증상에 시달리는 현대인의 일상과 내면을 날카롭게 꼬집고 있다. 아버지로 대변되는 유교에 기반한 전통 사회의 가부장적인 권위와 크리스마스이브를 즐기려는 딸 옥이가 상징하는 서구에서 들여온 근대의 산물에 맹목적으로 흡수되는 젊은 세대, 그리고 좀 더 비판적으로 근대성을 바라보고자 하는 아들인 화자 ‘나’의 이른바 삼각 구도가 이 연작소설의 주요 얼개이다. 최인훈은 고유한 전통을 망각한 채 서구의 근대를 무분별하게 추종하기에 급급한 한국의 일그러진 근대화 풍경을 묘파한다.


출판사 서평을 읽다가 혼자 고개를 갸웃한다. 서구의 근대를 무분별하게 추종하기에 급급한 한국의 일그러진 근대화 풍경을 묘파???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시대의 변화에 적응하지 못하는 양반 어른의 비비꼬인 근대화 풍경이라고……      


게다가 이 가족의 대화가 기이하고 소통 장애라고 말하기도 좀 어렵다.      


나는 반대로 생각한다. 상당히 비폭력적이고 나름대로 무척 민주적인 의사소통이라고…… 하하.     


원래 민주주의란 그런 것이다. 각자가 각자의 관점에서 각자의 목소리를 내는 것이다. 소통 장애가 있는 게 아니다. 서로 상대가 무슨 말을 하였는지는 이해한다. 이해하면서도 딴청을 부릴 뿐. 결국 소통 장애가 아니라 합의 장애에 시달리는 게 현대인의 일상이다.      


그런 거 저런 거 떠나 일단 작품 속 대화와 인물이 큰 웃음을 선사한다. 너무 재미있다.           



     

크리스마스의 축제 분위기는 원래 기독교의 엄숙한 분위기와는 약간 거리가 있어 보인다. 특히 산타클로스의 존재는 기독교의 성경에 비춰보면 뭔가 상당히 이질적인 존재라는 느낌이 든다.  산타클로스는 튀르키예의 과거 어느 지역에서 주교로 살았던 성 니콜라오스라는 실존 인물과 관련된 설화에서 기원한다고 한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축제 분위기는 고대 로마 시대의 농경 신을 위한 축제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있다.      


나는 작년 겨울에 프리드리히 니체의 『즐거운 지식』을 읽으려고 시도했었다. 그 책의 <제2판을 위한 머리말>에서, 니체가 자신의 저서 『즐거운 지식』이 영혼의 사투르날리아 축제를 의미한다고 적어둔 것을 보게 되었다.     


사투르날리아? 그게 뭐지? 인터넷 검색을 해보았다. 검색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로마 시대에 12월 17일은 점성학에서 농경의 신 사투르누스의 이름을 딴 토성이 염소자리와 처음 접촉하는 날이다. 로마인들은 이 날 한 해의 수확을 기념하는 경건한 종교적 의례를 열었다. 귀족, 평민, 노예 등 계급을 불문하고 모두 동일한 복장으로 신전 앞에 모여 의례를 지냈다. 그런데 기독교가 로마에 들어오면서 이런 이교도의 문화가 사라질 위기에 처했을 것이다. 자칫 민중들의 반감을 살 수 있었다. 그래서 고대 로마의 통치자들은 이 종교의식을 정치적으로 축제화하기 시작했다. 이 과정에서 축제 기간은 일주일(12/17~12/23)로 늘어났다. 로마인들의 복장은 평소의 토가 대신에 투니가를 입었고 머리에는 해방 노예가 전통적으로 쓰는 프리지안 모자라는 것 썼다. 이 축제 기간만큼은 노예의 삶에서 해방되는 의미로 필루스라고 부르는 프리지아 모자를 썼는데, 이 모자가 오늘날 산타클로스 모자의 기원이라는 해석이다. 

    

크리스마스이브 하루만 놀지 말고 크리스마스이브위크로 정해서 일주일 내내 놀면 어떨까? 세계 경제에 큰 타격일까? 아니면 광란의 소비에 힘들어 세계 경제가 침체에서 벗어나는 계기가 될 것인가? 잘 모르겠고, 다음 대통령 선거에서는 크리스마스 휴일을 일주일로 연장하겠다는 파격적인 공약을 내세우는 후보가 나온다면 무조건 그를 지지할 것이다! 하하.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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