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도 신사
우리는 정보의 홍수 시대, 기억 상실의 시대, 집중력 부재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다. 그래서인지 요즘 나의 독서도 이질적인 성향을 드러내고 있다. 이제는 과거의 책을 다시 읽어도 정독하는 게 아니라, 발췌해서 읽는 비중이 높아진 것이다. 그저, 재미있는 부문만 골라서 있는 못된 습관을 키우고 있다. 물론 새로운 책을 손에 쥐면, 처음부터 끝까지 정독한다. 아무튼, 요점은 다시 읽기 습관이 변하고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다시 읽기>를 실천하는 게 아니라 <골라서 다시 읽기>를 행하고 있음에, 죄책감이 들 정도이다.
이런 꼼수 독서에 대해 굳이 변명하자면, 뭔가 삭막하고 외롭고, 세상과 동떨어진, 그래서 덜떨어진 생활에 빠진 느낌이 강하기 때문이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을 중얼거리며, 오늘 저녁 로렌스 스턴의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의 한 대목을 (골라) 다시 읽었다. 사랑에 관한 생각이다.
토비 동생, 하고 아버지가 말을 시작했다.
세상에는 뚜렷이 구별되는 두 가지 서로 다른 사랑이 있다네. 그것은 인체의 어느 부위에 영향을 주는가에 따라, - 즉 뇌인가 간인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거지 – 남자가 사랑에 빠졌을 땐 그 둘 중 어느 사랑에 빠진 건지 따져 볼 필요가 있는 걸세.
…
한 가지 사랑은 이성적인 것이고 -
다른 하나는 자연적인 것이라네 -
첫 번째 것은 – 어머니 없이 – 즉 비너스가 전혀 관여하지 않고 나온 것이고, 두 번째 것은 주피터와 디오네 사이에서 나온 것이지. -
…
이 후자는 전적으로 비너스의 본성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네.
첫 번째의 것은 하늘에서 내려온 황금 사슬로서, 영웅적인 것에 대한 사랑을 촉발하는데, 그 안에는 철학과 진리에 대한 갈망이 포함되어 있고 – 두 번째 것은 그저 욕망을 일으킬 뿐이라네.
- 내 생각에는, 아이를 생산하는 일이 지구의 경도를 찾아내는 일 못지않게 세상에 보탬이 되는 일 같은데요, 하고 요릭이 말했다.
- 사랑이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준다는 건 분명하지요. 어머니가 말했다.
- 가정에서라면, 부인 나도 그것을 인정하겠소.
- 지구를 풍성하게 채워 주기도 하고요. 어머니가 말했다.
그러나 여보 – 그게 천국은 텅 비게 만들지 않소. 아버지가 응수했다.
- 낙원을 채우는 것은, 하고 슬롭이 의기양양하게 소리쳤다. 처녀성이지요.
수녀 양반, 참 잘 밀어붙였소! 아버지가 말했다.
로렌스 스턴의 『신사 트리스트럼 섄디의 인생과 생각 이야기』 (제8권 제33장 중 발췌)
사랑은 세상에 평화를 가져다주지만, 가정에서의 사랑만 그러하다는 것이다. 사랑을 해서 자식을 낳으면 지구를 풍성하게 채워 주지만 (대부분 죄악이라서) 천국은 텅 비게 만든다고 말하는 부분이 웃긴다. 낙원에는 성 경험이 없거나 수녀처럼 경건한 분들만 들어가게 된다는 주장도 아예 허튼소리만은 아닌 것 같아 웃음소리가 커진다.
로렌스 스턴이 1759년에 쓴 이 작품은 횡설수설의 극치이고 두서없는 서술법으로 명성을 얻은 작품이다. 이야기의 주제가 뭔지 도통 맥락을 잡기 어렵다. 게다가 이야기가 자꾸 샛길로 빠진다. 이쪽 숲으로 들어갔다 불쑥 저쪽 숲으로 나온다는 평가를 받았다.
하지만 황당하게 재미있다. 이 작품의 유머를 한 번 연구해 보려고 웃기는 대목을 밑줄치고 그 아래에다 감상을 적었는데, 거의 모든 페이지에 밑줄이 쳐져 있다. 하도 밑줄을 쳐야 할 문장이 많아서 아예 사무용 스틸자를 대고 그으며 읽었던 추억(?)이 떠오른다.
작가 로렌스 스턴은 직업이 목사인데, 원래 가난하게 태어났다. 18세기에는 돈 없고 후원자도 없는 흙수저 대학생들이 희망을 걸 데라곤 사제직을 얻는 것뿐이어서, 그래서 신분 상승을 위해 목사가 되었다고 한다. 그가 목사관에서 행했던 설교도 상당히 유희적이고 엉뚱하고 뒤죽박죽이었다고 전한다. 그런 재미있는 목사님의 설교라면 내가 무신론자인 걸 숨기고 달려가 열심히 듣고 싶기도 하다.
이 작품의 많은 대목이 여기저기에서 표절한 것으로 밝혀지기도 했다. 다만 표절이긴 표절인데, 원문의 글들을 가져와서 이보다 더 웃기게 재활용한 경우가 흔하지 않다고 한다. 말하자면, 도둑질을 하긴 했는데, 부가가치를 굉장히 높여서 되팔아 먹은 셈이다.
어떤 평론가는 남의 문장을 홈쳤더라도 부가가치를 높고 새롭게 창출했다면 그건 표절로 볼 수 없다고 주장한다. 표절이 아니라 일종의 창의적 활동이라며, 로렌스 스턴을 그 모범적인 사례로 들었다고. 아무튼 좀 이상한 주장이다. 그러니까, 표절은 보통 기분 나쁜 짓인데, 묘하게도 우리를 기분 좋게 만들었다면, 그건 용서받을 수 있다는 거다. 황당한 주장이다. 이 부문은 오해의 여지가 있으므로, 약간 자세히 적어 보자.
스턴의 이 소설 제5권 1장에서는, 화자가 다시는 남의 글을 빌려 쓰지 않겠다고 맹세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런데 이 맹세의 장면 앞뒤의 문장들이 모두 로버트 버튼이라는 작가의 책에서 표절해 온 것들이다. 더 웃긴 것은, 표절을 당한 작가 버튼이 쓴 글의 내용이다. 버튼은 <표절이란 개념을 해체하고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다>고 주장하면서 표절을 옹호하는 내용을 쓴 것이다. 스턴은 표절을 옹호하는 버튼의 문장 그 자체를 표절하면서, 화자가 “다시는 남의 글을 빌리지 않겠다”하고 맹세하는 장면을 중간에 삽입한 것이다. 즉, 스턴이 저지른 표절 행위는 다음과 같다.
1. 로버트 버튼이 표절을 옹호하며 쓴 내용을 그대로 가져와 자신의 소설 속에다 썼다. (표절했다.)
2. 표절해 온 문장 중간에서 소설 속 화자가 ‘나 다시는 표절 안 할래’하고 결심하는 장면을 삽입했다. (웃김.)
1은 표절이고, 2는 부가가치 창출이다. 하하.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은 없기에 표절은 성립하지 않는다는 주장을 그대로 가져다가 표절한 것도 웃긴다.
아무튼 로렌스 스턴의 작품을 읽다가 웃음을 터트리면서, 나도 모르게, 18세기 사람인 이 목사님만큼은 용서해 주자는 심정이 되어버린다. ㅎㅎ
용량이 아주 큰 정량적인 수치 데이터의 경우는 엑셀로 읽는 호사를 누릴 수가 없다. 용량이 너무 크기 때문이다. 메모장으로도 간신히 읽거나, 읽긴 읽어도 시간이 너무 오래 걸리거나, 데이터 일부가 잘린다. UN에서 세계 각국의 데이터를 보고 받아 구축하는 세계 무역 데이터가 그러한 빅데이터의 하나로 악명 높다.
우리나라의 무역 데이터의 크기를 살펴보자. 1만 2천여 개의 품목이 세계 160여 개의 국가와 거래된 내역이 기록된다. 거래 구분은 수출과 수입으로 양분된다. 거래 결과는 달라 표시 가격, 수량, 중량으로 나눠진다. 무려 1.2만여 개 품목 코드 x 160 x 2 x 3으로 그 데이터의 크기를 계산할 수 있다. (귀찮아서 계산 생략)
그런데 이것은 우리나라 관세청의 기록이다. 일본 관세청도 같은 내용의 자료를 UN에 제출한다. 미국도, 중국도, 프랑스도, 세계 모든 국가가 자국의 거래 내용을 UN에 제출한다. 그래서 위에서 계산된 수치에다 다시 160여 개를 곱해야 한다. 물론 1년치 기본 정보만 그러하다. 품목 코드의 명칭, 국가 코드 약어와 국가 풀네임 등의 부수적인 정보가 함께 수록된다. 연도별 시계열로 20년의 자료를 다운로드하면 분량이 20배 가깝게 늘어난다.
UN이 한 해 동안의 거래 실적을 모두 긁어모으는 수집 기간만 해도 족히 일 년이 넘게 걸린다. 그래서 2024년 연말 현재 UN 무역 데이터의 최신 자료는 2023년 자료이다. 2024년 자료는 2024년이 저문 내년 1월 시점부터 일년내내 수집된다.
이런 데이터는 메모장으로 간신히 읽을 수 있지만, 그러면 뭐 하나! 읽는 것만으로는 아무 소용이 없다. 눈으로 데이터 입력 상태를 잠깐 점검하는 게 소득의 전부다. 데이터의 정합성을 진단하고 오류를 잡아내어 수정하는 데이터 클리어링 작업은 메모장으로는 불가능하다. 원시 데이터를 읽어 들여 새로운 분류 기준을 적용하여 다시 집계하는 작업도 마찬가지로 불가능하다. 메모장은 드넓은 평야를 담은 한 폭의 그림에 불과할 뿐이다. 수확하고 반죽하고 요리할 수 없다.
그래서 우리는 데이터를 처리하는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사용한다. 파이썬이라든지 R, SAS 같은 통계 패키지들이 그런 처리 기능을 장착하고 있다. 문제는 이것들을 배워 익히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다. R은 무료 프로그램이지만 명령어 구조가 복잡하고 행렬에 대한 기본지식도 있어야 한다. 파이썬은 여기저기 모든 곳에서 대유행하고 있으나, 여러 라이브러리를 결합해야 대용량 계산 처리가 가능하다. 내게는 여전히 낯설기만 하다. SAS를 사용한 경험은 너무 오래전의 일이고 프로그래밍 작업이 짜증 난다. 게다가 가격이 너무 비싸다. 판매 개념이 아니라, 리스 개념이기 때문에 해마다 거액의 돈을 내야 한다. 챗GPT의 코딩 도움은 어설퍼서, 신뢰할 만한 결과를 얻기까지는 아직 좀 멀었다.
이런 사유로 인해 나는 Stata를 사용한다. I Am a Statalist!
Stata는 비교적 저렴하고 명령어 구조가 굉장히 쉽다. 초보자가 배우기도 편하다. Stata는 통계학을 의미하는 Statistics과 수치 자료를 의미하는 Data를 조합하여 만들어진 명칭이다.
Statistics + Data = Stata.
요즘 며칠 동안은 오랜만에 Stata 작업에 몰두하고 있다. UN 무역 데이터를 다루는 일거리가 하나 들어왔기 때문이다. UN이 데이터 포맷과 범위를 상당히 변경하는 바람에 조금 골치가 아프다.
하여, 브런치북 [맥락을 떠난 항해] 연재를 제 때에 제대로 준비할 수 없었다. ← 결론임.
하하하.
글쓰기 힘들다는 변명을 이토록 자세하고 길게, 자기 자랑을 마구 곁들여 늘어놓다니!
내가 생각해도 웃긴다.
맥락을 떠난 항해니까, 아무쪼록 부디 용서해 주기 바란다.
유명 작가의 경우와 자신의 경우를 나란히 대비하는 짓을 가끔 해보기를 권장한다.
위대한 작가들의 멋진 문장을 하나씩 인용하고선, 맨 아래에다 내 문장을 슬쩍 배치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해 보시면 알겠지만, 신사가 된 것처럼 기분이 무척 좋아진다.
위대한 작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기분이고, 문학 행사에서 단체 사진을 함께 찍는 벗이 된 기분이랄까 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