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일 아침 환기를 할 겸 집안 창문을 죄다 여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하던 평범한 어느 여름날이었다.
베란다에 나갔다가 나의 식물들이 밤새 안녕하셨는지 살피다가 나는 그만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손 대기도 아까운 그 페퍼민트가, 보기에도 아까운 페퍼민트가 처참하게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에 '귀뚜라미로 추정이 되는 곤충' 한 마리가 염치도 없이 범행 현장을 떠나지도 않고 그대로 있었다.
"저거 귀뚜라미 같은데 아마 귀뚜라미가 페퍼민트 잎을 다 뜯어 버렸나 봐. 이게 얼마나 힘들게 돋은 건데 이제 막 싹튼 것도 줄기를 다 잘라 버렸어."
내가 망연자실해 있자 아이들이 우르르 내게 달려들었다.
"엄마, 무슨 일이야? 왜 그래?"
"여기 봐봐. 엄마가 겨우 이 페퍼민트 싹 틔웠는데 저 귀뚜라미가 다 뜯어놨다니까. 아마 먹을 건 줄 알고
그랬나 봐. 근데 먹지도 않고 줄기랑 이파리를 다 뜯어 놨잖아. 이게 뭐야. 페퍼민트가 얼마나 싹 틔우기 힘든 건데. 지금 씨를 사서 심고 싶어도 팔지도 않는단 말이야."
정말 나는 너무 분한 나머지 그 귀뚜라미(로 추정되는 곤충)에게 앙갚음이라도 해주고 싶을 지경이었다.
잘못했다고, 용서해 달라고 앞다리가 뒷다리가 될 만큼 빌 때까지 흠씬 때려주고 싶었다.
어쩜 뻔뻔하게 자기가 무슨 짓을 한지도 모른다는 듯 시치미 뚝 떼고 감히 어딜 멀뚱멀뚱 쳐다보고 잇는 거람?
잠시 황망해하며 참사를 당한 페퍼민트를 거실로 옮긴 사이 그 범인(내지는 용의자)은 범행현장을 벗어나고 없었다, 이미.
귀뚜라미처럼 보였지만 사실 귀뚜라미였는지는 모른다.
그리고 내가 의심을 강하게 하긴 했지만 그게 귀뚜라미(로 추정되는 곤충) 짓이었는지도 확실히 알 수는 없다. 다만 그 곤충이 있었으므로 지레 짐작할 뿐이었다. 다른 생명체는 없었으니 그 곤충이 가장 의심스러웠고 내가 보기엔(귀뚜라미가 어떻게 생겼는지는 잘 모르지만 어쨌든 나는 순간 귀뚜라미라고 철석같이 믿었던 거다)'딱' 귀뚜라미로 보였다. 베란다에 난데없는 귀뚜라미라니!
열흘 낮, 열흘 밤을 그 곤충을 원망하고 원망해도 내 분은 삭지 않을 것 같았다.
6월 말 경에 바질과 페퍼민트, 레몬밤, 허브딜, 이렇게 4 종류의 씨앗을 심었었다.
바질은 금세 싹이 트고 하루가 다르게 무럭무럭 자라났고, 레몬밤(으로 추정되는 식물)도, 허브딜도 성공적으로 싹을 틔웠다. 하지만 페퍼민트만은 가는 세월이 야속할 만큼 시간이 한참 지나도 도무지 싹이 보이질 않았다.
가뜩이나 씨앗도 몇 개 없었는데도 행여나 하면서 매일 물을 주면서 나는 그들에게 지극정성이었다.
처음 그 먼지 같은 이파리 두 장을 발견했을 때 나는 기쁨에 겨워 눈물까지 날 뻔했다.
그랬는데, 그랬는데 그 요망한 곤충이 그 사달을 내버린 것이다.
희한하게도 싱싱하고 먹음직스럽게 생긴 바질은 사방에 넘쳐 나도 거들떠도 안 보고 옆에 있는 허브딜이나 레몬밤도 눈길 한 번 안 주고 '페퍼민트만' 집중 공략했다는 사실에 나는 그 곤충이 너무 괘씸했다.
그 먼지 같은 게 먹을 게 뭐가 있다고.
결론적으로 먹지도 않은 것 같았지만 말이다.
못 먹는 감은 찔러나 보고, 못 먹는 페퍼민트는 줄기라도 잘라 보기나 해 보자, 뭐 이런 심보란 말인가?
네가 지금 얼마나 엄청난 일을 저질렀는지, 백번 사죄해도 모자라다고, 선처 따위는 없다고, 도대체 무슨 마음으로 그런 해괴망측한 일을 저지른 거냐고 한 소리 하고 싶었으나... 범인은 자리를 뜬 지 오래였고 나는 너무 상심한 나머지 멍해지기까지 했다.
"차라리 먹고 없었으면 덜 속상하기라도 하겠다. 이게 뭐야. 줄기를 잘라 버려서 어떻게 해 볼 수가 없게 생겼잖아. 뿌리가 없는데 어떻게 살겠어? 식물은 뿌리가 생명인데."
나 혼자만 낙담해서 중얼거리고 있는데 딸이 불쑥 한마디 했다.
"엄마, 심어 봐."
다짜고짜 심어보란다.
"뭘?"
"그거 말이야, 페퍼민트. 그냥 한 번 심어봐. 혹시 알아, 다시 뿌리가 생길지?"
유레카!
내가 왜 그 생각을 못했지?
몇 년 전에 페퍼민트 화분을 사다가 물꽂이로 기르고 중간 줄기를 잘라 흙에 다시 심어서 키웠던 생각이 불현듯 났다.
역시 하늘이 무너져도 무슨 구멍이 생기긴 생기나 보다.
"정말 그러면 되겠다. 일단 한번 심어봐야겠다. 잘 자라면 다행이고 안 되면 어쩔 수 없지 뭐."
이렇게 대견할 데가!
뉘 집 딸인지 어쩜 그런 기특한 생각을 다 했을꼬?
동강 난 줄기를 조심히 집어서 흙 속에 심었다. 물도 조심히 주고 하루 종일 틈이 날 때마다 들여다봤다.
하지만 시들시들해진 페퍼민트는 회복할 기미조차 보이지 않았다.
틀렸나 봐.
어떡해.
가망 없어 보여.
그래도 하는 데까지는 해 보자.
2024.8. 10.
며칠 후, 생각이 나서 들여다봤더니 웬걸?
전날보다는 더 생기를 찾은 모습이다.
일단 줄기가 곧게 섰다는 데에 희망이 보였다.
잘하면 살릴 수도 있을 것 같다.
이제 나는 저 페퍼민트 한 그루 살리기에 (잘 아시다시피 거짓말 조금 보태자면) 모든 걸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