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임자 Nov 16. 2022

공무원 남편에게 청탁을 했다

나를 사랑한다면. . .

22. 11. 15. 꽃으로도 청탁하지 말랬다.

< 사진 임자 = 글임자 >


"이번 수능 때는 어떤 임무를 맡았어?"

"주차장 근무야."

"주차요원이야?"

"그런 셈이지."

"그럼 진짜 잘해야겠네. 시험 중에 갑자기 경적소리 울리고 그러면 절대 안 되잖아."

"아니, 그런 거 담당하는 사람은 또 따로 있고 나는 주차장에서 차 주차하는 것만 잘 보면 돼. 주차하러 들어오면 자리 봐주는 거야."

"그래? 작년에 비하면 이번엔 엄청 편한 거네?"

"그럴 수도 있지."

"준비물은 없어도 돼?"

"무슨 준비물?"

"야광봉이라든지 야광조끼나 뭐 안내판 이런 거 말이야."

"그냥 들어온 순서대로 안쪽에서부터 주차하라고 하면 되지 않을까?"

"알아서 하셔."


수 십만 명의 수험생이 수능을 앞두고 떨고 있듯 그보다 더 떠는 이들도 대한민국에는 아주 많다.

수능일 하루 특별 임무를 맡은 남편은 어서 빨리 수능날이 지나기를 바라고 있다.


"오늘 수능날 방송 대비해서 시험 삼아 방송하는데 그 선생님 엄청 긴장하더라."

"당연하지. 그게 보통 일이야? 절대 실수하면 안 되잖아."

"잘못해서 방송 사고라도 나면,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아무도 그에게 마이크를 쥐어 줄 일이 없는데도 혼자서 몸서리를 쳤다.

"학교가 완전 비상이겠네."

"응. 진작부터 수능 대비해서 이것저것 점검하고 사람 써서 교실 다 청소하고 정신도 없지. 곧 감사라 안 그래도 바쁜데."

"근데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무슨 말?"

"청소하는 거 나 자신 있는데 왜 나 안 써줬냐고?"

"또 쓸데없는 소리 한다."

"왜, 내가 창피해?"

"무슨 말이야?"

"무슨 일거리 있으면 나 좀 부르라니깐 왜 말도 안했냐고?"

"이 사람아, 진작에 사람 다 뽑아놨어."


남편은 저런 일이 있을 때마다 내게 꼭 알려주마 하고 희망고문을 하며 나를 안심시켰으나 단 한 번도 내게 일거리를 준 적이 없다.

결혼 전 그가 우체국에 근무했을 때에도 면사무소에서 퇴근한 나보고 절대 우체국 앞에서 기다리지 말고 멀찍이 떨어져 있는 버스 정류장에서 기다리고 있으라고 신신당부하던 그였다.

어쩌다가 근무시간에 전화라도 하면 다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여보세요? 잠깐만, 화장실로 가서 전화받을게."

이러면서 화장실 토크를 진행하던 이였다.

그럴 때마다 나는 따져 물었다.

"날 사랑한다고 말할 땐 언제고 왜 사무실 안에서 당당히 전화를 받지 못하는 거야? 내가 창피해?"


둘 다 다른 때는 몰라도 전화 통화만큼은 최소한의 목소리로 용건만 간단히 하는 스타일이었다, 특히 직장 안에서는.

무식하게 큰소리로 지껄이는 것이 아니라 조곤조곤 서 너 마디만 주고받으면 30초도 안돼 끝날 통화를 남편은 단지 '직장'이라는 이유만으로 굳이 화장실로 향했다.

통화시간보다 그곳으로 향하는 시간이 몇 배는 더 걸릴 게 분명했다.

화장실 안의 누군가가 의도치 않게 우리의 대화를 듣게 되리라는 의심은 꿈에도 못한 채 말이다.

일종의 '통화 도청 총량의 법칙', 사무실 직원이 못 듣는 대신 화장실 안의 누군가가 대신해 줄지도 모를 일이다.


그나 나나 사무실 안에서는 진동이나 무음으로 설정해 놓고 휴대전화를 사용했다.

"조용한 사무실에서 벨소리 자꾸 울리고 그러면 신경 쓰이고 그렇잖아. 남에게 피해 주기도 싫고."

"그렇긴 한데, 어차피 통화도 금방 끝날 거 조용히 통화하면 되지 뭐하러 화장실까지 가서 전화를 받아?"

하루에 수 십 번씩 시도 때도 없이 전화를 걸어댔던 것도 아니고 그럴 사이도 아니었으므로 그 옛날 남편의 처사는 왠지 부당하게까지 보였다.

결코 그럴 리는 없지만 그의 목소리를 타고 화장실의 향기롭지 못한 냄새가 나에게까지 옮아올 것 같은 기분에 사로잡히기도 했다.


"진동으로 해 놔도 일하다 보면 자꾸 전화를 놓치는 경우가 많네."

그래서 그는 와치를 장만했다.

"중국산이라 그런가 별로네."

그래서 그는 국산으로 다시 장만했다.

"이것도 좀 차고 있으니까 걸리적거리네."

그래서 그는 그 물건을 손목에서 해방시켜주고 출근하는 날이 잦아졌다.

그리고 나는 최근 그에게 전화를 거는 날이 눈에 띄게 줄었다.

나의 기쁨, 나의 고통.

그에게 '와치'란?

문득, 와치의 존재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내가 일 년 가까이 청탁을 하는데도 콧방귀도 안 뀌네? 좋은 자리 있으면 알선 좀 해 주라니까. 날 사랑한다면서 그 부탁 하나 못 들어줘?"

나도 참 실없다.

아무말대잔치는 자칫 잘못하다간 가정 불화를 야기할 것이다.

그에게서 어떤 반응이 나올지 뻔히 알면서도 세상 쓰잘데기 없는 소리만 하고 있다.

"아이고 이 사람아. 멀쩡한 공무원 그만두고 학교 와서 청소한다고?"

"청소하는 게 뭐 어때서? 나 청소 잘해."

진심으로, 진지하게, 나는 한때 청소업체를 자그마하게 차려볼까도 생각해 본 적이 있었다.

그러나 자금이 없고 재산도 없는 데다가 직장마저 없어 신용대출도 못한다.

조신하게 살림만 하라는 계시인가 보다.

얌전히 집안 청소에 매진해야겠다.



포기를 모르고 나는 다시 한번 남편 찬스를 이용해 청탁을 넣어 본다.

"나중에 일 있으면 나한테 꼭 알려 줘. 알았지? 거기서 만나도 절대 알은척은 안 할게! 절대 부인이라고는 안할게!"

남편 찬스,

그런 귀한 것이 감히 내 차지가 될 날이 오기나 할는지 모르겠다.









이전 03화 누가 남편에게  장미꽃을 주었나?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