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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Nov 30. 2022

생활의 발견, 너의 의미

김치찌개 국물로부터 남편을 지키는 법


22. 11. 29. 어쨌든 앞치마

< 사진 임자 = 글임자 >


"나 얼른 밥 먹고 다시 면접 보러 가야 돼. 밥 좀 줄래?"


설마설마했는데 정말 그 양반은 점심을 먹기 위해 집으로 들이닥쳤다.

오전 11시 45분이 넘어서고 있었다.

그럴 줄 알고 아침에 김치찌개를 미리 끓여 놨다.

대략 점심시간을 예상하고, 미리 준비하지 않는다면 그 양반과 더 많은 시간을 한 집에서 보내야  것이므로 그런 불상사를 애초에 방지하고자 내 딴에는 서둘렀다.

CCTV를 돌려 보고 온 것인지 어쩜 팔팔 끓었던 찌개가 적당히 떠먹기 좋은 온도가 되었을 때 집으로 온 것이다.

면접 장소가 집에서 멀지 않기 때문에 이런 비극이 일어났다.

어지간하면 그냥 근처에서 사 먹으라고 신신당부했건만 점심을 굳이 집으로 와서 챙겨 드시는 남편이라니.


멋을 낸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면접이라고 몇 년 만에 넥타이도 매고 아침에 나서신 그 양반은 넥타이랑 그 사이에 얼마나 정이 들었다고 밥 먹을 때조차도 풀지 않고 한 몸이 되어 점심을 드시는가.

아슬아슬했다.

마침 밥을 먹다가 흘리면 볼썽사납게 고춧가루도 살짝 묻어 빨간 흔적을 남기기 안성맞춤인 김치찌개가 하필이면 오늘의 점심 메뉴였다.

물론 내가 정한 것이다.

어차피 집이니까 옷 갈아입고 편히 밥을 먹든지 아니면 턱받이나 앞치마라도 해야 할 것 같은데 별생각 없이 찌개 국물을 흡입하는 폼이 몹시도 불안했다.

그러나 단지 내 생각뿐인 그것을 그 양반에게 권한다면 별 걸 다 간섭한다는 핀잔을 듣는다거나 (전혀 알아서 하지 않기 때문에 내가 제안을 하는 것인데도) 알아서 하겠다는 건성의 대답만 듣게 될 것이므로 잠자코 있었다.


나도 아주 깔끔한 성격은 못되지만 남편도 무던한 성격이었으므로 유난스럽지는 않다.

옷에 작은 얼룩 같은 게 묻어도 크게 상관 않고(사실은 너무 건성이라 묻은 사실조차도 깨닫지 못할 때가 더러 있었다.) 설사 알아차렸다 해도 대수롭지 않게 넘어가는 편이다.

어차피 세탁은 그 양반의 몫이 아니었으므로.


"근데 이따가 또 면접 가야 하는데 찌개 국물이라도 옷에 흘리면 어쩌려고 그래?"

"괜찮아."

아니, 전혀 괜찮지 않다.

내가 괜찮지가 않아. 사람이 어쩜 이렇게 이기적이람?

만에 하나 내가 우려하는 비상상황이 발생한다면, 셔츠야 다른 걸로 갈아입고 가면 될 일이지만(엊그제 밤에 갑자기 새 셔츠를 세탁해 달라고 해서 부랴부랴 다림질까지 해 놨더니 아침에 엉뚱한 셔츠를 입고 가셨다.) 특히나 넥타이에 오늘 점심 메뉴의 흔적을 고스란히 남기게 된다면 고달파지는 사람이 누구일까?

그 양반은 무슨 문제가 생기면 항상 내게 해결을 요구한다.

가뜩이나 심리적으로 스트레스도 심하고 신경 쓰이는 일도 많은 날인데 한가하게 넥타이에 묻은 찌개 얼룩이나 지우고 있을 양반이 절대 아니시다.


턱받이는 기원전 500년 전에 우리 집에서 사라졌고 대용할 만한 물건이 무엇이 있을까.

수건이라도 둘러보라고 할까.

그것도 아이들 어릴 때 쓰던 속싸개만 한 수건으로?

정작 당사자는 아무 생각이 없는 것 같았다.

나는 그런 생각이 드는데 왜 전혀 그런 생각을 못하는 거지?

예민한 날이니까 신경 거슬리게 하지 말고 차분히 접근하자.


집에서 이발을 하게 되면서 이발 도구들을 장만해 둔 게 있었다.

허가만 안 받았다 뿐이지 갖출 건 어지간하게 거의 다 갖춘 상태다.

비밀리에 문 걸어 잠그고 아들과 남편을 대상으로 영업을 하는 나이롱 미용사는 제법 그럴듯해 보였다.

"어차피 미용실 가서 매달 이발비 들이는 것보다 이렇게 도구 장만해서 평생(아니, 함부로 단정 짓지 말자, 평생이라는 말보다 '같이 사는 동안만') 쓸 수 있으니까 이게 훨씬 이득이야."

이런 말로 항상 합리화를 해 가면서 하나둘씩 살림을 늘려갔다.


미용 앞치마 생각이 났다.

3년 전에 구입한 것인데 한 번도 사용은 하지 않은 것이다.

그 말인즉,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 있으면 있는 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러니까 꼭 필수품은 아니라고 생각되는 그것이다.

"이거라도 둘러. 옷에 국물 떨어지면 안 되잖아"

"나 생각해 주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어 역시."

짚고 넘어갈 것이 있다.

'셔츠와 넥타이'를 생각해 주는 것이지 그 양반을 생각해 주는 것은 아니라고 내 입장을 확실히 밝힌다.

내 손목을 소중하니까.

"이런 건 또 언제 준비했어?"

"찌개 국물 먹을 때 두르고 먹으라고 내가 3년 전에 미리 장만해 놨지. 오늘 같은 날이 있을 줄 알고 말이야. 요즘 새로 나온 앞치마야"

"우와. 어쩜 그런 생각을 다 했어? 역시 자기야. 이거 신기하게 생겼다."

그래,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미용실에서 본 기억이 분명히 있을 텐데도 전혀 눈치를 못 챈다.

무심한 당신...


"그렇게 아무 생각도 없이 막 국물 떠먹다가 넥타이나 셔츠에 떨어지면 어떡하려고 그래? 그거 잘 지워지지도 않고 지금 시간도 없잖아. 괜히 사고 쳐서 나 피곤하게 만들지 말고 미리 조심해. 그거만 두르면 깔끔하게 밥 먹을 수 있잖아. 왜 그렇게 조심성이 없어? 그런 생각 안 들어?"

라고 말하지는 못했다 물론.


"자기 덕분에 밥 잘 먹었어. 그리고 저거 걸치고 밥 먹으니까 옷에도 안 흘리고 진짜 좋다. 어쩜 그런 생각을 다 했어? 고마워."

그래,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아.

적어도 저렇게 말하는 그 순간만큼은.

그래야 이 가정이 유지된다...


출발해야 할 시각이 다가오고 있었다.

갑자기 그 양반이 호들갑을 떨며 나를 불렀다.

불길해 불길해.

"어떡해. 이거 봐봐."

물을 마시다가 셔츠 앞자락을 흥건히 적셨다.

넥타이 아래로 그림자가 선명히 생긴 것처럼도 보였다.

일부러 저렇게 쏟으려고 해도 못하겠다.

문제는 그 물은 내가 진하게 우려낸 작두콩물이었다.

색이 있기 때문에 셔츠가 다 마르더라도 물 자국이 얼룩덜룩 남을 터였다.

이가 다 빠진 합죽이도 아니고 컵 입구에 바짝 입을 대서 적당히 입을 벌려 입안으로만 적당량의 물이 흘러 들어오게 하는 그 간단한 행위도 하기 어렵단 말인가.

나의 기쁨, 

나의 고통,

나의 뒤치다꺼리.

내 불찰이다.

성급하게 그 앞치마를 벗기는 게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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