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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Dec 06. 2022

당신은 남편과 하루에 커피를 두 잔 마셔본 적이 있나요

삼한사온과 커피 권하는 사회


22. 12. 5. 의심의 커피

< 사진 임자 = 글임자 >


"내가 커피 한 잔 타 줄까?"

"아침에 줬잖아. 안 마셔도 돼."

"그냥 먹어. 내가 타 줄게."

"하루에 한 잔 마셨으면 됐지, 안 줘도 돼."

"한 잔 더 마셔."

내가 커피를 엄청나게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고 그다지 맛을 잘 아는 것도 아니며 먹어도 그만 안 먹어도 그만인 것을 평소의 남편답지 않게 강권하기 시작했다.

그래, 성의를 생각해서 한 잔 더 추가하자.

그거 한 잔 더 마신다고 해서 살이 찔 것도 아니고 전기요금 폭탄을 맞는 것도 아닌걸 뭐.


겨울철의 삼한사온처럼(이미 무너진 지 오래라고 하지만) 며칠은 엉뚱한 소리를 해서 속을 상하게 하다가 또 며칠은 한 번씩 정신이 번쩍 드는지 (속사정을 잘 모르는 남들이 보기엔) 잘 대해준다.

종잡을 수 없는 이 남자, 11년을 넘게 살았지만 정체가 뭔지 정말 궁금할 때가 무척 많다.

그러나,

그의 정체 같은 것은 굳이 파헤치지 않아도 좋으리.

때론 모르는 게 약이 되고 알면 골병이 는 일도 있으니까 말이다.


보통은 내가 한 번 거절하면 남편은 바로 포기를 한다.

어차피 계속 권해봐야 내가 받아들이지 않을 것을 뻔히 알기 때문이다.

그와 나 사이에서는 체면치레 이런 것은 없다.

원하면 원한다고 말하고 싫으면 싫다고 바로 말한다.

그런데 일요일 낮에 남편의 행동은 조금 달랐다.

그는 집에 있을 때는 하루에 두세 잔의 커피를 마시는 사람이다.

나는 커피 맛도 잘 모르거니와 애써 찾아 마시는 타입도 아니어서 그가 커피를 만들면 곁에서 얻어먹는(?), 정말 얻어먹는다는 표현이 정확하다 할 만큼 적극적으로 마시지는 않는다.

일요일 아침에도 여느 때의 휴일처럼 내게 커피 한 잔을 건넸다.

"고마워. 역시 아빠가 커피는 정말 잘 만들어 준단 말이야. 나중에 너희도 크면 아빠가 이렇게 커피 만들어 줄 거야. 그치?"

"내가 언제 애들 것까지 만들어 준다고 했어?"

아차차, 너무 멀리 갔구나, 내가 또.

입이 방정이로세.

당사자의 의사와는 전혀 무관한(어쩌면 진심으로 그럴 마음이 없어서였는지도 모르겠으나) 나의 발언에 남편은 발끈했다.

"커피를 하도 맛있게 잘 만들어서 혼자 먹기 아까워서 그랬지."

나도 세상의 때가 많이 묻었나 보다.

영혼도 없는 입에 발린 소리를 다 할 줄 알고, 그것도 남편 앞에서.


"자, 한 잔 더 해."

으레 남편이 마시고 싶어 하는 것이려니 했는데 내 앞으로 들이밀었다.

이상하다.

커피 안에 뭘 탔나? 괜찮다는데도 왜 자꾸 마시라고 그러지?

뭔가 있어, 분명히.

오해는 마시라.

내가 상상하는 그것은 아내를 향한 남편의 사랑이라든지, 그의 진심이라든지, 그의 정성 뭐 이런 것들을 말하는 것이다.

그것을 한잔 다 마셨으나 지금까지 아직 어떤 신체의 변화라든가 심리적 동요 내지는 눈에 띌 만한 특이점은 아직 나타나지 않았다.


커피를 홀짝이고 있는데 난데없이 고해성사를 시작했다.

"나 넥타이 세 개 샀어."

지난주에 이미 하나 샀었는데 한꺼번에 세 개씩이나?

"그리고 겨울 옷도 몇 벌 샀어."

그래, 겨울에 여름옷을 입고 출근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그래야 맞지.

"이따가 옷 사러 같이 나갈래?"

각자 독립적인 노선을 추구하고 살자고 합의 본 지 얼마 안 되었는데 이게 무슨 뚱딴지같은 소리람?

'같이'의 '가치 없음', 그것을 그는 정녕 모른단 말인가?

결혼식장에서 같이 나란히 퇴장했으면 됐지 뭘 굳이 또 같이 가시려고 저러시나.


이로써 수수께끼가 풀린 것인가.

다른 때 같으면 뭐 해달라고 부탁하면 피곤하다고 거들떠도 안 보는데 금요일 저녁에 생강 껍질을 다 벗겨 주시고, 김장하고 와서 어깨가 아프다니까 시키지도 않았는데 자그마치 10초가 넘게 내 어깨를 주물러주시질 않나, 토요일에도 생강 껍질을 또 벗겨 주시고, 점심에는 온 가족들에게 손수 라면씩이나 끓여주셨으며, 일요일에도 생강청에 있는 설탕이 잘 녹지 않아서 골고루 저어 달라고 그냥 한 번 해 본소리에도 격한 손놀림으로 설탕을 다 녹여주시더니.

아니지,섣불리 판단하지 말자.

이렇게 싱겁게 끝낼 사람이 아니야.


가만, 어디 보자.

금, 토, 일, 연속 3일 내게 친절했으니 하루 더 희망이 남았나? 했으나 어제 아침 무참히 그 삼한사온이 깨어졌다.

과연, 우리나라의 겨울은 이제 더 이상 삼한사온이 아니듯 그도 시대의 변화에 발맞춰 '삼온사한'으로 돌변했다.

알고 보면 급변하는 시대의 흐름에 누구보다도 민감하게 반응할 줄 아는 예민한 사람이다.


일요일 저녁, 하루에 커피를 두 잔이나 마시고도 카페인 따위에 굴복당하지 않으리라는 굳은 의지의 한 남자는 숙면에 전혀 방해를 받지 않고 세상 편하게 잠들었고 느닷없이 커피 세례를 두 잔이나 받았던 나는 새벽 3시가 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덕분에  찾아올 리도 없는 밤손님이 행여라도 들이닥칠까 홀로 보초를 서야만 했다.

내가 이렇게 깨어있는데 누구라도 찾아와 줘야만 잠들지 않은 보람이 있을 것 같았다.

비록 그가 밤손님이라 할지라도 나는 그가 찾아와 주기만 한다면 백만 년 만에 우담바라 꽃이라도 본  반가운 나머지 얼싸안아줄지도 몰랐다.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쉽사리 잠들지 못하도록,

현실에 안주하지 않도록 나를 늘 깨어있게 만드는 고마운 사람,

인정도 많은 당신.

사려 깊은 당신.

그리하여 당신은 나의 기쁨, 나의 고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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