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렇게까지 안 챙겨줬다고 말하지 말고, 맞벌이했을 때는 나도 일이 많고 정신없으니까 자기를 많이는 못 챙겨줬었다고 말해. 그렇다고 내가 아예 나 몰라라 한 것도 아니잖아? 나는 그때 같이 일 안 했어? 일하랴 애들 뒷바라지하랴 나도 미친 듯이 바쁘고 힘들고 피곤했다고. 내 몸 하나 건사하기도 힘든데 내가 누굴 챙길 정신이나 있어? 그러는 자기는 그때 나 밥 한 번이라도 차려줘 봤어? 그때 얘기를 지금 할 건 아니지. 안 그래?"
"그렇긴 하지. 그땐 자기가 거의 다 했지."
"잘 나가다가 느닷없는 소리 한 번씩 하더라?"
"잘 챙겨줘서 좋다는 거지 뭐."
이런 걸 아마도, 거의 확신하건대, 고급 전문 용어로 '호강에 겨웠다.'라고 하는 것일 게다.
아내가 남편을 잘 챙겨주고 있는 지금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것이지, 지난 과거 따위가 뭐 그리 섭섭할 일이며 뒤늦게서야 끄집어 내 곱씹을 일이라고 지청구 들을 소리만 하느냔 말이다.
섭섭하고 억울하기로 따지면 나야말로 할 말이 많은 사람인데 말이다.
"나는 맥주 갖다 달라고는 안 했는데?"
"아까 '맥주나 한잔할까.' 그랬잖아."
"근데 갖다 달란 말은 아니었어."
"나도 가지고는 왔지만 마시라고는 안 했어."
생각만으로도 아침부터 기분 즐거워지는 금요일, 퇴근 후 남편이 저녁을 다 먹고 맥주 얘기를 꺼냈다.
그래서 집에 있는 맥주 하나를 갖다 준 것뿐이다.
그런데 자신의 말 한마디에 내가 즉각 반응을 보인 것이 신기했는지 저런 말을 했다.
요즘 자주 듣는 소리기도 하다.
내가 일을 그만두고 남편을 더 챙기고 신경 쓰고(물론 남편 성에 차는지 아닌지는 모른다, 굳이 알고 싶지도 않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만큼만 하고 있다.) 하는 것에 대해 남편은 '그 점은 좋다.'라고 한다.
"날마다 출근해서 힘들게 일하는 사람도 있는데 이 정도는 내가 해줘야지. 밖에서 힘든 거 내가 다 알아."
물론 100 % 진심이다.
애초에 일을 안 했던 것도 아니고 나도 조금 일을 해 본 사람이니 직장 생활이라는 게 결코 녹록지 않다는 것을 모르지 않는다.
"맥주엔 버섯전이랑 호박전 안주가 제격이지. 그거 안 먹으면 바로 징역가. 알지? 조금만 기다려."
"아니야. 됐어. 번거롭게 그걸 언제 해?"
"나 금방 해. 그 정도는 장난이지. 시간 얼마 안 걸려."
"괜찮다니까. 그냥 마셔도 돼."
"아니야. 재료 있으니까 해 줄게. 내가 그 정도도 못해주겠어?"
"진짜 자기 많이 변했어."
"그 소리는 빼라. 남들은 해 주라고 해도 안 해주는 마당에 말이야."
"그러네 정말."
"아무튼 조금만 기다려 봐."
남편의 안주를 핑계 삼아 내가 또 느닷없이 식탐이 생겨서 일을 벌였다는 말은 끝내 하지 않았다.
며칠째 냉장고에서 안정을 취하고 있는 새송이버섯과 애호박이 이제 그만 제 임무를 다 마치고 생을 마감할 때가 되었다고도 판단했다.
'냉장고 파먹기'라기보다 보관 중인 '식재료의 시의적절한 쓰임'이라고 해 두자.
이런 걸 남편 좋고 아내 좋다고 하는 거 아니겠는가.
술안주도 만들어 주고 나도 옆에서 기름 냄새 좀 맡고.
평소에 식탐이 그리 있는 편은 아닌 것 같지만 가끔 어느 한 음식이 당기면 기어코 만들어 먹어야 직성이 풀리는 성격에 가까운 나는 그날도 버섯전과 호박전을 4판 부쳐내고야 말았다.
남편은 가끔 집에서 맥주 한 잔 정도를 마시지만 술이라면 무슨 역병이라도 멀리하듯, 철천지 원수 보듯(솔직히 무슨 맛으로 먹는지도 모르겠고) 하는 나는 그저 안주만 만들어 줄 따름이다.
일요일 저녁, 다음날 출근할 생각에 오후가 되어가면 슬슬 예민해지고 시무룩해지는 마흔한 살의 직장인, 그 직장인을 뒷바라지할 의무가 있는 사람은 종종 술안주를 제공해 줄 필요도 있다(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생각이다.)고 본다.
분명히 그 사람은 결혼을 했고 배우자가 있는 4인 가족의 가장이건만 가끔 보면 마치 독거 직장인 같기도 하다.
같이 맥주 한 잔씩 마셔주면 좋겠지만 단칼에 거절하는 아내 때문에 항상 쓸쓸하게 혼술 하는 남편에게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다.', '가진 거라곤 안주 만들어내는 솜씨밖에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