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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Apr 15. 2023

누나의 당근과 채찍

잘 자란 누나 한 명

2023. 4. 9. 이끄는 대로 따르라

< 사진 임자 = 글임자 >


" 엄마, 이런 식으로 하는 거야.! 보상도 좀 주고. 재미가 있어야 공부도 하지."

"그래. 우리 딸이 동생 잘 가르쳐 주네."


딸은 아들의 수학 문제집 채점을 하면서 조금은 우쭐한 태도로(약간 거만한 감도 없잖아 있긴 했다, 내 느낌에는) 내게 '자고로 공부는 이런 식으로 하는 것'이라는 시범을 보여주었다.


"엄마, 내가 엄마 대신 채점해 줄까?"

"그럴래? 그럼 엄마야 고맙지. 엄만 할 일이 많아서 말이야."

"알았어. 그럼 내가 할게."

딸이 선뜻 재능기부를 하겠다고 나섰다.

"누나가 무슨 내 문제집을 채점해 준다고 그래?"

아들이 처음엔 반발했다.

"3학년 문제니까 5학년이 충분히 할 수 있지. 채점하다가 틀린 거는 동생한테 좀 가르쳐 주고 설명해 줄래?"

나는 딸에게 막중한 임무를 주었다.

"알았어. 어디 보자."

딸은 오랜만에 어떤 의욕을 다 보였다.


저녁을 먹고 설거지를 하고 시금치를 데치고 있는데 딸이 듣기만 해도 반가운 소리를 다 했다.

동생은 제 누나를 못 미더워했다.

남편은 다음날 출장이라며 칼퇴근을 하고 일찌감치 저녁을 두 그릇 가까이 잡수고 당구를 치러 나간 후였다.

설거지를 다 끝내고 내가 아들 수학 문제집을 채점하려고 마음먹었는데(마음만 먹었었다. 마음먹은 지 며칠 됐다. 이 고백이 남편에게 발각되지 않기를, 부디.) 부엌 일거리란 것이 마를 날이 없었다.

그런데 어떻게 내 마음을 알고 5학년 누나가 3학년 동생 공부를 봐주겠다고 하니 대견하기까지 했다.

아마 모르긴 몰라도 나보다 더 꼼꼼히 살펴보고 자세히 알려줄 것이다. 그렇게 믿었다.

딸을 충분히 그럴 아이다.


"엄마, 심각해."

"뭐가?"

"너무 많이 틀렸어."

"그래? 좀 급하게 풀었나 보다."

"어휴, 삼각형을 사각형이라고 착각하고 읽고, 여기는 단위를 안 쓰고. 어휴~"

딸의 한숨이 잦아졌다.

"에이~ 풀다 보면 그럴 수도 있는 거지 뭘. 어린이가 착각할 수도 있지. 누나는 착각 안 해?"

옆에서 누나가 푹푹 내쉬는 한숨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아들은 해맑다 못해 당당하기까지 했다.

아니, 오히려 문제 틀린 놈이 설명해 주는 사람에게 성낸다더니 꼭 그 짝이다.


"자, 이제 내 수업을 잘 들으면 마이쪼를 줄 거야. 알겠어?"

"응. 진짜로 줄 거야?"

"그래. 그러니까 집중해서 잘 듣기나 해. 알았어?"

"네, 알겠습니다!"

마이쪼 하나에 아들은 금세 고분고분 해졌다.

"어이구, 이거 글씨를 뭐라고 쓴 거야? 알아볼 수가 없잖아. 시험 볼 때도 이렇게 할 거야? 이러면 시험에서는 다 틀려. 알겠어? 집중해! 잘 봐!"

"알았어 알았어."

남매는 사뭇 진지했다.

둘이서 문제를 풀고 틀린 것을 고치고 설명하고 경청하고, 갑자기 남매만의 공개수업에 내가 참관한 기분마저 들었다.


"누나, 나 물 마시고 싶어."

"알았어. 그럼 쉬는 시간 5분 줄게. 학교에서도 수업 40분 하고 쉬는 시간이 있으니까."

시간이 좀 길어지는 듯싶더니 여지없이 아들이 몸을 배배 꼬며 인내심의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그걸 귀신같이 딸이 알아차리고 적절히 쥐었다 풀어줬다 하며 수업을 이끌어 가고 있었다.

"자, 이제 중간 보상을 하겠어. 마이쪼 하나."

"우와. 진짜 주는 거야?"

"그래. 근데 그거 먹으면서 하면 집중이 안 될 텐데? 수업 시간에 그런 거 먹으면 안 돼. 알겠어? 이따가 쉬는 시간에 먹어."

"알았어."

옆에서 보고 있자니 신통방통하기도 하고 성심성의껏 동생을 지도해 주는 딸이 대견하고 누나 말을 허투루 듣지 않고 잘 따라 주는 아들도 기특했다.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이렇게나 평화로운 저녁이라니.


"누나, 근데 한꺼번에 너무 많이 하는 거 아냐?"

"그런가?"

"그래. 너무 오래 하면 지겹고 집중도 안 되는데 오늘은 그만하는 게 어때? 적당히 하는 게 좋지. 오래 한다고 해서 다 좋은 건 아니잖아?"

"그렇지. 이것까지만 하고 그만하자."

"알았어."

"자, 잘 봐. 하던 건 해야지. 자, 집중!"

그래도 생각보다는 꽤 긴 시간 동안 남매는 진지하게 수업을 해 나갔다.


수업을 끝내고 딸은 의기양양하게 내게 와서 야무지게 말했다.

"엄마 수업은 이렇게 하는 거야. 보상도 하고 쉬는 시간도 좀 주고."

"고생했어. 우리 딸이 정말 잘하네. 피곤하겠다. 목도 아프고."

"응, 엄마 사실 가르치는 거 너무 피곤해. 힘들어."

아무렇지 않게 한 시간 가까이 정말 선생님처럼 잘 지도하더니 내심 애로점이 있었나 보다.

전혀 나는 눈치채지 못했다.

얼마나 자신감 있게, 또 재미있게 잘하던지 나까지 연필 들고 옆에 앉을 뻔했다.

"선생님들도 정말 힘들겠다. 하루 종일 말하고 가르치니까. 그치?"

"응. 정말 피곤한 하루였어."

그나저나 뉘 집 딸인지, 수업 참 잘~ 하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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