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글임자 Mar 11. 2023

직장인의 갑질, "난 당신이 제일 걱정이거든?"

직장이 없다고 그렇게 말하는 거 아니다.

23. 3. 10. 거짓말 같은데

< 사진 임자 = 글임자 >


"진짜 아무 걱정 없어 보인다."

"또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려고 그래?"

"출근도 안 하고 맨날 집에 있으니까 스트레스받을 일이 뭐가 있어? 아무 걱정도 없지."

"또 시작이야?"

"솔직히 무슨 걱정이 있어?"

"제일 큰 걱정이 하나 있지."

"일도 안 하면서 무슨 걱정이 있어?"

"난 당신이 제일 걱정거리야. 알기나 해?"


무직자 앞에서 무차별적이고도 시도 때도 없는 직장인의 갑질, 그가 범하는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 그 끝은...

증거 자료로 채택한다.


저 말을 본격적으로 듣기 시작한 것이 언제였더라?

2019년 1월에 육아휴직을 시작하고부터였구나.

"진짜 세상에서 자기가 제일 편하게 사는 사람일 거야. 부럽다 부러워. 출근도 안 하고.무슨 걱정이 있어?"

아침에 출근을 하며 종종 내게 저렇게 말하던 사람이 있었다.

얼마 전에(평소에 일 년 내내 자주 듣는 말이 되어버렸지만) 또 직장인이 무직자에게 시비(라고 느꼈다.)를 걸어왔다.

나는 얌전히 그저 독서 중이었다.

소파에 벗어놓은 옷 허물처럼 게으르게 늘어져서(정말 그렇게 보였다 내 눈에는, 그리고 그 모습이야말로 세상 걱정 없는 사람처럼도 보였다 솔직히) 다짜고짜 내게 한다는 말이 저거였다.


"얼마나 좋아? 출근도 안 하고 누가 스트레스 주는 사람도 없고. 직장 생활하면 맨날 스트레스받는데, 일 시키고 닦달하는 사람도 없으니까 세상에서 아마 자기가 제일 편하게 살 거다."

아니,

당신하고 사는 내가 세상에서 가장 힘들게 살 거다.

걸핏하면 저렇게 말하는 당신이랑 사는 것도 여간 힘든 거 아니다.

본인은 인정하고 싶지 않으시겠지만.


"밖에서는 누가 스트레스 안 줘도 집에서 누가 스트레스 많이 줘. 나라고 걱정 없는 줄 알아? 우리 집에서 제일 걱정되는 사람이 하나 있어. 애들 걱정은 안 되는데, 진짜 나는 진심으로 걱정돼. 딱 한 명이."

뭔가 단단히 착각을 하시는 것 같은데 직장 생활을 하지 않는다고 해서 다들 아무 생각 없이 편하게 사는 거 아니다.

물론 일부 정말 편하게 사는 사람도 있을 수는 있겠지. 외벌이이긴 하지만 직장 생활을 하지 않는 아내에게  주기적으로 해괴망측한 소리나 하면서 뜬금없이 공격하는 그런 사람이 아닌 남편을 둔 그런 아내 같은 경우는.(물론 그 아내들도 나름의 고충이 또 있을테고.)


말 조심하라고 그렇게 일렀건만, 애들 앞에서 걸핏하면 한다는 소리가 그 말이야?

나라고 하고 싶은 말이 없어서 안 하는 줄 아시나.

항상 옆에서 아이들이 보고, 듣고 있다는 걸 생각해야지.

대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 모르겠다.

왜 내가 나가서 돈을 벌지 않나, 그 생각뿐인 것 같다.

세상에서 제 아내가 아무 걱정도, 스트레스도 없이 편하게 산다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 그 사람이 남편이라니, 새삼 끔찍하다.

무서운 일이다.


"날마다 스트레스받아 가면서 일하느라 얼마나 힘들어? 세상에서 가장 힘들게 일하고 사는 사람이 당신이지. 나는 하는 일도 없이 집에서 세상 편하게 사는데, 다른 여자들은 직장 생활하며 돈도 잘 벌고 아이들도 잘만 키우는데 나는 직장 일도 안 하고 돈 한 푼도 안 벌어 오고 이렇게나 편하게 호강하고 사는데 정말 나는 세상 걱정도 없고 스트레스는 1도 없지. 돈도 안 버는 주제에 남편이 한 소리 해도 그저 참고 다 감수하고 살아야지, 돈도 안 버는데 내가 무슨 할 말이 있겠어?"

라고 내가 대꾸해 주길 바라기라도 한단 말인가.


4년 넘게 대꾸하고 살았으면 됐지, 하루 이틀 된 일도 아니고 지긋지긋하다.

물론 나만 지긋지긋하겠지, 내 상식으로는 전혀 이해되지 않는 저런 남편의 발언들...

대꾸할 가치도 없다고 느끼면서도 기분은 썩 유쾌하지 않다.

아마도 그 사람은 바뀌지 않을 것이다.

그래,

혼자서 돈 버는 거 억울하다고 느낄지도 모르지.

그래, 그럴 수도 있지.


그렇다고 내가 결혼했을 때부터 내내 집에서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던 것도 아니잖아?

아무리 사람 마음이 쉽게 변한다고 하지마는 맞벌이하면서 같이 대출도 갚고 애들 뒷바라지는 나 혼 자 다 하다시피 하면서 일할 때만 좋고 이젠 내가 수입이 없다고 저렇게 아무렇게나 함부로 말하는 거, 아이들 앞에서 아빠란 사람이 엄마한테 저런 식으로 말하는 걸 보고 자란 아이들은 어떨까.

어쩔 땐 돈 버는 유세 떤다고 밖에 생각되지 않는다.

그래, 돈 벌어 오시는데 유세 떠는 것쯤 봐줄 수 있다.

하지만 그것도 정도껏 해야 말이지.

나도 힘들게 직장 생활하는 거 옆에서 다 보고 안다고, 아는데 말을 꼭 그렇게 해야 할까?


결혼하고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국가직 의원면직 하겠다고 했을 때, 다시 공무원 시험 보겠다고 했을 때 수험생 신분이 된 그 사람에게 내가 단 한 번이라도

"정말 아무 걱정도 없어 보인다. 스트레스받을 일이 뭐가 있어? 나처럼 직장 생활을 하는 것도 아니고 누가 옆에서 귀찮게 하지도 않고. 정말 좋겠다. 세상에서 제일 편하게 사는 사람이 당신일 거다. 정말 부럽다 부러워."

라고 단 한 번이라도 내가 저런 정신 나간 소리를 하기라도 했었나?

아무리 생각해도 그런 말은 한 적 없는 것 같다.

했으면 사과해야 마땅하지.

사람이 할 말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말이 있는 거지, 특히 아이들 앞에서는.

몇 년 간 수 십 번도 더 넘게 말했으면 그만할 때도 되지 않았나.

하긴 내 입장에서만 지긋지긋한 거지, 남의 입장에서는 평생을 지껄여도 모자랄 수도 있겠다.

물론, 나도 이해는 한다.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런 말 한 두 번쯤은 할 수도 있다.

열 번 정도도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나도 별생각 없이 상대를 기분 나쁘게 하는 말들을 하곤 하니까.

하지만 자꾸 해 봐야 아무 이득도 없는 말을 왜 지치지도 않고 하는 걸까.

내가 아무 걱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스트레스를 안 받고 사는 것도 아니라고 분명히 수 십 번을 말했는데도 말이다.

그런 사람, 이런 사람이 그냥 살뿐이다.

직장도 안나가고 살림도 안하고 애들도 내팽개치고 아무 것도 안하고(아무 것도 안한다는 말도 한 번씩 듣기는 한다.) 돈이나 펑펑 쓰면서 놀러나 다니고 그렇게 살고 있는 것도 아닌데 내가 저런 말을 계속 들어야 하나?



속도 모르는 남들이 보기에,

남편은 아내가 일을 그만두겠다고 하니(사실 알고 보면 이기적이고 나 밖에 모른다는 말을 얼마나 내가 들었는지도 모르고) 호기롭게 그러라고, 흔쾌히 허락(?) 해 준 세상 관대하고 자상하고 고마운 대단한 사람으로(엄연한 착각이다.) 비칠지도 모르겠다마는 실체를 알고 보면 그런 것도 아니다.

나만 그 속을 알지 누가 알겠어.

그래서 남들 일은 당사자가 아니면 절대 모르는 거지.

나는 듣고 무시하면 그만이라지만, 아이들은?

아이들 교육상으로도 저런 언행은 절대 바람직해 보이지 않는다.

본인이 직장 생활하지 않는 아내를 '세상에서 가장 편하게 스트레스 안 받고 사는 사람'이라고 단정 지어도 그건 어디까지나 본인의 생각일 뿐인 것이지.

내가 어찌해 볼 수 없는 부분이다.


갑자기 정말 궁금해졌다.

다른 집 남편들도 직장 생활하지 않는 아내에게 저런 말들을 아무렇지도 않게 시도 때도 없이 퍼붓는지, 진심으로 궁금하다.

내게 죄(?)가 있다면 수입이 없다는 것, 그것뿐일 것이다.

죄라고 할 수도 없는 일이지마는 누구에게는 그것이 전부고, 가장 치명적이다.


직장인이여,

다 안다 나도.

직장생활 힘든 거 다 안다고.

고생하는 것도 다 알아.

다 알고 있어.

더럽고 아니꼽고 치사하다는 직장생활 잘 하고 있어서 고마워.

고마운 건 고마운 건데...

그때 결혼식 때

"남편은 아내가 직장생활을 할 때나 안 할 때나 엉뚱한 소리는 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질문을 하고 반드시 대답을 들었어야 했을까?

이전 11화 어머님은 차가 그냥 굴러가는 줄 아시나 봐?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