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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Feb 23. 2023

'찰떡'같이 주문한 커피, '개떡'같이 주는 커피

잘못은 누구에게 있는 걸까?

23. 2. 22. 쓴 맛 보여준 커피

< 사진 임자 = 글임자 >


"사고 날 뻔했잖아. 커피 마시다가."

"왜?"

"나한테 커피 어떻게 탈지 물어봤지?"

"응."

"내가 아까 커피 따뜻한 거라고 안 했어?"

"했어."

"근데 왜 이렇게 뜨거워? 막 들이켰다가 뜨거워서 다 내뿜었잖아. 사방에 다 튀고 옷에 다 묻고 진짜 사고 날 뻔했다고!"

나는 약간 어안이 벙벙한 채 듣고만 있었다.


"나 커피 좀 챙겨 줄래?"

"어떻게? 찬 거 따뜻한 거?"

"따뜻한 거."

"알았어."

동이 완전히 터 오기도 전에 남의 편이 아침밥을 먹으며 내게 요구했다.

어제도 멀리 출장이라 새벽부터 일어나 된장국을 끓여 아침을 준비했다.

밥을 차리고 남의 편을 깨우고, 후식까지 다 차려놓고 자잘한 부엌일을 하고 있는데 남의 편이 잠이 덜 깬 것 같다며 저렇게 요구해 온 것이다.

날씨도 쌀쌀한데 따뜻하게 끓여 줘야겠다.

아직은 추운 겨울 아침에 '따뜻한 커피 = 뜨거운 커피' 공식이 성립됐으므로(어디까지나 내 기준에서였던 것이 화근이었다.) 물을 팔팔 끓여 텀블러에 옮겨 담으며 다음 말도 잊지 않았다.

"물이 좀 많을 수 있겠는데 커피 하나 더 타야 될까?"

"아니, 하나면 돼."

"알았어. 다 했으니까 갈 때 챙겨 가. 올 때 배고프다며, 간식 좀 챙겨 놨으니까 그거랑 같이."

"응."

언제나 그렇듯 여기까지는 양호했다.


어제도 일찍 나가봐야 한다며 새벽에 꼭 깨워달라고 내게 신신당부했던 남의 편을 알람 맞춰 놓고 먼저 일어나서 서 너 차례 깨우고 조촐하게 아침상을 차리고 주문한 커피(커피가 이리 큰 화를 불러일으킬 줄이야, 진정 난 몰랐네.)와 간식까지 다 챙긴 나는 이 정도면 출근하는 남의 편을 위해 어느 정도 할 만큼은 했다고 생각하고 여유롭게 'Start English'를 메모해 가며 듣고 있었다.

물론 남의 편이

"집에 있으면서 그 정도도 안 할래? 다른 집 여자들은 일하면서도 다 하는데?"

라고 난데없이 옆집 아이와 내 아이를 비교하듯 세상엔 존재하지 않을 법한 (그런 위대한 여자가 얼마나 있을까 싶기도 한데) 그런 여자와 요리조리 뜯어가며 비교한다면 나는 더 이상의 대꾸할 의지를 잃었으리라.

종종 듣던 말이라 신선한 느낌도 없으니까.


그렇게 남의 편은 잡술 것은 다 챙겨 잡숫고 텀블러를 소중히 챙겨 집을 나섰다.

나름 생각해서 준비한 간식거리는 덩그러니 현관 입구에 쓸쓸히 남겨뒀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출발한 지 30분 정도 됐으려나?

갑자기 핸드폰에 남의 편 이름 세 글자가 떴다.

'갑자기 무슨 일이지? 도로에서 큰일이라도 났나?'

큰일이었다.

그것도 어마어마하게도 큰일 말이다.

남의 편에게는 대단히 심각하고도 중대하며 있어서는 안 되는 몹쓸 일이 있어난 것이다,라고 나는 생각했다.


요지는 '나는 따뜻한 걸 원했는데 왜 뜨거운 걸 보냈냐'라는 것이다.

'따뜻하다'라는 그 온도의 기준이 어떻게 된다는 말인가.

천천히 마시면 될 텐데 뭘 그리 급히 들이마셔놓고는 나를 탓하는 거지?

남의 편은 내게 있는 대로 화를 내고 있었다.

갑자기 당하는 나로서는 어이가 없을 정도였다.

나 때문에 옷이 다 버렸다고 했다.

나 때문에 사고가 날 뻔했다고 했다.

고로 나는 죄인이다?

이게 그리 화를 낼 일인가?

운전 중에 분해서 당장 전화를 걸어 내게 따질 만큼?

이해는 한다.

화가 날 수도 있지, 그럴 수도 있다.

사람들은 다들 다르니까.

하지만, 운전 중이니(집에 와서 말하길 휴게소에 들렀다고 했다, 커피 얼룩을 지우느라) 우선 아무리 화가 나도 운전을 조심히 하고 운전을 마친 다음에 전화를 하든지, 집에 와서 차분히 얘기해도 될 일이 아닌가?,라고 나만 생각했다.

당장 짜증이 난다고 부랴부랴 전화를 걸어 상대를 다그치고 화를 내면 그러면 기분이 좀 나아질까?

뭐, 그럴 수도 있다.

같은 상황이라도 사람들이 반응하는 방식은 저마다 다른 법이니까.

나도 그 상황이 되면 그랬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남의 편이 아니고 아내 입장이다.

누구나 자기 유리한 대로만 생각하고 싶은 이기적인 인간일 뿐이다.


"그럼 나한테 정확히 말하지 그랬어? 절대 뜨겁게 하지 말라고. 뜨거운 거 말고 따뜻하게 해 달라고. 뜨겁게 했다가는 반드시 운전하다 말고 당장 내게 전화를 걸어서 화를 내며 따질 예정이라고!"

라고 거기서 대꾸했다가는 운전하면서 부부 싸움하는 묘기를 부렸겠지 아마?

일하러 가는 사람에게 아침부터 나도 듣기 싫은 소리 하고 싶지도 않고 같이 화를 내고 싶지 않아(다짜고짜 화부터 내서 나도 기분 나빴다고 말하는 건 퇴근 후에 알려도 될 일이니까.) 알았다고, 알았다고 적당히 대꾸만 했다.

퇴근 후에 오늘의 이 불미스러운 사건에 대해 다시 토킹 어바웃 해 보자고 하면 될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도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물론 화가 날 수도 있다.

그럴 수도 있지.

그래도 아침부터 저렇게 화를 내면 본인은 얼마나 마음이 편할까?

나는 상대가 화를 내면 내는 대로(남의 편은 내가 잘못했다고 했지만, 아무리 잘못을 했다 치더라도)무조건 당하고만 있어야 할까?


그의 한껏 치뜬 양 눈썹이 내 눈앞에서 떠다니는 것 같다.

내가 이렇게까지 추궁을 당해야 하나?

마지막 끊을 땐

"앞으로 신경 좀 써."

라고 격앙된 목소리로 말했던가?

"앞으론 어느 정도 온도를 원하는지 정확히 말해!"

라고 되받아치고 싶었다.

나는 남편의 따뜻한 커피의 온도를 지키기 위해 온도계를 장만할 의향이 충분히 있노라고.

이런 걸 고급 전문 용어로 '지지리 해주고도 좋은 소리 못 듣는다.'라고 한다지 아마?

내게 죄가 있다면(요즘 들어 왜 나는 자꾸 죄를 짓고 속죄하며 회개하는가, 남의 눈에서만 죄목이 되는 것을 굳이) '찰떡같이' 말한 남의 편 말을 '개떡같이' 알아들은 죄뿐이리.

그리고 '너무 뜨겁게' 내조한 죄를 추가한다.

나무아미타불 관세음보살...아멘 아멘...

전생에 나는 아마도 따뜻한 커피를 원했는데 뜨거운 커피를 건네준 아내를 향해 온 힘을 다해 화를 냈던 남의 편이었는지도 모른다. 그 과보를 이 생에서 받는 건지도, 그것도 개떡같이...

그러나 이 일로 아침부터 기분을 망칠 필요는 없겠지?


내가 물을 100도까지 팔팔 끓였던 악업을 쌓았구나.

그리고 커피, 이 요망한 것!

따뜻하지 않고 감히 뜨거웠던 죄, 네 죄를 네가 알렸다.

보온력이 매우도 탁월했던 고품질의 텀블러는 공범인가, 그럼?

나와 커피와 텀블러의 잘못된 만남의 결과, 어제도 사바세계에서 번뇌에 시달리는 한 중생이 있었다.


* 아직도 쌀쌀한 날씨라서 금방 식어버릴 것을 생각하고 뜨거운 커피를 탔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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