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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Mar 28. 2023

이 모든 게 다 누군가의 '희생'덕분이라는데

말 한마디로 천만 냥의 빚을 지는 사람 - 비교급

23  3. 27. 다시, 시작하는구나...

< 사진 임자 = 글임자 >


"지금 이렇게 살고 있는 게 누군가의 희생 덕분이란 걸 알아야 돼!"


그의 입에서 '희생정신'이라는 말씩이나 나올 줄은 몰랐다, 아니 이미 난 언제라도 그 말을 듣게 되리라고 충분히 예감했는지도 모른다, 단군이 고조선을 세운 이래로...

'아무것도 안 한다'라고 말한 지 몇 분 지나지 않아서였다.


"솔직히 하고 싶은 대로 다 하고 살고 있잖아. 원하는 대로 다 됐잖아!"

"지금 본인이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해?"

"언제가 분명히 피눈물 흘리면서 후회할 날이 올 거야. 애들이 뭐 하고 싶다고 하는데 돈 없어서 뒷바라지 못해줄 때 그때는 일 그만둔 거 뼈저리게 후회할걸?"


세상에 하고 싶은 대로 하고 사는 사람이 있기는 한 걸까?

신이라면 모를까, 난 신도 아닌데?

피눈물 흘릴 일을 안 만들도록 해야지 확실히 일어날지 안 일어날지도 모르는 일을 마치 기정사실인 것처럼 내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붉그락 푸르락 해 가면서 얼굴을 잔뜩 구기고 말하는 이가 있었다.

물론 아이들도 서 너 발짝 떨어진 거실에서 이 모든 대화를 다 듣고 있었다.


설령, 그의 말대로 내가 제 멋대로 사는 사람이라 할지라도(결코 그것은 사실이 아니지만, 그 사람 생각일 뿐이니까 더 이상 논할 필요는 없고) 무슨 좋은 풍경이라고 굳이 아이들이 다 듣고 있는데 저렇게까지 말을 하나 싶었다.

아니야, 아니야, 최소한 이건 아니야.

같이 사는 동안은 끝없이 화수분처럼 쏟아질 비난과 미련의 말일 뿐이었다, 내 생각에는.

피눈물을 흘릴 거라는 말은 도대체 무엇을 근거로 하는 것일까?

피눈물이라니, 난데없이, 과장이 다소 심한 것은 아닌가?


그리고 아이들 뒷바라지란 것도 그렇다.

부모 형편껏 해 주면 되는 것이지 모든 것을 굳이 다 바쳐서 자식들에게 쏟아부어야 할 필요도 없다. 이건 둘이서 합의가 분명히 된 부분이다.(물론 기원전 1 만년 경에 맞벌이 시절의 합의 내용이다)

약간의 결핍이라는 것도, 상황이 여의치 않다면 아이들이 경험하고 받아들이고 그들 선에서 일정 부분 감당을 할 줄도 알고, 그럴 수도 있는 일이 아닌가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내가 일을 그만 두자 나는 '세상에서 가장 무책임하며 이기적인 엄마'로 전락해 버렸다.(그의 표현을 빌리자면 말이다.)

일을 하고 있을 때도 그랬지만 나는 자식들에게 내 전부를 다 내어줄 생각도 없고(이젠 그럴 무엇도 없게 되었지만, 맞벌이를 하더라도 내 생각은 변함없을 것이었고, 그도 어느 정도 동의했으므로) 충분히 감당할 수 있을 정도의 결핍이라면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이다.(그래서 나는 이기적이라고, 또 무책임하다는 소리를 듣는다.)


"아이를 망치는 가장 확실하고도 좋은 방법은 원하는 모든 것을 다 충족시켜 주는 것이다."

라고 누가 그랬던가?

그러나 그는 지금 이렇게 사는 내가 아이들을 망칠지도 모른다고, 오히려 역효과가 날까 걱정이라고 했다.

내가 뭘 어쨌기에?

내가 지금 망나니처럼, 개차반처럼 살고 있나?


나의 부모님도 나에게 전부를 다 쏟아부으며 오냐오냐 기르지 않으셨고(아빠는 공부하는 것까지 형편껏 뒷바라지하겠지만 성인이 된 후 나머지는 각자 알아서 살라는 말씀을 늘 하셨다. '네 인생이니까 네가 책임지고 살아라.'라는 말씀은 1+1이었다 물론. 부모님이 내 인생을 무한히 책임져 주지 않을 것이란 걸 진작에 깨닫는 눈치 정도는 내게도 일찌감치 있었다 다행히도.), 나 또한 모자라면 모자란 대로 내가 방법을 찾아보고 부딪치고 깨지고 살았으니까, 온전히 부모님께 의지하면서 힘없이 살지 않았으니까, 그런 삶도 필요하다고 느꼈지만 그는 아닌 것 같다.


"내가 너를 어떻게 키웠는데..."

라고 언젠가 시어머니가 그에게 말씀하셨다는 말을 들었다.

평소의 어머님의 성품으로 전혀 나올 법한 말씀은 아니었기에 오죽했으면 싶기도 했다.

그의 서운한 행동에 하신 말씀이라는 것은 알지만, 큰 의미 없이 하신 말씀이라는 걸 잘 알지만, 가정환경이 매우 달랐던 사람들이구나, 느꼈던 것이다.

적어도 어머님은 굉장히 아들에게 헌신적이었고 늘 최선을 다하셨다고 종종 그는 내게 입버릇처럼 얘기하곤 했다.

부부가 자라 온 환경이 다르니까 매사에 같을 수만은 없는 게 당연하구나.

어쩌면 나의 부모님도 말씀만 안 하셨다 뿐이지 마음속으로는 저런 말씀 한 번쯤 품었음직한 일일지도.

하긴, 나를 어떻게 키우셨는지는 세상 누구보다도 내가 가장 잘 알기 때문에 아무 말씀 안 하시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세상에 자식을 키우는 일에 있어서 돈이 전부인가?

물론 돈은 사람이 살아가는 데 있어서 중요하고도 없어서는 안 되는 것임에 틀림이 없다.

부인하지 않는다.

내가 일을 그만두겠다고 하면서 돈을 벌지 않아도, 대신에 다른 방식으로 아이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을 주겠다고 했다.

세상에는 분명히 돈으로 살 수 없는 많은 것들이 있으니까 말이다.

누군가에게는 허황되고도 철없는 소리처럼 들릴지도 모르지만 어쩌면 월급과 맞바꾼 무언가로 또 다른 귀한 것을 얻게 될지도 모르는 일이고, 무엇보다 사람 앞일이란 건 아무도 모르는 것인데 어쩜 그렇게 부정적으로 생각을 하는 것일까?

시간이 지난 후에, 많이 지나고, 아이들이 크고 나면, 더 나이가 들어 보면 깨닫게 되는 것이 있지 않을까?

나도 모든 일에 확신이 있고 자신이 있다는 것은 결코 아니다.

무조건 내가 옳다는 것도 아니다.

일방적으로 그를 몰아세우려는 것은 더욱 아니다.

다만 나는 부단히 나름 애쓰는 중이며(무엇보다도 저런 비난의 부정적인 말로부터 자유롭고 싶어서, 결국에는 저런 말에도 심상히 넘길 수 있을 만큼이 되고 싶어서, 어찌해 볼 수 없는 내 영역밖의 말들에 무뎌지기 위해서) 일을 그만둔 것에 대해 후회하지는 않겠다는 그 다짐을 언제까지고 지키기 위해 어떤 준비를 하며 하루하루를 사는 것이다.


물론 그의 말뜻을 이해한다.

충분히 그 입장에서는 할 법도 한 얘기다.

희생정신이라는 말을 들었을 때, 언젠가 듣게 될지도 모른다는 막연한 생각이 있었지만 막상 듣게 되니까 다만 뜨악해졌던 것이다.

경제적인 면에서 혼자 가족을 부양해야 한다는 압박감과 부담감, 그런 것들을 내가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사람이 월급만으로는 사는 게 아니잖나.

"그래도 집에 있으면서 이것도 해주고 저것도 해주고 하니까 좋다."

라고 나의 하찮은 뒷바라지에 웃음을 보이던 예의 그 사람이 이 사람이 맞나?

저것은 잃었지만, 이것은 얻었다.

직장은 놓았고 다른 것들을 거머쥐었다.

그 단순한 사실을 그도 모르지는 않을 것이다.

최소한 모든 것을 다 잃지는 않았다.(고 나는 생각해 왔다. 어쩌면 얻은 게 더 많을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도 들 때가 있다.)

이것도 잃고, 저것까지 잃지는 않았으니, 그나마 다행 아닌가.(라고 또 나만 철없이 생각하는 것이다.)

비록 받는 월급은 없으나 적어도 죽지 않고 살아서 남의 손이 아니라 친엄마가 아이들을 돌보는 것이라도 그게 어딘가, 싶은 것은 어디까지나 수입도 없는 나만의 생각이다.

하긴, 이것도 가지고 저것도 가지면 더할 나위 없겠지마는.


하지만 현실은 하나는 놓고 하나는 쥐고 있는 상황이니 그대로 받아들일 필요도 있지 않을까나.

부정해서 얻을 것이 무엇이 있으며, 그렇게 산들 우리에게 득이 될 것이 무어란 말인가.

이미 놓아 버린 것을 미련 떨며 애통해 해 봤자 지금 달라질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고 속만 상할 뿐이지.

현재 내가 쥐고 있는 것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그것이나마 잘 보전하는 것이 (어디까지나 내 생각에만?) 현실적으로 합리적인 것은 아닌가.


가만히 생각도 해보았다.

나도 맞벌이를 하면서 아이들을 키우며 살림을 하면서 단 한 번이라도 내가 '희생했다'라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었던가?

그런 생각을 할 여유조차 없었지만 직업을 가졌으니 출근을 했고 아이들을 낳았으니 키웠고, 가정이 있는 사람이니 살림을 했다.

그뿐이었다.

아마도 내가 희생하고 있다고 생각을 했더라면 너무 분하고 억울해서 다 해내지 못했을 것이다.

가족이라는 게 어차피 '공동체' 집단인데 '희생'까지 들먹인다면 그만큼 슬픈 일이 있을까.

한쪽이라도 그런 마음을 가슴에 품고 사는 것만큼 비극적인 일이 또 있을까.

계속 이런 식이라면 우리 집에서 상영하는 영화는 눈물만 질질 짜는 처량한 '새드 무비'밖에 되지 않을 것이다.

혹은 일그러진 가족상을 매일 그려내기만 할지도 모를 일이다.

서로 희생을 하기 위해, 희생을 강요하기 위해 결혼을 한 것은 아니었다, 최소한.

왜 누가 희생을 하고 희생당해야만 하느냔 말이다.

같이 하자, 같이.

각자의 위치에서, 그러면 될 텐데.

그 역할의 차이라는 것에 그는 분통을 터트리는 것인가.


그렇다면 혹시 그 사람은 지금 혼자만 힘들게 직장 생활하는 게 분하고 억울해서 내게 하는 소리일까?

충분히 이해한다.

직장인으로 살아가는 것은 결코 만만치 않다는 것쯤은 나도 잘 안다.

종종 그런 생각이 들 수도 있다.

그럴 수 있다.

하지만 가족을 상대로 '희생한다'는 마음으로 살아간다면 서글퍼지는 건 어쩔 수 없다.

솔직히 그가 희생해야 할 필요는 전혀 없으니까.

어느 결에 내가 그를 '희생자'로 만들었나?

그래,

나도 그에게 잘못한 점이 많고 실수도 하고 그의 성에 찰 때까지 뭔가를 해내지 않을 때도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솔직히 때때로 얄밉기도 하고 안쓰럽기도 하고 고맙기도 하고 미안하기도 하고, 그래도 진정 나는 그를 '고마운 사람'으로 생각하는데,

그게 나의 진심인데...(하지만 그는 내 진심마저 무시하며 나보고 알긴 뭘 아냐고 반박하기도 한다.)

이를 어쩐다?

뜻하지 않게 엉뚱한 희생자를 만들어버렸네 내가.


그래도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

그것만은 진심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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