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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글임자 Apr 23. 2023

엄마는 묶고, 아빠는 뺀다

한밤중의 치과 놀이?

2023. 4. 20.  잘 어울리는 매실 한 쌍

<사진 임자 = 글임자 >


"엄마, 나 이가 빠졌어."

"갑자기 이가 왜 빠져?"

"빠진 거 같아."

"그럼 일어나야지 왜 누워있어? 불 켜 봐"


그날은 평소보다도 훨씬 늦게 잠자리에 든 날이었다. 밤 10시 30분도 더 지난 시각, 아들이 느닷없이 이가 빠졌다고 했다.

이가 빠졌으면 그 이를 뱉어 내든지 할 일이지 가만히 누워만 있는 것이다.

아직 잠들지도 않았는데 얘가 무슨 잠꼬대를 하나 싶었다.


"너 이 흔들린 지 며칠 되지도 않았잖아? 근데 무슨 이가 벌써 빠졌다는 거야?"

"이가 거의 다 빠진 거 같아."

"그럼 빠진 게 아니라 거의 빠질 것 같다고 말했어야지. 엄만 깜짝 놀랐잖아."

조만간 닥칠 미래의 일은 미래 시제로 이야기해야 맞는 거 아닌가? 아들의 화법은 마치 이미 역사가 된 과거 시제의 그것 같았다.

과연 윗니 중에서 송곳니 옆에 있는 이가 방정맞게 덜렁거리고 있었다.

살짝만 흔들었는데도 '손 대면 톡 하고' 엇나가버리겠다는 모양새로 힘없이 대롱대롱 잇몸에 매달려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정말 거의 다 빠졌네. 조금만 잡아당겨도 금방 빠지겠다. 어떻게 할래? 지금 빼고 잘래? 아니면 내일 치과 가서 뺄래?"

나는 자녀의 의사를 최대한 존중하는 민주적인 양육방식을 고수하는(엄연히 내가 느끼기에는 말이다.) 엄마이기 때문에 그 이의 소유자인 아들의 의견을 먼저 물었다. 귀찮아서 어떻게든 최대한 버티다가 다음날 하교하면 치과에 가서 이를 뽑을 속셈은 아니었다.(라고 말은 하지만 한밤중에 이 뽑기라니 이보다 더 느닷없는 경우가 또 있을까?)

또한 나는 위생을 최우선으로 생각하는 엄마이므로(물론 코에 걸었다가 귀에 걸었다가 하느라 일관성이 없다는 점이 최대 단점이긴 하지만) 전문의의 손길로 이를 뽑은 후 소독까지 깔끔하게 마치기를 원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집에서 잘못 뽑다가 감염 위험이라도 있으면 안 되니까 말이다.


물론 남편은 말한다.

"나 어릴 땐 다 집에서 이 뽑았지 누가 얼마나 치과 가서 뽑았나? 그냥 집에서 뽑아도 되지 뭐. 별로 어려운 일도 아닌데."

라며 또 라테를 대야 가득 타는 소리 하고 계신다.

"옛날 얘기 좀 그만해. 옛날하고 지금 하고 같아? 그렇게 집에서 이 다 빼가지고 영구치가 그렇게 올록볼록 엉망으로 났다며? 집에서 막 이 뺀 거 후회스럽다며? 치과가 코앞에 있는데 이왕이면 안전하게 뽑는 게 낫지!"

라고 나는 그 라테를 다 쏟아부어버리는 대답을 한다.

집에서 이를 뺀다고 해서 영구치가 엉망으로 난다는 근거는 없다 물론. 그러나 가끔 남편은 고르지 못한 치열의 원인을 거기에서 찾는 듯했다.

이가 흔들릴 때 아이들이 치과에 가고 싶어 하면 치과를 가고 집에서 당장 빼고 싶어 하면 집에서 뺀다.

이렇게나 엄마 아빠의 주장을 공평하게 반영해 주는 아이들이라니.


"그럼 아빠 부를까?"

어둠 속에서 핸드폰 불빛에 의지해 게슴츠레한 눈으로 무언가에 집중하고 있는 우리 집 가장을 급히 소환했다.

원시적인 방법으로 이에 실을 묶어 잡아당겨서 뽑기로 합의를 보았다.

"자기가 그냥 뽑지 뭐 하러 나까지 오라고 그래?"

갑작스러운 소환에 불만 섞인 목소리로 그 가장은 투덜댔다.

"조심히 잘 뽑아야지. 한 명은 얼굴 고정시켜 주고."

2인 1조가 되어야만 하는 합당한 이유를 내가 대자 마지못해 수긍하는 듯하더니 실을 내게 넘기는 것이 아닌가?

"실은 자기가 잘 묶잖아."

엄연한 사실이므로 나는 반발할 수 없었다.

지난번에 이를 뽑을 때도 내가 실을 묶었고 그가 이를 뽑았다.

그런데 윗니라서, 게다가 위치가 이제 조금 안쪽이라 실 묶는 게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서 너 번의 시도 끝에 겨우 이를 단단히 묶고 다음 단계는 남편에게 바통 터치를 했다.

"한 번에 끝내 버려. 저번엔 몇 번이나 했잖아. 애들만 고생하고. 힘줘서 한 번에 빼!"

무사히 이에 실을 묶는 것으로 내 할 일은 다 했다고 난 깔끔하게 손을 털었다.

전적으로 남편을 믿는 것은 아니었지만. 솔직히 못 미덥긴 했지만, 이도 뽑아 본 놈이 더 잘 뽑는다고 전과가 있으니 어련히 잘하시려고.

그는 자그마치 전과 5범도 넘는다.


이번엔 단 한 번으로 이 뽑기에 성공했다.

워낙 다 빠져 있는 상태라서 한 번에 성공 못하기도 어렵다.

"봐봐. 아빠가 이 잘 뽑지?"

의기양양해진 가장은 우쭐대는 것처럼도 보였다.

"아니지. 엄마가 실을 잘 묶어서 쉽게 빠진 거지. 그냥 잡아당기기만 하면  빠지는 건데. 애들도 빼겠더라. 봐봐, 얼마나 다 빠져있었으면 피도 안 나오겠어?"

"그래도 내가 뽑기는 잘 뽑았지."

"무슨 소라? 애초에 실을 잘 못 묶었으면 빼기도 힘들었지."

태초에 이를 뽑는 사람 이전에, 이에 실을 묶는 자가 있었다.

그 사실을 간과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잠깐! 엄마는 실을 잘 묶고, 아빠는 이를 잘 빼. 그럼 됐지?"

엄마와 아빠가 서로 내가 더 잘났네, 아니 내가 더 잘 났네, 하며 유치하기 짝이 없는 우열 가르기를 하고 있는 걸 보다 못해 드디어  딸이 나섰다.

역시, 우리 딸은 솔로몬이다.

지혜로운지고~

사사로운 감정이 전혀 개입되지 않은 건조하기까지 한 판단이다.

저 기특한 딸은 또 누가 낳았는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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