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도 옛날엔 어린이였잖아. 그러니까 받아도 되는 거 아니야? 결정적으로 어린이를 두 명씩이나 낳았고."
"에이. 그런 게 어딨어?"
"어딨긴? 여기 있지. 아빠가 선물 몰래 사놓고 엄마 깜짝 놀라게 해 주려고 그러는 거 아닐까?"
다른 집 남편들은(남편이 좋아하는 다른 집 여자들 타령 나도 한 번 해보자.) 종종 아내 선물을 몰래 사서 깜짝 놀라게 해 주곤 한다는데(물론 소문으로만 들었다, 도대체 어떤 느낌일까? 경험이 전무한 나는 결코 짐작조차 할 수가 없다.) 결혼한 지 12년이 됐어도 내 심장에 무리라도 올까 봐 염려해서 그러는 건지 남편은 단 한 번도 그런 쪽으로 나를 놀라게 한 적은 없다. 갑자기 심장이 놀라서 발작을 일으키지 않도록, 내 심장 건강의 일등공신은 단연 남편이다.
"애들도 아니면서 그 얘기 좀 그만해."
남편은 몇 년째 이어져 오는 아내의 어린이날 선물 요구에 이미 넌더리가 난 것 같았다.
나 같으면 깔끔하게 한 번 선물해 줘 버리고 끝내겠구마는.
그러는 당신은, 어린이날에 내 선물 한 번 챙겨봤냐고 남편이 따지고 들면, 만에 하나 그런다면
"난 항상 무슨 일을 하든 선물을 하듯 하고 있어."
라며 눈 질끈 감고 말 같지도 않은 남세스러운 말을 할 의향도 있긴 하다. 한 번 정도는 말이다.
역시 뭐든 지나치면 안 좋은 거구나.
최근 몇 달 사이 이런저런 일들을 빌미로
"이참에 드레스 한 벌 장만해 주지 않을래?"
라며 염치도 없이 요구했던 게 문제였다.
꾹 참았다가 어린이날에 딱 한 번만 요구할걸.
"프라이팬이 이상하네. 왜 이렇게 많이 긁혔지? 내가 썼을 때는 안 그랬는데 자기가 휴직하고 식세기에 막 넣고 돌려서 그런 거 아냐? 흠이 너무 많이 생겼어. 한번 교체해야겠는데."
"난 잘 모르겠던데?"
내 눈에는 선명히도 보이는 그 긁힌 자국이 왜 남편 눈에만 안 보이는 것일까?
"내가 전에도 말했잖아. 난 실리콘으로 다 쓰니까 긁힐 일도 없는데 자긴 스텐 젓가락도 막 쓰던데? 한번 바꿔야겠네."
"그래? 그럼 이참에 싹 바꿔. 내가 그 프라이팬 하나 못 사주겠어?"
"정말? 그럼 진짜 다 갈아 치운다!"
"그래. 그런 건 다 사도 돼."
그냥 한 번 해 본 소리였는데 너무 쉽게 살림살이를 교체하게 생겼다.
물론, 갈아치우고 싶은 것은 프라이팬뿐만은 아니다.
그러나 생각만 한다.
잠자코 듣고 있던 딸이 적절한 때에 또 나서 주었다.
"그럼 어린이날 선물로 아빠가 엄마한테 프라이팬 선물해 준 걸로 치면 되겠네. 이번 어린이날엔 엄마가 프라이팬을 선물로 받는 거네."
"역시 아빠가 최고야(지금 이 순간만은), 그치, 얘들아?"
드레스는 아니었지만 부엌살림하는 내게는 드레스 한 벌보다는 프라이팬 4종이 더 요긴한 물건이긴 하다. 게다가 특별히 스텐 채반까지 덤으로 준다잖아.
나의 기쁨, 나의 고통, 나의 살림꾼.
알뜰한 사람, 이 시대 최고의 살림남, 나는 그를 추켜세우지 않을 수 없다.
입고 외출은 할 수 없을지언정 맛있는 요리는 잔뜩 해 볼 수 있겠지?
새 술은 새 부대에 담는 거라던데, 새 프라이팬으로 요리할 때 이왕이면 새 드레스를 입고 하면 더 금상첨화겠는데, 이런 푸념을 누구 앞에서 또 늘어놓았다가는 받았던 프라이팬도 단순 변심 사유로 반품해 버릴지도 몰라.
아서라.
그냥 새 프라이팬으로 또 열심히 지지고 볶고 살자.
자고로 선물은 빨리 받아 볼수록 기쁨이 배가 되는 법이다. 어린이날과 어버이날을 비롯해 각종 선물을 해야 할 것만 같은 날들이 많은 달임을 감안하여 배송 문제를 신중히 고려 해 남편의 인심의 말 한마디가 떨어지자마자 나는 프라이팬 주문을 마쳤다.
이튿날 그것들은 사뿐히 내게 왔다.
이미 내용물이 무엇인지 다 아는 선물이었으므로 내 심장은 발작 따위 일으키지 않았다, 물론.
그래도 선물이라는 이름으로 받은 그 살림살이는 나의 기분을 즐겁게 하기에 충분했다. 어른인 나도 이렇게 좋은데 어린이들은 선물을 받으면 얼마나 좋을까?
프라이팬 수취확인을 누르자마자 내년 어린이날 선물에 대해 생각해 본다.
아니지, 크리스마스가 내일모렌데, 그게 먼저구나.
한 우물만 파다 보니 이런 날도 다 오네.
새 프라이팬 4종 세트, 그것은 아내에 대한 남편의 애정인가, 본인의 무지막지한 부엌 세간살이 사용에 대한 일종의 양심 회복인가, 그도 아니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