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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프피아재 Jan 03. 2024

1. 입사 3개월 차, 선임이 갈궈 화난 사건 판결문

사건번호 2014 분노 501호 사건 속기록

"사건번호 2014 분노 501호 사건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피고 잠시 일어나 주세요."

"... 예."


머리가 새하얀 할머니는 인자한 표정과 달리, 말투는 단호했다. 그분은 여기서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었고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본 법관복을 입고 있었다. 그녀는 바로 '마음의 신, 결정의 판사'다.


"신입직원 아닌가요?"

"아... 넵..."

"근데, 분노 사건이 왜 이렇게 많아요? 분노조절 장애 있어요?

"아... 아니요..."

"아무튼 인프피아재 본인 맞으시죠?"

"... 네. 맞습니다."


입사 3개월 차, 분노 사건이 벌써 500개를 넘었다. 이렇게 소환되기가 싫어, 항상 화내지 않기로 다짐하지만 쉽지 않다. 특히, 오늘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빡친다. 진짜 그냥 넘어갈 수 없다. 어느 정도 마음을 결정했을 때, 누군가 옆에서 내 옆구리를 펜으로 푹 찔렀다. 


검은색 풀 정장에 허리까지 오는 긴 머리를 단정히 묶고, 뿔테 안경을 쓴 여자. 나이는 스무 살 초반 정도로 보였는데, 그녀는 나와 계약된 '마음 변호사'다.


"아재님, 나도 알아요. 방금 일 진짜~ 빡친다는거"

"... 하... 죄송해요. 오늘은 안될 것 같아요..."

"휴... 저도요..."


[쾅---!]


주먹으로 책상을 내려치는 소리가 '결정의 심판원'에 울려 퍼졌다. 깜짝 놀란 마음에 어깨가 들썩였다. 고개를 돌려 반대편을 보니 '분노의 검사'가 주먹 쥔 손을 책상에 올려두고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저게 분노조절 장애 아닌가 싶다.


"아니! 이딴 걸 사건으로 올리는 거! 행정력 낭비 아닙니까!?"

"분노의 검사, 진정해요."

"아니 판사님! 이건 당연히 화내야 하는 사건입니다! 개무시를 당했는데 어떻게 그걸 참고 넘어가요!?"

"진정하라니깐?"


옆에 있던 '마음 변호사'도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돌아가는 꼴을 보니, 재판 결과는 이미 정해진 듯 보였다. 


여기는 '결정의 심판원' 직장 생활하며 겪는 여러 문제에 대해 마음과 행동을 결정하는 자리다. 환상인지 꿈인지 몰라도 첫 출근을 시작으로 이런 일이 생기면 나는 이곳으로 소환됐다.  


"자. 분노의 검사 측, 공소유지 진술해 주세요."

"하아..."

"너 계속 그럴래? 빨리 해. 곧 점심시간이란 말이야."

"... 넵"


저 분노조절 장애 검사에게 판사님도 짜증이 나셨나 보다. 그녀의 으름장에 분노의 검사도 마음을 가라앉히고 말하기 시작했다.


"공소유지 진술하겠습니다. 피고인은 2014년 10월 30일 10시 50분경, 평소 후임 갈구기를 좋아하는 선임으로부터 [너 경력직이라고 하지 않았어? 근데 이것밖에 못해? 너 이러면 동기들한테 무시당해]라는 말을... 아우씨! 키보드 집어던지지 않고 뭐 했냐? 어?"

"음소거합니다?"

"아...!"


판사님의 음소거란 말에 분노의 검사는 고개를 살짝 숙이고 들며 말했다. 


"하... 무튼, 그런 사실이 있습니다. 이에, 그 선임에게 키보드를 집어던질 것을 요청드립니다."

"사적 감정 빼고, 다시 청해주세요."


"... 알겠습니다. [아니 XX 말을 왜 그따위로 하세요.]라고 말할 것을 요청드립니다."

"오케이. 변호사 해당 진술에 이의 있나요?"


나는 격하게 공감했다. 솔직한 마음으로 키보드... 아니. 마우스 정도는 집어던지고 싶지만, 그러면 회사에서 잘릴게 뻔하니 말이다. 저 정도는 충분히 말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네. 존경하는 판사님. 말씀드리겠습니다."

옆에 있던 마음 변호사는 무언갈 계속 종이에 적더니 안경을 고쳐 쓰며 말했다. 


"물론 변호사로서도 선임의 태도에 대해서 용서할 수 없습니다. 다만, "

"다만?"

"분노의 검사가 청한 [아니 XX 말을 왜 그따위로 하세요.]라는 행동에 대해서는 부동의 합니다."

"이유는?"

"... 입사한 지 3개월 됐어요... 여기서 직장생활 꼬일 순 없습니다... ㅠㅠ"

"..."


마음 변호사의 진심 어린 호소에 심판원에는 순간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기회를 놓칠세라 분노의 검사가 쏘아붙이기 시작했다. 


"폭력. 이건 엄. 연. 한. 언어적인 폭력입니다! 그냥 참고 넘어가면 똑같은 일이 반복될 거예요. 그리고!"

"그리고?"

"그렇게 참다가 한 번에 폭발하면? 변호사 당신이 이 사람 인생 책임질 거예요? 어!?"

"..."


나름 논리적인 검사의 주장에 변호사는 얼굴이 붉어지며 눈동자가 흔들렸다. 


"분노는 말이죠. 그때~그때~ 풀어 줘야 합니다. 더 큰 일을 막기 위해서라도요."

"그래도 XX이라는 욕은 좀..."

"휴... 진짜 세상 돌아가는 꼴 모르네. 이럴 때 세게 나가야 한단 말이야. 만만해 보이면 안 된다니깐?"

"그래도..."


이후에도 몇 분간 분노의 검사의 폭풍 같은 러시가 이어졌다. 너무나 일방적인 흐름에 변호사가 항변할 타이밍은 도무지 안보였다. 가만히 듣고 있던 결정의 판사님은 오른손을 들어 두어 번 흔들며 말했다. 


"휴. 그쯤 하고. 마음 변호사는 피고가 어떻게 해야 된다고 보나요?"

"네. 말씀드리겠습니다. 물론 저도 화가 납니다. 모니터라도 집어던지고 싶어요. 하지만."

"하지만?"

"분노라는 감정이 나쁘다는 게 아닙니다. 그걸 어떻게 표현하냐가 중요하죠."

"흠..."


심드렁한 표정을 짓고 있는 분노의 검사와 달리, 결정의 판사님은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오늘 욕한다면 비슷한 일이 있을 때마다 욕하고 싶을 겁니다. 그러다가 진짜 키보드를 던질 수도 있겠죠."

"그래서요?"

"그렇게 된다면, 피고의 직장생활은 물론 개인적인 삶에서도 똑같은 행동 패턴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건 분노라는 감정으로 인생을 망쳐가는 길이라고 봅니다."

"일리가 있네요. 하지만, 저 감정 풀어내지 않으면, 더 큰일이 일어날 수 있는데요?"


판사님의 물음에 변호사는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리고 분노의 검사와 나를 번갈아 쳐다보더니 말했다.


"맞습니다. 그래서 마음을 담은 편지를 써보는 건 어떨까 합니다."

"하하하카카캌카캌... 편지??"

"큽"


반대편에 있던 분노의 검사가 큰 소리로 웃어댔고 나도 헛웃음이 났다. 그러니 옆에 있던 변호사가 작은 목소리로 내게 말했다. 


"아 쫌! 들어봐요...!"

"어... 네..."


결정의 판사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갸웃하더니 팔짱을 끼며 변호사에게 물었다. 


"편지를 쓰다니? 정확히 어떤 거죠?"

"저 선임이 지랄 맞은 거 여기 계신 분들 뿐만 아니라, 아재님의 동료들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네. 그래서요?"

"다른 직원들도 극혐 하는 그런 사람이죠."


결정의 판사는 앞에 놓인 서류를 몇 장 넘기더니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어... 그런 것 같네요."

"딱하죠. 불쌍하고요. 아무도 진심으로 자신을 대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을 겁니다."


마음 변호사는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들고 있던 펜을 흔들며 자신의 주장을 이어갔다. 


"그래서. 진심을 전해 보는 겁니다. 충고는 고맙다. 하지만 내 마음은 화도 나고 속상했다. 그래도 날 위해서 하는 말이라는 것 이해한다. 대리님의 따듯하신 면을 더 자주보고 싶다. 앞으로 잘해보겠다. 이런 식으로 글로써 표현하면 좋을 것 같습니다."

"오?"


마음 변호사의 이야기에 판사님은 작은 소리를 내며 감탄했다. 하지만 이를 보던 분노의 검사는 큰 소리로 탄식하며 말했다.


"하~ 답답하네! 그러면 호구로 본다니깐!?"

"누군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뭐!?"

"내가 나를 어떻게 보느냐가 중요하죠. 호구? 스스로 인정하지 않으면 아닌 겁니다."

"하... 소설 쓰네. 편지 썼다 쳐. 또 그러면 어떻게 할 건데?"


분노의 검사 물음에 마음 변호사는 갑자기 고개를 푹 숙이며 말했다.


"뭐... 그땐... 모니터를 던져 버리는 것도..."

"하하하하하하컄캬컄"


마음 변호사의 뜬금없는 멘트에 나 그리고 결정의 판사님, 분노의 검사는 모두 웃음이 터졌다. 판사님은 손으로 마른세수를 하더니 웃음을 그치고 내게 물었다. 


"자. 결정에 들어가기 앞서서, 피고는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없나요?"

"사실은... 그런 말을 듣고 너무 화가 나서 소리라도 지를까 했습니다. 하지만 이렇게 잠깐, 시간을 가지니 한결 마음이 편해지네요. 제가 화를 내면 똑같은 사람이 되는 거니, 그와 다르게 지혜롭게 행동하고 싶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잠시 휴정하고 판결하겠습니다."






판결하겠습니다. 

주문, 피고 인프피아재는 선임에게 글로써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표현해 봅니다. 


분노라는 감정이 나쁜 게 아닙니다. 인생에서 무언가 이루기 위한 원동력이나 동기가 될 수도 있죠. 하지만, 폭력적인 언행으로 이를 표현하기 시작한다면, 이는 반복되어 피고 개인의 삶이나 주변 사람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이 분명합니다.  


한편, 이러한 감정을 해소하지 않고 마음에 계속 쌓아 둔다면 극단적인 행동으로 나타날 가능성이 있습니다. 때문에 사회적으로 용인될 수 있거나 지혜로운 방법으로 이를 표현하고 해소하는 게 필요합니다. 


상대방의 무례한 언행으로 피고가 느꼈을 분노와 슬픔에 공감합니다. 하지만 똑같은 태도로 되돌려 주는 것이 궁극적으로 피고의 삶에 도움이 된다고 보기 어렵습니다. 피고의 따듯한 태도가 상대방을 변화시킬 수 있는 계기가 되었으면 합니다. 






누가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글씨를 못써, 손으로 편지를 쓰는 것은 힘들었다. 그래서 나는 사내 메신저로 내 진심과 바람을 담아 선임에게 보냈고, 점심시간에 별다방에서 구입한 커피 쿠폰을 자리에 올려뒀다. 어떤 반응이 나올지도 궁금했지만, 이렇게 하니 무엇보다 내 마음이 편했다. 잠시 후 메신저로 답장이 왔다. 


[아재님. 아까는 미안했어... 아무리 화나도 그렇게 행동하면 안 되는데... 이렇게 말해주니 느끼는 게 정말 많다. 커피 고마워. 담배나 한 대 피우러 나갔다 오자.]






안녕하세요. 여러분? 저는 '마음의 신, 결정의 판사'입니다. 

직장 생활하며 다른 사람의 말이나 태도로 상처받고 화나는 경우 많으시죠? 이해합니다. 사람은 각자 입장에서 생각하고 행동하니깐요. 그럼에도 언제나 견디고 참아내는 여러분이 대단합니다. 


다만, 세상에는 [직장 내 괴롭힘 금지법]이 있답니다. 법에서 규정한 금지행위가 일어나는 경우에는 신고하고 처벌할 수 있습니다. 그러니 혼자 너무 끙끙 앓지 마세요. 폭력은 무슨 일이 있더라도 정당화될 수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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