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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인프피아재 Jan 10. 2024

2. 입사 1년 차, 거짓으로 일을 미룬 사건 판결문

사건번호 2015 원칙 54호 사건 속기록

사건번호 2015 원칙 54호 사건 재판을 시작하겠습니다. 피고 잠시 일어나 주세요. 


작년에 통나무로 된 펜션에 갔다. 그곳 침대에 누웠더니 은은한 나무향이 콧속으로 들어와 마음이 편안했다. 여기도 그랬다. 천장과 벽은 모두 통나무로 되어 있었고 가운데 정면에는 금색으로 결정이라는 글자가 새겨져 있었다. 물론, 올 때마다 마음은 편치 않다. 


이곳으로 소환돼도 눈꺼풀이 스스륵 감긴다. 그럴만하다. 오늘까지 2주일. 2주일 내내 저녁 12시까지 야근했으니 말이다. 내일까지 제출할 보고서가 있는데, 이거 그다지 중요한 게 아니다. 이해심 많은 우리 팀장님에게 기한이 이틀 뒤인지 알았다고 하면 그냥 넘어갈 것 같았다. 그리고 그 순간, 나는 여기, 결정의 심판원으로 소환됐다.


아무튼, 여기에서도 피곤하다. 입을 쩍 벌려지며 하품이 나왔고 손으로 눈을 비벼댔다. 그때, '마음의 신 결정의 판사님'이 말했다. 


"아재님? 이 상황에서 졸려요?"

"아... 아닙니다."


결정의 판사님은 앞에 있는 서류를 손으로 2~3장 넘기며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지금 근무한 지 1년 정도 됐네요?"

"아... 네..."

"근데, 벌써부터 일을 미뤄요? 거기에 거짓말도 하려고 하네요?"

"아... 아니... 그게..."


그때 반대편 검사석에서 또렷하고 중후하며 스마트한 남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맞습니다. 존경하는 판사님."


머리는 포마드를 발라 정확히 이대팔 머리를 하고, 금테 안경을 쓴 남자. 그는 결정의 심판원에서 승소 90%를 자랑하는 원칙의 검사다. 잠깐 나와 눈이 마주쳤는데 오른쪽 입술을 올리며 썩소를 짓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내 옆을 봤다. 마음 변호사도 똑같이 썩소를 짓고 있었는데 원칙의 검사와 다른 해탈한 모습이었다.


"헤헤... 아재님... 그러게 왜 구라를..."

"... 하아."


나와 그녀는 고개를 푹하고 숙였다. 도무지 마땅한 변명이 떠오르지 않았는데, 판사님은 말을 이어갔다.


"아무튼 절차는 절차니깐요? 원칙의 검사 공소유지 진술해 주세요."

"네, 판사님 공소유지 진술하겠습니다."


원칙의 검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책상에 있던 서류를 정리해 들고,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공소유지 진술하겠습니다. 피고인은 2015년 9월 8일 21시 50분경, 내일까지 제출해야 하는 보고서 작성을 아직 시작도 못했습니다. 한데, 피고는 금일 작성할 생각은 하지 않고 제출일을 잘 못 알았다는 핑계를 대며 퇴근하려 하고 있습니다. 특히, 피고의 직속상관인 팀장의 평소 너그러운 성격을 이용해 기망하려 하고 있습니다. 


낱낱이 까발려지는 내 속 마음. 땀 방울이 등에서 흐르는 게 느껴졌다. 옆에 있던 마음 변호사도 눈을 감고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한숨이 절로 났다. 원칙의 검사는 서류를 책상에 내려두고 다시 말하기 시작했다. 


"존경하는 판사님. 피고의 일을 미루는 태도도 원칙에 어긋나는 행동이지만, 그것보다 더 경악스러운 것은 누군가의 선한 태도를 악용하려는 피고의 악한 마음입니다. 이러한 모습은 직장생활뿐만 아니라 나아가 피고 스스로의 인생에도 반드시 부정적인 영향을 줄 것입니다. 이에, 밤을 새더라도 보고서를 다 작성하고 퇴근할 수 있도록 결정해 주시길 바랍니다."


[짝짝짝-]


갑자기 박수 소리가 들렸다. 어디서? 바로 내 옆에서. 마음 변호사는 싱글벙글 웃으며 손뼉 치고 있었다. 이런 일방적인 상황에서도 내 마음을 변호하는 게 계약사항인데, 박수라니... 황당한 마음에 그녀를 째려봤다.  


"아니...~ 검사님이 말씀을 너무 잘하셔서요~"

"하..."


결정의 판사님도 양쪽 입꼬리가 살며시 올라갔고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서류를 몇 장 넘기며 우리에게 물었다. 


"피고인 그리고 변호사 해당 사항에 의견 있습니까?"

"..."

"..."


판사님의 물음에 우리는 꿀 먹은 병아리가 되었고, 잠시 새벽처럼 고요함이 수초 간 지나갔다. 


"할. 말. 없. 으. 시. 죠?, 그럼 결정하겠습니다?"


이대로 가다간 나는 오늘도 야근, 아니 밤을 새워서라도 보고서를 써야 할 판이다. 물론, 해야 할 일이 중요하지만 솔직히 오늘은 자신이 없었다. 나는 변호사. 그녀만 들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아니... 어떡해요. 저 진짜 오늘은 안돼... 아니 못해요."

"..."


내 애처로운 넋두리에 마음 변호사는 입술을 질끈 깨물었다. 그리곤 갑자기 자리에서 일어났다. 


"존경하는 판사님. 잠시, 휴정... 휴정을 요청드립니다!!"

"음? 휴정이요?"

"네, 피고인과 잠시 논의할 시간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뭐, 그건 권리니깐요. 시간이 얼마나 필요하죠?"


마음 변호사는 자신의 손목에 차고 있던 스마트 워치를 보며 말했다. 


"네, 판사님 20분 정도면 충분할 것 같습니다."

"알겠습니다. 잠시, 휴정하겠습니다."


나와 변호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피고석 뒤에 있는 작은 상담실로 향했다. 문을 열어보니 빛한 줌 들어오지 않아 아주 어두웠다. 가운데 책상 하나에 의자 2개만 덩그러니 놓여 있었는데, 다행히 책상 위에 손바닥만 한 탁상 조명이 하나 있었다. 


"진실의 방인가요...?"

"휴. 우선 시간을 좀 벌었네요."


마음 변호사는 자신의 머리끈을 풀더니, 손으로 머리를 벅벅 긁으며 한숨을 쉬며 말했다. 


"아. 그래요. 그럴 수 있지 뭐? 근데, 도대체 왜 그러신 거예요?"

"미룬 거요? 아님... 거짓말?"

"휴... 둘 다요."


마음 변호사는 책상에 메모지를 턱 하고 올리며 펜을 꺼내 내 메모할 준비를 했다. 아까와 다르게 결의에 찬 표정이 보여 조금은 안심됐다. 


"변호사님... 저 이번주 내내, 12시에 퇴근했어요..."

"평가 기간이셨죠?"

'네, 맞아요..."


평소에도 일이 많아 야근을 자주 했지만 특히, 최근 2주는 기관 평가로 밤낮없이 일했다. 악용, 악한 마음, 기만... 갑자기 원칙의 검사의 날 선 말들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억울하고 서글픈 마음이 들어 나는 그녀에게 항변했다. 


"진짜... 요즘 너무 힘들어요. 아니 회사가 집인지, 집이 회사인지 구분이 안 돼요. 오늘은 출근해서 책상에 앉았는데 갑자기 심장이 두근거리고 저릿했다니깐요? 진짜 이러다가 죽으면 어떡해요... 하아."


마음 변호사는 끈으로 다시 머리를 단정히 묶었다. 그리고 들고 있던 펜을 손으로 돌리며 내게 말했다. 


"흠... 알고 있어요. 근데, 일을 미루는 거야 그럴 수 있다고 쳐요. 하지만 거짓말은 선 넘긴 했어요."

"..."

"왜 그랬어요? 그냥, 솔직하게 말하지~!"

"그러게요... 팀장님이 워낙 좋으신 분이라... 오늘까지 꼭 하고 싶었어요. 그래서 계속 고민하고 있었는데, 오늘 일찍 퇴근하셔서..."

"타이밍을 놓쳤다. 이거죠?"

"어...! 맞아요..."


물론, 솔직히 이해심 많은 팀장님의 성품을 이용하려는 마음도 조금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그런 팀장님을 실망시키고 싶지 않은 마음이 더 큰 게 사실이었다. 


"자~ 그럼. 오늘 밤을 새운다 하더라도, 보고서 다 쓸 수 있으세요?"

"하... 아니요. 안 돼요. 새벽 내내 그만두고 싶다고 생각하다 아침에 바로 때려치울 것 같아요. 진심으로."


마음 변호사는 책상 옆에 올려 둔 서류 더미에서 무언가 찾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중, 몇 장을 손으로 뽑으며 혼잣말하기 시작했다. 


"이번주... 지난주... 지지난주... 일정... 그리고... 업무"


[띠리리- 띠리리-]


그녀가 손목에 차고 있던 스마트 워치에서 요란한 알람 소리가 났다. 아마도 20분의 휴정시간이 끝난 것 같았다. 변호사는 책상 위에 있던 서류를 정리해 자리에서 일어나며 말했다. 


"아재님, 오늘은 이기기 힘들어요. 하지만!"

"하지만...?"

"집에는 갈 수 있게 해 드릴게요."

"헐. 정말요?"


그녀는 자신이 쓰고 있던 뿔테 안경을 만지며 미소 지었다. 우리는 상담실을 나와 다시, 결정의 심판원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원칙의 검사와 결정의 판사님도 각각 자신의 자리로 돌아갔다. 


"휴정을 끝내고 재판을 속행하겠습니다. 피고인 측, 의견 있나요?"


의견이 있냐는 판사님의 물음에 마음 변호사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반대편에 있던 원칙의 검사는 그 모습을 보더니 팔짱을 끼고 매서운 눈빛으로 우릴 쳐다봤다. 


"네, 말씀드리겠습니다. 검사 측이 주장하는 공소유지 사실에 동의합니다. 하지만 최근 피고인이 겪은 특수한 사정에 대한 고려가 필요합니다."

"특별한 사정이요?"

"그렇습니다. 피고는 분명히 부족한 면이 있지만, 지금껏 성실하고 책임감 있는 모습으로 업무를 처리해 왔습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잦은 야근으로 심신이 매우 지친 상태입니다."


가만히 우리 이야기를 듣던 원칙의 검사가 오른손을 들며 말했다. 


"이의 있습니다. 심신이 지쳤다 하더라도 기한을 지키는 것이 일하는 사람의 책무입니다. 피곤하고 힘들다고 정해진 기한을 지키지 않는다면 어느 누가 지킵니까?"

"맞습니다. 기한? 중요합니다. 지켜야죠. 하지만 사람의 정신력과 체력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래도 지켜야죠? 일은 일이니깐요."


원칙의 검사의 대쪽 같은 태도에 마음 변호사도 물러서지 않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니깐요. 그 일을 사람이 합니다! 그리고 최소한의 기본적인 환경은 조성돼야 합니다."


그녀는 서류 두장을 들며 결정의 판사님에게 말했다. 


"판사님, 이건 최근 2주 동안의 피고의 업무일지이며, 퇴근시간이 평균 23시로 확인됩니다."

"어... 네, 그렇죠? 최근에 바쁘긴 바빴으니깐요."

"네 맞습니다. 누가 보더라도 심신이 지칠 수밖에 없는 상황입니다. 다들 아시겠지만, 오늘 아침에는 심장 부근이 저릿하고 두근거리는 이상징후도 포착됐고요."


언제나 잘하고 싶었다. 그리고 누군가 실망시키지 않고 싶었다. 그렇기에 노력하고 애썼지만, 내 몸과 마음은 분명한 한계가 있었다. 마음 변호사는 피고인 석 앞으로 나오며 말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거짓으로 해야 할 일을 회피하는 모습은 비난받아 마땅합니다. 다만, 본래 피고가 무책임하고 불성실한 태도를 보인 것은 아닙니다. 그 증거로 최근 2주 동안의 업무일정 그리고 기안서와 보고서를 증거물로 제출합니다."

"좋습니다. 증거물 채택하겠습니다."


이때, 반대편에 있던 원칙의 검사가 펜으로 그녀를 가리키며 말했다. 


"아무리 그래도. 거짓말을 용서할 수 없습니다. 그건 변호인도 마찬가지 아닌가요?"


순간, 마음 한편이 뜨끔했다. 그리고 변호사도 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맞습니다. 피고 나름대로 변명을 하지만... 정말... 찌질한 행동이죠. 하지만."

"하지만?"

"본래 속 마음을 참작해 주시길 바랍니다. 피고는 평소 인품 좋은 팀장님을 존경했습니다. 그래서 그를 실망시키지 않으려 고민하던 와중에 팀장님 퇴근했죠. 분명, 늦게까지 같이 있었다면 솔직히 말했을 겁니다."


맞는 말이다. 팀장님이 늦게까지 함께 있었다면 내일까지 못하겠다고 솔직히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 같았다. 결정의 심판원에 잠시 침묵이 흘렀다. 그리고 잠시 후, 결정의 판사님은 마음 변호사에게 물었다. 


"그럼, 변호인은 어떻게 하길 원하나요?"


판사님의 물음에 마음 변호사는 반대편에 있는 검사석과 나를 번갈아 가며 말했다. 


"퇴근시켜 주세요. 그리고 내일 팀장님에게 솔직히 말하겠습니다. 너무 힘들어서 못했다고요."


원칙의 검사는 이 말을 듣고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원칙에 어긋나는 일이에요. 안됩니다 그건."

"원칙의 검사님, 피고가 오늘 밤을 새더라도 보고서 못 끝냅니다. 피고가 번아웃으로 회사를 때려치우길 바라시나요?"

"아니, 그게 아니라..."


[땅. 땅. 땅.]


조용히 하란 의미로 판사님은 의사봉을 두드렸다. 그녀는 변호사가 제출한 서류를 보더니 나에게 물었다. 


"피고. 보고서 오늘 끝낼 수 있어요?"

"죄송합니다... 오늘은 진짜 못하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잠시 휴정하고 판결하겠습니다."






판결하겠습니다.

주문, 피고 인프피아재는 즉시 퇴근합니다. 다만, 익일 출근하여 팀장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그에 따른 대책도 강구합니다. 


회사에서 업무를 진행하며 기한을 지키는 것은 중요합니다. 특히, 상관에게 거짓으로 보고하며 기망하는 행위는 용서받을 수 없는 행동입니다. 하지만 최근 잦은 야근으로 인해 피고의 심신은 상당히 지쳐있는 상태로서 피고 스스로가 정당하고 올바른 결정을 하기에는 분명한 한계가 있었습니다. 


또한, 과거 피고의 회사생활 이력을 볼 때, 무책임하거나 불성실한 태도가 반복되었다고 보긴 어려워 추가적인 조치는 필요치 않습니다. 오히려 바로 퇴근하여 지친 심신을 회복하고, 보고서 기한을 지키지 못한 경위에 대해 팀장에게 솔직히 이야기함으로써 얻게 되는 이득이 추후, 사회생활에 있어서 도움이 될 것으로 보입니다. 


결국 원칙은 사람이 지키는 것입니다. 이를 위해 자신의 감정, 생각, 체력을 관리하는 것은 사회생활에서 필수입니다. 오늘 일 하나가 회사생활의 전부가 아님을 기억하시고, 번아웃 되지 않도록 개인적인 노력도 함께 해 주시길 바랍니다. 





평소보다 10분 더 일찍 출근했다. 회사에 도착하니 팀장님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나는 가방을 내려두지도 않고 바로 팀장님 자리로 달려갔다. 


"팀장님... 안녕하세요."

"어~ 아재님, 어제도 늦게까지 야근했어요?"

"아. 아닙니다. 근데... 오늘까지 제출해야 할 보고서요... 어제 너무 힘들어서 작성하지 못했어요. 죄송합니다..."

"아. 그래요? 힘든 게 당연하지 몇 주 동안 야근했잖아... 솔직히 말해줘서 너무 고마워. 그거 내일까지 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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