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침에 개를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공원 중간쯤에서 검은 개를 데리고 산책하는 남자를 마주쳤다.
"개 이름이 모네지요?" 갑자기 그가 물었다.
낯선 이가 우리 집 개의 이름을 알고 있어서 화들짝 놀랐다. 나는 때때로 사람의 얼굴은 잘 기억하지 못했지만 개만큼은 곧잘 알아봤으므로 서둘러 그의 개를 살펴봤다. 검은 빛깔의 털과 길쭉한 다리를 가진 개는 산책 중에 멀찍이서 두어 번 본 기억이 났다. 하지만 아무리 되짚어봐도 남자와 대화를 나눈 순간만큼은 떠오르지 않았다.
"오, 우리 개 이름을 알고 있군요?"
"네, 프랑스 화가 이름과 같잖아요."
남자는 이름의 출처까지 알고 있었다. 이렇게 상세히 내 개에 대해 기억하고 있는 사람을 마치 처음 본 마냥 대했으니 그의 마음을 상하게 하지는 않았을까 염려가 들었다.
"아마도 언니를 만난 모양이군요. 가끔 언니가 개를 산책시키기도 하거든요."
"아뇨. 난 그쪽을 만났어요. 개 이름은 당신이 알려준 거예요."
나는 더 민망해지고 말았다. 미안하다고, 원래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한다고 둘러대고 싶었지만 검은 개가 그를 끌고 다른 방향으로 달려가 버리는 바람에 어영부영 멀어지게 되었다. 다음번에 그를 또 만나게 된다면 어떻게 대처해야 하나 잠시 고민에 빠진다. 이 일을 다시 끄집어내 이런저런 변명을 해야 할지 아니면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굴어야 할지, 다음번엔 그의 개 이름을 물어봐야 할지, 그래서 앞으로 그를 마주칠 때마다 그쪽이 내 개 이름을 기억해 준 것처럼 나도 당신의 개 이름을 기억하고 있음을 내비쳐야 할지,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복잡해진다. 이쯤 되면 차라리 그를 다시 마주치지 않기를 소망하게 된다.
스몰톡 문화가 나 같은 사람에게는 약간 폭력적으로까지 느껴진다면 과장일까? 그런데 나는 그렇게 느낀다. 정말이지 나는 이 문화가 괴롭다. 낯선 사람과 대화를 나누기란 언제나 불편하고 쑥스럽다.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까지 일일이 신경 써야 하는 상황이 피곤하다. 내성적인 성격 탓도 있지만 유려하지 않은 영어 실력이 한몫 더한다. 나는 영어로 말하는 나 자신이 싫다. 부정확하고 불분명하게 어버버거리는 게 꼭 바보가 된 것만 같다.
이 나라에서 스몰톡은 필수다. 가게 점원, 식당 종업원, 아파트 엘리베이터에서 마주치는 이웃은 물론이고 하다못해 길 가다 스쳐 지나가는 사람과 눈이라도 마주치면 최소한 굿모닝 정도의 인사말을 건네야 한다. 사실 굿모닝은 순한 맛에 불과하다. 한 공간에 단 일분이라도 함께 있게 된다면 짧게라도 대화를 나눠야 한다. 대개는 날씨를 논하고 그날의 기분에 대해 묻고 상대방의 옷이나 헤어스타일을 칭찬한다. 상대에게 아이나 개가 있다면 그들이 얼마나 귀엽고 사랑스러운지 반드시 언급해 주어야 한다. 그게 싫어서 애써 딴 곳을 쳐다보며 침묵 속에 서 있으면 어떤 사람은 나를 별나고 예의 없는 사람으로 쳐다볼 테고, 몇몇은 대화를 한사코 거부하는 시그널을 완전히 무시한 채 끝내 말을 걸어온다. 후자의 경우라 할지라도 그들을 욕할 수는 없다. 어쨌거나 어색한 침묵을 깨고 먼저 말을 거는 노력을 상대 쪽에서 해준 것이고 이런 사람일수록 친절할 확률이 훨씬 높다. 그들의 입장에서는 사회성 부족한 괴짜에게조차 관심과 온정의 손길을 뻗는 셈이기 때문이다. 이 지점은 내 마음을 더욱 불편하게 만든다.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다는 시그널을 보낸 직전의 행동에 대한 죄책감이 밀려들어온다. 서둘러 가식적인 미소를 장착하고 혹시나 영어를 못 알아들어 뻘쭘한 상황이 발생하지 않도록 온 신경을 곤두세운 채 귀를 기울인다. 하나도 궁금하지 않은 상대방의 이야기에 적당히 반응을 해주면서 다른 한편으론 사소하지만 대화를 이어나가기 좋은 질문거리를 열심히 찾는다. 마침내 엘리베이터나 버스가 도착하거나 계산할 순서가 되어 대화를 종료할 수 있게 되면 그제야 한시름 놓는다.
개를 데리고 하는 산책이야 말로 스몰톡의 정점에 있다고 할 수 있다. 개를 키우는 사람에게 산책은 선택의 문제가 아니다. 최소 두 번 이상의 산책이 비슷한 장소와 비슷한 시간대에 매일 반복되며 그 말인즉슨 피하기 어려운 강도 높은 스몰톡과 하루 두 번 이상 맞닥뜨리게 된다는 뜻이다
비록 말 못 하는 짐승인 개일지라도 나름의 사회생활이 존재한다. 산책 중 다른 개와 마주친다면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서는 그냥 스쳐 지나갈 수 없다. 잠시라도 멈춰서 서로를 탐색할 수 있게 해 줘야 한다. 공원을 걷다 보면 네다섯 마리의 개들이 한데 모여 뛰어노는 광경을 자주 마주한다. 그 주변을 견주 여럿이 빙 둘러싸고 있다. 아이들이 놀 때 부모가 지켜보고 기다리는 것과 꼭 같다. 그 사이 견주들 사이에서는 끊임없이 대화가 오간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자신의 개와 잘 놀고 있는 상대 개의 주인을 투명인간 취급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누군가와 같은 장소에서 같은 곳을 바라보며 멀뚱히 서 있기도 어색하기 때문이다. 나는 매번 그 무리에 동참하고 싶지 않아 멀찍이 다른 길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다. 하지만 결정은 순전히 내 개에게 달려 있었다. 왕처럼 군림하는 늙은 개는 변덕이 심하여 어떤 때는 다른 개가 다가오더라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제 갈길을 가거나 놀자고 달려드는 개를 향해 오지 말라고 성질을 부릴 때도 있지만 어떤 때는 개와 사람이 몰려있는 무리를 보자마자 일말의 망설임 없이 돌진하기도 한다. 나는 그저 개의 처분에 따를 수밖에 없다. 애초에 개의 부탁을 단박에 거절할 수 있는 기백도 없을뿐더러 개의 의사를 묵살한 채 다른 방향으로 질질 끌고 가는 모질고 냉정한 일만큼은 할 수 없다. 비록 사회성 부족한 모지리로 살고 있다 할지라도 개에게까지 같은 생활방식을 강요할 생각도 없다. 따라서 나는 순전히 개를 위해 그 어색하고 불편한 순간을 감수한다. 이 경우, 대화 시간도 기하급수적으로 길어진다. 일단 십오 분 이상이 넘어가면 그 대화는 실상 스몰톡이라 할 수도 없는 것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대화 소재를 어쨌거나 서로의 '개'에 국한시킬 수 있다는 점이다. 대화를 수분 간 이어가다 보면 이 이상 더 자세히 알 수 없을 정도로 상대 개의 신상과 취향과 성격에 대해 알게 된다. 소개팅에서 만난 상대도 이 정도까지 자세히 알아낼 수는 없을 것이다. 소개팅 상대라면 억울하지도 않지 그 대상이 앞으로 다시 마주칠 수 있을지 기약조차 할 수 없는 낯선 타인의 개라는 사실을 인식할 때면 일종의 현타가 온다. 나는 다만 한시라도 빨리 개가 흥미를 잃고 그만 돌아가자는 신호를 보내오기만을 기다릴 뿐이다.
낯선 이에게 인사를 건네거나 눈을 마주치는 일을 오히려 이상하게 여기는 한국의 문화는 아마도 이곳 사람들 눈에는 정이라고는 전혀 없고 쌀쌀맞게 느껴질 수 있겠으나 나 같은 인간에게는 차라리 다행인 문화임을 새삼 깨닫는다.
시각을 달리해보자. 스몰톡을 즐기는 사람, 그러니까 낯선 이에게 말을 거는 게 그다지 어렵지 않은 사람으로 태어났다면 내 인생은 백팔십도 달랐을 것이다. 새로운 사람을 사귀기에 이만큼 쉽고 간편한 문화가 없다. 낯선 타지에서 동네 친구 여러 명은 만들었겠지, 영어 실력은 지금보다 몇 배는 늘었을 거야, 연애도 백번은 했겠다, 열거하자면 끝이 없다. 어쩌면 나는 수많은 인연과 기회를 놓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채로운 삶을 살 수 있는 기회를 스스로 져버리며 살아오고 있는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을 하면 씁쓸해진다. 사실이 그렇다 할지라도 어찌 해볼 도리는 없다. 나는 그저 이런 인간으로 태어나 버린 것이고 타고난 성향은 노력한다고 간단하게 바꿀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이곳에 산지 어언 십 년이 넘어가고 매일 같은 상황에 놓이면서도 나는 별반 달라진 게 없다. 집을 나서다가도 복도에서 인기척이 들리면 소리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현관 앞에서 기다렸다 나간다. 엘리베이터 앞에 누군가 기다리고 있으면 짧은 인사만 건넨 뒤 비상계단 쪽으로 걸음을 옮긴다. 계산대 앞에 줄을 서있을 때면 짐짓 바쁜 척 스마트 폰에 고개를 처 박고 있으며 개를 데리고 산책할 때 종종 집에서 훨씬 먼 인적이 드문 공원으로 발길을 돌린다. 여전히 동네 친구는 없고 연애로 발전할 만한 가슴 두근거리는 인연 또한 전무하며 영어실력은 제자리다. 인생에서 수많은 기회를 놓치고 있는지도 몰라,라는 자조 섞인 푸념도 정기적으로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