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화받기는 언제나 자신 없었다. 익숙해지면 전화만큼 편한 게 없기도 하지만 우선 상대가 하는 말을 100% 이해한 적은 없다. 보통 1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두뇌를 풀가동 시켜야 한다. 말귀가 어두워 남들보다 곱절은 고생한다. 군대에서도, 사회에서도, 그리고 이곳 일본에서도 전화는 두려운 존재였다.
일본어 말문 트기 최후의 수단으로 전화를 선택한 것은 달리 잡을 끈이 없었기 때문이다. 현지가 아니라면 쉽게 경험하기 어렵다. 회사 일과 관련 된다면 업무시간에도 할 수 있다. 전화비를 내지 않아도 된다. 여러모로 전화만 한 것이 없었다. 그전에 전화 울렁증을 없애야 했다.
하지만 걸려오는 전화를 받는 것만 기다려서는 몇 통 받지 못할게 뻔했다. 사무실에는 인턴만 6명. 다들 빛의 속도로 전화를 받았다. 그러다 사무실 비품주문 때 사용하는 ASKUL(아스쿠로) 카탈로그가 눈에 들어왔다. 보통은 FAX로 오더시트에 품번과 수량을 넣어 보낸다. 찬찬히 살피다 보니 ‘전화주문가능’이라는 문구가 있었다.
‘비품 주문전화를 내가 직접 해보자!’
FAX로 발주서를 넣으면 며칠이내 사무실로 비품들이 배달되어 왔다. FAX로 하던 것을 일부러 전화를 걸어서 해보기로 했다. 긴장되는 마음으로 0120으로 시작하는 디렉트콜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곧 음성안내음이 나온다. JLPT와 일드로 다져진 듣기 실력이 있기에 이 정도는 식은 죽 먹기. 몇 단계를 걸쳐 상담원 연결로 넘어갔다.
> “오뎅와 아리가토 고자이마스. 아스크루 탄토우노 사토데 고자이마스. (전화 감사합니다. 아스쿨 담당 사토입니다)”
시작되었다. 일본에서 먼저 전화를 걸어본 것은 이때가 사실상 처음이었다. 떠듬거리는 일본어로 주문을 하고 싶다, 주문 후 언제까지 도착하냐 등, 미리 준비해 둔 스크립트도 모니터 화면에 띄어두고 전화를 시작했다. 말을 하다 보면 문법이 틀렸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알아차린다. 시험 일본어에 익숙한 탓도 있지만 머릿속 일본어와 입으로 나오는 일본어가 달랐기 때문이다. 입 근육이 아직 생기기 않은 것이다.
“모우시코미 방고, 542680, 히토하코 오네가이시마스. (신청번호 542680, 1박스 부탁합니다.)”
사무실에서 자주 사용하는 비품 A4용지 한 박스를 주문했다. 수화기 건너편 담당자는 상품명이 맞는지와 재고 및 배달 위치가 맞는지 등을 확인했다. 이 정도만 해도 전화는 마무리가 되겠지만 일부러 한, 두 마디 더 붙였다. 며칠 후에 오는지 비용 결제는 어떻게 되는지 등도 함께. 지금 아니면 말할 기회가 없었다.
> “카시코마리마시타. 아리가토 고자이마시타. (알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약 5에 걸친 전화통화가 끝이 났다. 내 일본어가 일본인에게, 그것도 전화로 통한다는 경험을 처음으로 했다. 성격이 소심한지라 정말로 주문이 잘 오는지도 무척이나 걱정됐다. 만일 잘못 온다면 회사에 여러모로 민폐였다. 사회생활 시작하면서 줄곧 실수만 해왔기에 의기소침해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다음날 주문한 그대로 물건이 도착했다.
이때부터 전화 일본어에 자신이 붙었다. 비품 주문에서부터 식당 예약, 행사장 예약 확인 등 전화로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일부러 전화를 걸었다. ‘고객 입장’에서 전화를 걸었기에 부담이 적었다. 설령 틀리더라도 혼날 일이 없다. 일본어 전화통화에 대한 부담을 내려놓은 후부터는 이상하게 전화가 잘 들렸다. 입이 근질근질해지기 시작했다. 아이가 말이 트기 시작할 때도 이런 기분일까.
전화로 일본어를 곧잘 하는 모습을 보던 회사 대리님이 하루는 통역 업무를 맡겨보겠다고 했다. 회사에서 종종 일본인 바이어와 한국 업체 간 1:1 화상미팅을 주선하고는 했다. 이때 통역이 필요한데 평소에는 직원들이 담당했다. 인턴 중에는 일본어가 서툰 경우도 있어서 우선 테스트를 하고 투입여부를 결정했다.
대리님은 일본에서 이미 꽤 오래 살았고 명문대 대학원 출신이라 일본어는 수준급이었다. 그 앞에서 일본어를 하려니 여러모로 긴장되었다. 마치 첫 회사 면접 때 일본어로 자기소개를 할 때 같은 기분이었다. 그가 일본어로 말하면 듣고 한국어로 내뱉었고 역순의 경우는 머릿속에서 번역해서 일본어로 내뱉었다. 보지는 못했지만 아마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있었을 것이다. 다행히도 이 정도면 쓸만하겠다는 평가를 받고 통역으로 투입되었다.
일본어가 붙기 시작하면서부터 업무도 순조롭게 풀려갔다. 긴장을 전혀 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지만 외부 영업에도 함께 동행하기 시작했고 바이어 앞에서 얼어붙는 일도 줄어들었다. 거기에 홈페이지를 만들었던 경험을 살려 사업 안내 사이트를 만들었는데 사내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인턴 종료를 보름 앞둔 시점이 되었다. 이제 슬슬 한국으로 돌아갈 준비를 해야 했다. 일본어가 여전히 만족스럽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말문이 튼 것만큼은 느꼈다. 자막 없이 일본 방송을 그런대로 이해할 수 있는 수준이 되었다. 일본어는 이쯤 하고 필리핀 등으로 영어 어학연수를 떠나리라 마음먹었다.
“형민 씨를 정사원으로 고용하기로 최종 결정했어요.”
회사에서 한, 두 차례 정사원 고용에 대한 이야기가 나왔었다. 대부분 대학생 인턴이었기에 고용까지 이어지기 쉽지 않았다. 중고 신입이었던 나는 고용에 있어 비교적 자유로웠다. 그간의 업무평가와 홈페이지 만들기라는 특기까지 더해지면서 팀을 담당하던 부장님이 본사에 정사원 고용을 제안했던 모양이었다. 일본에 더 살아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다.
2014년 2월, 일본에 살기 위한 최소한의 조건인 ‘재류자격인증명서(在留資格認定証明書)’가 우편으로 도착했다. 이후 소정의 절차를 거쳐 인문지식, 국제업무 비자를 받아 3년간 일본에서 지낼 수 있는 자격을 얻게 되었다. 고등학교 2학년시절 일본 홈스테이 이후로 일본에서 살아보고 싶다던 막연한 꿈이 실현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