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티아고 순례길 여행기의 시작
똥인지 된장인지 찍어 먹어봐야 아냐고? 나는 대체로 찍어 먹어봐야 아는 인간이다. 주변에서 뭐라 하든 일단 마음에 두면 입에 넣어보기 전까지는 밤에 잠을 잘 수가 없다. 된장으로 보이는 똥이라서 에퉤퉤 뱉어낼 때도 많다. 작게는 마라 떡볶이부터(내 장이 몹시 싫어했다), 크게는 석사 학위까지(2기까지 하고 그만뒀다).
산티아고 순례길 가보려고,라고 말했더니 주변인 모두가 걱정했다. 진짜? 진짜 갈 거야? 진짜로 한 달 넘게 걷는다고? 그들의 걱정은 매우 상식적이었다.
산티아고 순례길 시작점인 생장 피드포트부터 도착점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까지는 약 800km이고, 이 거리는 서울에서 부산까지 왕복하는 거리와 맞먹는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걸어갔다 왔는데 너무 좋더라고 누군가 말한다면 미친 사람 취급을 할 거면서, 나는 왜 산티아고 순례길에 혹하고 말았는가. 왜 똥인지 된장인지 또 찍어 먹어보러 떠났는가.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고 온 사람들의 기록을 많이 읽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마법 같은 경험이었고 그로 인해 인생이 바뀌었다고 감격에 차 있었다. 오래전부터 가졌던 자아 찾기 여행에 대한 환상이 그에 덧붙여져서 어느덧 산티아고 순례길은 요술 지팡이 같은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곳에 가기만 하면 더 나은 내가 될 수 있을 것 같았다. 구체적으로 어떻게 더 나은 모습이냐고 묻는다면 대답할 수 없었다. 아무튼 지금 이 꼴보다는 나은 모습이겠거니 싶었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산티아고 순례길을 걸었다고 해서 나의 성공시대가 시작되지는 않았다. 내 인생은 걷기 전과 후가 그리 다르지 않았다. 번쩍이는 깨달음도, 영감도 없었으며 심지어 몸무게조차 그대로였다. 달라진 건 한 가지, 예상보다 더 크게 빵꾸가 난 통장 잔고였다. 잔고를 바라보며 당분간 콩나물밥을 자주 해 먹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길을 걷고 나서 인생이 바뀌었다고 말하는 책들. 모든 짐을 자신의 등에 짊어진 채 전체 코스인 800km를 걸어냈다는 후기들. 그 극적인 이야기들에 압도되어, 한동안 나는 내 여행이 실패했다고 생각했다. 인생의 답 같은 건 찾지 못한 데다가 나 대신 짐을 운반해 주는 서비스인 동키를 신나게 이용했고 버스도 타고 택시도 탔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문득 생각했다. 이것도 그냥 여행일 뿐인데. 뭘 그렇게 교훈을 얻어와야 해. 그냥 가고 싶었던 곳 다녀왔으면 된 거 아닌가.
그동안 산티아고 순례길 갔다 왔다고 하면 어땠느냐고, 정말 좋았느냐고 기대감에 가득 차 묻는 사람들에게 심드렁하게 대답하기 민망했다. 이젠 대답 대신 이 글 링크를 보내주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