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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벼리바라기 May 06. 2024

책들의 시간 84. 각각의 계절

# 각각의 계절_권여선 소설_문학동네


  나에게 소설은 늘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볼 수 있게 해 주는 통로이며, 쉽사리 설명하지 못하던 어떤 마음을 발견함으로써 얻게 되는 위로의 방편이다. 이번 책은 읽으려고 빌렸다가 아주 오래 읽지 못했던 책이었다. 책에 실려 있는 첫 번째 단편이 생각보다 술술 넘어가지 않아 잠시 멈추었다가 다시 손에 들었다. 업무에서 조금 자유로워져 마음의 여유가 생겼을 때 책을 읽었더니, 재미있게 잘 읽혔다. 제목도 좋았다. ‘각각의 계절’. 

  ‘계절’이라는 단어를 참 좋아한다. 함께 보내는 시간의 흐름, 그래서 좋아하는 사람들과 함께하는 순간을 나는 ‘우리의 계절’이라 명명하곤 하는데, 소설의 제목이 ‘각각의 계절’이었다. 제목만으로 쓸쓸함이 느껴지면서, 묘한 끌림이 있었다. 그래서 읽게 된 책.      


1.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전화를 끊고 반희는 여행에 대해서보다 자신이 전화로 한 말들을 먼저 돌아보았다. 너무 많은 말을 한 건 아닌지, 아니면 너무 적게 하려고 애써서 채운을 서운하게 한 건 아닌지, 혹은 쓸데없는 말을 하지는 않았는지. 반희는 다른 사람들과의 관계에서는 이런 점검을 하는 자신이 싫었고 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하지만 채운과의 관계에서는 그러지 않았고 그러지 못했다. 자꾸 살피게 되었다. 채운이 알지 못하지만, 반희가 자신을 ‘엄마’라고 칭하지 않고 채운을 ‘딸’이라고 부르지 않는 것도 그런 살핌의 일종이었다. 가끔 오늘처럼 실패하기는 해도.(50쪽)     

  나를 지키고 싶어서 그래. 관심도 간섭도 다 폭력 같아. 모욕 같고. 그런 것들에 노출되지 않고 안전하게, 고요하게 사는 게 내 목표야. 마지막 자존심이고, 죽기 전까지 그렇게 살고 싶어.(75쪽)


  책에는 총 7편의 단편이 실려 있다. 그중 가장 재미있게 읽었으면서도 가장 마음이 아려 오래 생각하고 또 생각하고 그리고도 마음에 남은 단편은 ‘실버들 천만사’이다. ‘엄마’와 ‘딸’의 여행 이야기. 


  평생을 누군가와 싸우지 못하고, 자신의 이야기를 하지 못하며, 목소리를 내지 않던 여자는 항상 남을 향한 배려로 자신의 말을 점검하며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왔던 여자의 도피처는 결혼이었고, 그것이 도피처가 아님을 깨닫는 데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리고 여자는 평생의 용기로 집을 떠난다. 그 뒤 여자는 딸을 딸이라 잘 부르지도 못하는 엄마가 되었으며, 자신의 집으로 딸이 찾아오는 것도 불편해하는 엄마가 되었다. 하지만 그 여자의 방식은 딸을 향한 살핌의 일종이었다. 자신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자신과 딸의 관계를 타인처럼 끊어내어, 자신의 삶을 대물림하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오히려 여자는 이혼을 하고, 혼자 자신의 삶을 꾸려나가면서 더 괜찮은 삶을 살게 되었다. 하지만 딸은 어린 시절 엄마의 가출이 상처가 되어서인지, 엄마에게는 말하지 못하는 공황 증상을 지니고 살아간다. 엄마는 그걸 전혀 알지 못했다. 딸의 제안으로 시작된 1박 2일의 여행. 딸은 엄마의 삶을 이해하고, 엄마는 딸의 악몽을 함께 꾸어주기로 마음을 먹는다. 모녀 관계란 너는 너, 나는 나로 살아갈 수 없는 관계이기에.     

 

  지금의 삶이 불행하지 않지만, 결혼을 하고 살아가면서 나는 내 딸이 나처럼 살지 않기를 바라게 되었다. 너무 어린 나이에 선택한 결혼이 자주 후회스러웠으며, 그럼에도 책임감을 배워가고 있고, 사랑이는 것은 결국은 ‘연민’의 마음일 수밖에 없다는 자조에 빠질 때면, 이런 선택밖에 못 한 내가 참으로 싫었다. 그러다가도 내 버려둘 수 없는 삶이기에 또다시 성실함으로 열심히 살아간다. 딸이 나를 닮지 않기를 바라는 마음, 신중하게 결혼을 선택하기를 바라고, 일을 찾기를 바라고, 자신의 삶을 우선시하여 살아가기를 바라고, 외롭지 않기를 바라지만 내가 해 줄 수 없는 일이라는 것을 잘 안다. 스스로 삶을 살아가는 일은.      


  이 단편을 읽고 한동안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았다. 참 좋아서. 딸과 엄마의 여행도 좋았고, 아픔을 공유할 수 있는 나이의 딸을 가진 지금의 내 삶도 감사해서. 남편과는 헤어지면 남이 될 수 있지만, 딸과는 너는 너, 나는 나로 각자 살아갈 수 없는 관계를 이미 공유한 가족이라는 이름에 대하여 생각해 본다.      


2. 더 괜찮은 사람인 척 보이고 싶은 마음. 


  거기까지였다고 베르타는 생각했다. 그날 저녁까지만 이었다고. 남편이 죽고 나서 자신이 제법 철이 들고 너그러워졌다고 확신할 수 있었던 때는, 불안과 초초와 결벽에서 벗어날 수 있고 기쁨에 젖어 기도를 올릴 수 있으리라는 섣부른 믿음을 품었던 때는 봄 바자회에서 마리아를 만나 함께 태극기를 팔러 갔던 그날 저녁까지만 이었다고. 불과 한 달 정도밖에 안 되는 그 잠깐 동안뿐이었다고. 눈을 찌른 여자의 양산이 싸구려가 아니었다면, 마리아의 구취가 진통제의 부작용으로 인한 오심과 구토 때문이라는 걸 알았다면, 그랬다면 뭔가 달라졌을까.

  베르타는 비웃듯이 입가를 비틀었다. 조금 전 성당 안뜰에서 그들은 당장 내일이라도 빅토르의 병원에 달려가 봉사할 듯이, 앞다투어 소피아의 입양을 주선할 듯이 떠들어댔지만 내일이 되면 그들 중 누구도 마리아의 얘기를 꺼내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조금도 믿지 않으면서 무엇을 위해 그런 허튼소리들을 내뱉은 것일까.

  베르타는 가을 저녁의 찬 기운에 오싹함을 느꼈다. 자신이 왜 그들과 계속 만남을 이어왔는지가 분명히 이해되었다. 참 고귀하지를 않다. 전혀 고귀하지를 않구나 우리는…… 베르타는 카디건 앞섶을 여미고 종종걸음을 쳤다. 한 계절이 가고 새로운 계절이 왔다. 마리아의 말대로라면 새로운 힘이 필요할 때였다.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각각의 힘이 들지요. 사모님.(114쪽)


  가끔, 나의 위선에 나 스스로도 속아 내가 선한 사람이라고 착각할 때가 있다. 그러다 밤이 되면, 그 착각을 이내 깨달아 후회 속에 반성을 한다. 그렇게 말하지 말자, 감정을 속이지 말자, 착한 척하지 말자 그런 수많은 다짐을 하건만, 또 나는 적당히 가면을 쓰고 위선적인 삶을 살아갈 때가 많다. 


  소설은 마리아의 죽음을 알게 된 성당 사람들의 반응에 대한 이야기이다. 마리아가 파독 간호사로 살았던 삶, 아이를 입양하고 키우지만 그 아이가 정신병원에 입원한 이야기, 사람들은 마리아가 자신의 집 청소를 잘해 주었으며, 신부님을 잘 섬겼으며, 진정한 사랑을 실천하였다고 이야기하며 남겨진 입양아를 위하여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결국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들은 일상을 살아갈 것이다. 그 어떤 실천도 하지 않을 것이다.     


  소설 속 베르타가 마리아의 죽음 이후, 마리아와의 일화를 떠올리면서, 자신이 제법 철이 들고 너그러워졌다고 확신했던 섣부른 믿음이 위선이었음을 깨닫는 장면. 고귀하지 않으면서 고귀한 척 살아가는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되어 부끄러웠다. 가끔, 내가 타인을 이해한답시고 하는 많은 위로가 나는 그렇지 않음에 대한 안심임을 깨닫게 될 때 느껴지는 그런 마음.      


  아침마다 머리를 감거나 말릴 때면 더 괜찮은 사람이 되게 해 달라고 기도를 하게 된다. 그런 기도마저 없으면 내가 정말 형편없는 사람이 될까 봐 겁이 나기도 하고 조금이라도 마음을 다잡기 위한 하나의 의식 같기도 하다. 말을 많이 하지 않을 것, 섣불리 판단하지 않을 것, 타인의 아픔에 어설픈 충고나 위로를 하지 않을 것, 그렇게 돼 내어 본다. 적어도 그렇게 하지 않는 것이 나를 더 괜찮은 사람으로 만들 것만 같아서 나는 그렇게 말해본다. 


3. 정리     


  각각의 계절을 나려면 힘이 든다는 소설 속 마리아의 말처럼, 계절을 보내는 데 힘이 든다. 봄을 보내고 여름을 맞이하려는 지금, 하루종일 비가 온다. 기온은 조금 내려갔지만 온통 습함이 공기 속에 머물러 마음도 차분히 가라앉는다. 위선적이지 않으려 노력하지만, 오로지 정직함으로만 살아갈 수 없어, 때로는 감정을 내보이지 않는 위선을 보일 때도 있고, 위악으로 스스로를 지키려 할 때도 있음을 인정하게 되는 요즘, 더 괜찮은 사람의 모습이 어떠해야 할지 잘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 아픔이 타인의 아픔보다 크다고 말하지 말며, 타인의 슬픔과 고통이 내 것이 아니라 다행이라고 여기지 않는 삶을 살아야겠다. 

  우리의 계절이지만, 각각의 계절을 나는 응원한다.      


[이야기 나눠 보기]

1) 나는 나, 너는 너로 살 수 없는 관계가 있다면, 어떤 관계이며, 그 사람에 대하여 어떤 마음을 가지고 있는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2) 더 괜찮은 사람에 대한 열망이 있다면 무엇이며, 어떤 사람이 되고 싶은지 이야기를 나눠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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