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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탠저린 May 23. 2022

수상한 탈의실에서 발생한 미제 사건

#03  부다페스트, 헝가리



1  세체니 온천, 마감 1시간 전



"온천 마감까지 1시간밖에 안 남았는데, 괜찮으시겠어요?"
"네! 시간에 잘 맞춰 나올게요. 그런데 혹시 수영복을 빌릴 수 있을까요?
"맞는 사이즈가 있을지 모르겠는데, 여기서 골라볼래요?"



수영복이 가득 담긴 바구니를 받은 친구와 나는 서로를 쳐다보며 터지려고 하는 웃음을 참아야 했다. 바구니 안에는 얼핏 봐도 커 보이고, 캡이 없어 흐느적거리는  오래된 수영복이 가득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에겐 선택권이 없었다. 바로 오늘 이 세체니 온천을 위해 부다페스트로 왔으니까. 조금 멋이 없는 수영복을 입는다고 해서 바뀌는 건 없었다. 별다를 게 없어 보이는 나일론 천들의 더미 속에서 수영복의 형태를 갖추고 있는 것을 찾아내는 일은 꽤나 집중력을 요하는 일이었다.


힘겹게 두 벌을 골라 탈의실로 들어갔다. 이윽고 수영복을 갈아입은 서로의 모습을 보고 우리는 결국 참았던 웃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아, 이런 형태의 옷을 무엇이라 일컬으면 좋을까? 다행히도 마감 시간이 임박했던 탓에 지금 입장하는 사람은 우리 둘 뿐이었다. 조금만 격한 포즈를 취해도 흘러내릴 것 같은 천이 본연의 용도를 다할 수 있도록 매듭지어 간신히 지탱시켰다. 그리고 마침내 마주한 노천 온천의 모습에 우리는 넋을 놓고 말았다.


지금으로부터 100년 전 네오바로크 양식으로 건축되었다는 노란 건물의 외관은 그 세월을 보여주듯 약간은 낡고 바랬지만, 가로등 빛에 반사되어 황금빛을 뿜어내는 모습이 온천 건물이라고만 정의하기에는 아쉬울 정도로 웅장하고도 멋이 있었다. 그 위로 끝없이 펼쳐진 차갑고도 어두운 밤하늘과 아래로 일렁이는 거대한 물결 사이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김이 신비한 분위기마저 자아냈다.


올림푸스 신들에게 목욕탕이 있었다면 이런 모습이지 않았을까?




2  집을 떠난 지 한 달,  긴장이 풀어졌다



유럽을 시계방향으로 돌기 시작한 지 한 달이 됐을 무렵, 다친 적도 없고 잃어버린 물건도 없이 멀쩡한 모습의 내가 낯설었다.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여행을 떠나기 전부터 나는 뭔가를 잃어버릴 것 같았다. 소중한 물건을 도난당하는 일은 여행의 설렘과 동시에 따라오는 걱정이기도 하지만, 유럽여행에서 소매치기를 당하는 일은 굉장히 빈번한 일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여행객들은 유럽 여행 최고의 히트 상품이었던 복대에 돈을 넣고 다니고, 자전거 자물쇠를 이용해 기둥에 짐을 묶어 두는 등 다양한 방법으로 도난에 대비하곤 했다. 그리고 그걸로도 부족하다고 생각했던 나는 운동화의 속창 안에 비닐로 싼 현금을 숨기고 다녔고, 핸드폰은 음악을 듣는 용도 외에는 거의 꺼내 들지 않았다.



그렇게 몸을 사리던 내가 부다페스트에 도착하기 바로 직전, 참아왔던 심카드를 구매해 버렸다. 이토록 조심스러운 여행을 했으니, 남은 한 달은 와이파이에 의존하지 않고 연락도 하고 맛집도 찾아보며 편히 다닐 요량이었다. 유럽 전역에서 사용할 수 있다는 손톱 크기의 작은 칩은 유럽에서 그 어떤 물건을 샀을 때보다 큰 기쁨을 선사했다.


심카드를 샀던 기쁨이 담긴 사진




점심시간을 갓 넘겨 도착한 부다페스트는 화려하고 웅장할 것이라는 기대를 무참히 짓밟아 버렸다. 앙상한 나무들 사이로 보이는 잿빛 하늘에서는 눈비가 바람과 함께 휘몰아 치고, 그 아래 낙엽들이 녹아내린 눈과 뭉쳐져 굴러다녔다. 그야말로 을씨년스러웠다.


설상가상으로 예약했던 호스텔을 찾기가 쉽지 않다. 분명 지도 상에는 시내와 멀지 않은 대로변에 위치해 있다고 나와 있는데 말이다. 보물 찾기를 하듯 골목 구석구석을 뒤져보다 ‘Casa Grande’, 스페인어로 대저택이란 뜻을 가진 호스텔의 이름이 적힌 아주 조그만 간판을 겨우 발견했다.

 

인기척이 없는 호스텔에 들어서자 가장 먼저 보였던 것은 텅 빈 카운터였다. 벨을 눌리고 한참을 기다리자, 단발머리를 위로 질끈 묶은 마른 체형의 남자 스텝이 힘없이 내려왔다. 그는 간단히 호스텔 내부를 안내하며 오늘 묵을 방으로 소개했는데, 빛이 잘 들지 않아 으슥했다. 음침한 기운에 짐만 내려놓고 서둘러 그곳을 빠져나왔다.




3  우려하던 일은 가장 방심했을 때 일어난다



해맑게 물살을 즐기며 급류를 몇 번이나 탔을까, 퇴장을 알리는 소리에 우리는 아쉬움을 뒤로하고 나왔다. 그토록 멋지다는 부다페스트의 야경이 기다리고 있었기에, 음산했던 부다페스트의 첫인상을 가뿐히 지워버리길 바라면서.


온천에 크게 만족했던 우리는 서로 재잘거리며 갈아입을 옷을 꺼내려 락커를 열었다. 그런데 손을 아무리 깊숙이 넣어봐도 핸드폰이 없었다. 설마, 믿을 수가 없었다. 분명 온천에 들어가기 전 잘 잠겨져 있는지 몇 번이고 확인했다. 주위에는 샤워 중인 사람들이 몇 있었지만, 무턱대고 그들을 의심할 수는 없는 일. 좀 더 찾아보고 싶었지만, 퇴장을 재촉하는 소리에 더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단 나올 수밖에 없었다.


매서운 바람이 얼굴을 강타했다. 들어가서는 안 되는 신들의 놀이터에서 몰래 놀다 들켜 벌을 받는 느낌이었다. 마음 같아서는 이곳을 얼른 떠나 버리고 싶었지만 여기까지 와서 야경을 보지 않고 간다면 나중에 더 후회할 것 같았다. 불편한 마음을 애써 누르며 야경의 명소라 불리는 다뉴브 강으로 왔다. 잔잔한 강물위로 펼쳐진 부다왕궁의 모습은 방금 전 사건이 무색하게도 황홀한 자태를 보여주었지만, 무거운 마음이 마음 한 켠에서 떠나질 않는다.


숙소에 돌아와서도 사라진 핸드폰의 행방에 대한 생각이 가시지 않았고, 생각을 거듭할수록 시간에 쫓겨 나온 것이 후회되었다. 결국 다음 날 새벽 5시에 깨어 홀로 세체니 온천으로 향했다. 새벽의 어스름 속에서도 입장을 기다리는 긴 줄이 보였다. 아침 온천을 즐기려는 할아버지와 할머니들께 몸짓으로 상황을 설명하고 양해를 구했다. 그리고 문이 열리자마자 들어가 탈의실을 뒤졌다. 물론 핸드폰은 없었다.



[헝가리 부다페스트] 다뉴브 강에서 바라본 부다왕궁과 세체니 다리





4  도난신고



계획대로라면 3일의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나는 이 도시에 남고 싶지 않았다. 그냥 곧장 이탈리아로 가기로 했다. 다행히 유레일패스가 있었기 때문에 미리 예약하지 않아도 기차 시간에 맞춰 타면 되었다. 오후 1시 10분에 출발하는 기차가 이 도시를 뜰 수 있는 마지막 기회였다. 핸드폰을 도난당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나자, 서서히 해야 할 것들이 명확해졌다.


도난신고를 해야 한다.


헝가리 동부역 근처에 있는 경찰서를 찾아 지도에 대략적으로 표시하고 짐을 챙겨 나왔다. 역 근처에 있어야 하는데 이리저리 살펴봐도 도무지 경찰서처럼 생긴 건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철통같이 굳게 닫힌 창문과 왠지 모르게 주위에서 풍기던 서늘함에 조금 전 스쳐 지나갔던 오래된 건물 앞에 다시 돌아와 멈춰 섰다. 직감적으로 이곳이 내가 들어가야 할 곳이란 것을 느꼈다. 어둡고 넓은 홀에는 열 명 남짓의 사람들이 둘러앉아 있었고, 관리자나 경찰이 있어야 할 데스크는 비어 있었다.


그곳에 앉아 있던 사람들은 의욕이 없는 듯한 멍한 표정을 짓고 있기도 했고, 험상궂은 얼굴로 씩씩거리며 혼잣말을 하기도 했다. 알아들을 수 없는 대화 속에 끼어보려 옆에 앉은 사람에게 언제쯤 접수할 수 있을지 물어보았지만 돌아오는 답변은 랩 수준의 헝가리어. 그들이 얼마를 기다렸는지, 그리고 나는 얼마나 기다려야 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벽에 걸려 있는 시계가 12시 30분을 가리켰다. 결정을 내려야만 했다. 이곳에서 기약 없이 기다릴 것인지, 기차를 타고 새로운 도시로 향할 것인지. 나는 바로 일어나 그 공간을 나왔다. 그리고는 눈에 보이는 가게로 들어가 수중에 남아있던 헝가리 돈으로 달콤한 간식을 한껏 샀다. 이 도시의 돈을 다 써 버려야 나쁜 기억도 사라질 것 같았기에.


기차에 앉아 점점 멀어져 가는 도시를 바라보며 다짐했다. 차 올랐던 의심과 부정적인 생각을 모두 저곳에 버려두겠노라고, 그리고 언젠가 이 도시와 연이 닿아 다시 만나게 된다면 훨씬 더 좋은 기억들로 채워주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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