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 런던, 영국
여행지에서는 누구나 낯선 이가 된다. 낯선 공간에서 만난 우리는 때로는 동행이라는 이름으로 서로의 목적을 충족시키기 위해 함께 여행하기도 한다. 혼자서는 어려운 다양한 메뉴를 맛보기 위해 식당을 같이 가기도 하고, 근교 여행에 필요한 인원수를 맞추기 위해 동행이 되기도 했다. 때로는 가격이 부담되는 좋은 숙소를 나누기 위해 숙소 메이트가 되어 주기도 하고, 여행지에서의 하루를 공유하는 친구가 되기도 했다.
혼자 떠난 여행에서 이런 동행이 좋은 점은 보다 풍부한 경험을 할 수 있고 경비도 아낄 수 있지만, 무엇보다 초기의 목적이 달성되면 쿨하게 헤어질 수 있다는 거다. 처음 만난 동행은 짧은 시간 동안 아주 친한 친구가 되어 주었다가, 헤어질 때는 서로의 남은 여행에 대한 안녕을 기원하며 헤어졌다.
그들에게 내가 누군지 설명하며 애써 드러낼 필요도 없었다. 우리는 오로지 함께 하는 순간에 집중했다. 겉으로 드러나는 형식적인 정보를 공유하지 않고도 낯선 공간에서 같은 목적을 가지고 있다는 공통점은 친밀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서로가 그간 겪어오며 쌓아온 소중한 정보를 공유하며, 동행의 다음 일정에 도움을 주는 것을 기쁨으로 여겼다.
그중에서도 짧은 시간이지만 충만한 감정을 느꼈던 동행도 있었다. 몇 마디 나눠보지 않았어도, 언어가 썩 잘 통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그런 감정이 느껴지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과 함께 했던 여행지를 떠올리면 왜인지 모르게 그 장소에 대한 기억과 감정이 풍부하고도 선명했다.
내가 첫 동행을 만난 것은 두 달 간의 유럽 여행을 떠났을 때다.
첫 도시였던 런던에서의 이튿날 저녁이었다. 예상보다 일찍 끝난 일정에 나는 런던의 야경을 잠깐 즐기고 싶어 무작정 스케치북을 챙겨 밖으로 나와 숙소 근처 강가 벤치에 자리를 잡았다. 건너편의 빅벤을 바라보며 한참을 그리다 들어가려던 찰나였다. 벤치에서 일어나 돌아서는데, 한 영국 남자의 시선이 느껴졌다.
“한국 사람이세요?”
어눌하지만 또렷한 발음에 그가 한국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란 것을 단번에 눈치챌 수 있었다. 잠깐 서서 이야기를 나누던 우리는 자연스럽게 벤치에 앉았고, 강에 비친 빛을 조명 삼아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는 K-pop으로 한국을 처음 알게 되었고, 한국에 대해 찾아보면서 관심이 깊어졌다고 했다. 태어나 한 번도 런던을 떠나본 적 없었다며 이렇게 먼 곳으로 여행을 오게 된 이유를 궁금해했다. 나는 왜 이 여행을 결심하게 되었는지, 그동안 다른 나라를 다니며 어떤 일이 있었는지 말해 주었다. 이외에도 우리는 서로의 나라에서 가장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장소와 음식, 현재의 삶과 고민 등 시시콜콜한 이야기들을 주고받았다.
그가 한국에 관심이 있다는 점만 제외하면 우리는 겹치는 점이 하나도 없었다. 하지만 그 사실이 우리를 흥분하게 했고, 다른 점이 나올 때마다 서로를 신기해하며 우리의 삶이 얼마나 다른지 짧은 배틀을 하기도 했다.
나는 그가 어느 학교를 다니는지, 부모님이 무슨 일을 하시는지 그런 것들은 궁금하지 않았다. 불과 30분 전에 몰랐던 사람이 오래된 친구처럼 느껴졌다. 선뜻 꺼내기 어려운 삶의 속사정 마저 고백하며 왠지 모를 해방감을 느꼈다.
낯설고도 친밀한 그 묘한 감정을 만끽했다.
시간이 흘러가는지도 모르게 이야기를 나누다 매서운 강바람에 주위를 돌아보았다. 짙은 어둠이 내려앉은 강가에는 가로등 불빛만이 반짝이고 있었고, 빼곡히 앉아있던 사람들도 한둘씩 돌아가고 있었다. 몇 시간 전만 해도 남남이었던 너와 내가 우리가 되어 헤어져야 할 순간이 온 것이다. 그는 집으로 가는 길이라며 내가 묵는 민박까지 바래다줬다. 언제 다시 만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아쉬운 마음에 연락처를 공유했다. 그리고 잠이 들기 전까지 못다 한 대화를 주고받았다.
처음 느낀 감정이었다. 속이야기를 잘하지 않던 내가 아무런 연고가 없는 낯선 사람에게 내 모든 이야기를 해 버렸는데, 이상하게도 마음이 편안했다. 같은 마음이었을까. 그는 조심스럽게 내일 특별한 일정이 없다면 자신이 런던을 소개해주겠다는 제안을 했고, 나는 흔쾌히 수락했다.
저마다 잊지 못하는 순간이 있다. 내게는 어떤 감정을 새로이 느꼈던 순간이 유독 그렇다. 유년 시절에는 경험하는 대부분의 것들이 새로웠기 때문에 추억으로 남는 순간들이 많았다. 어른이 되고 나서는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오늘을 보내는 날들이 많아졌다. 반복되는 일상에 처음을 느낄 수 있는 기회도 줄어들었다. 어른들이 늘 말씀하시던 나이가 들면 시간이 빨리 간다는 게 어느 정도 이해가 갔다. 맛있는 음식을 맛본다거나, 좋은 호텔에서 잔다거나, 비싼 옷을 산다거나 하는 자극적인 순간은 꽤 있을지라도 마음에 오래 머무는 추억이 점점 없어지니 그런 게 아닐까.
누군가 내게 어떻게 살고 싶은 지 물어본다면,
지금의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다.
처음을 느끼고
새로움을 받아들이는 것에
주저함이 없는 삶,
마음에 남는 추억이 많아
조금 느릴지라도
돌이켜 봤을 때 풍부했다고 말할 수 있는
인생을 살고 싶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