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 C.S.Lewis -

by 탠저린 May 31. 2022

일상 속에 묻혀있던 여행의 순간이 떠오를 때

#04  피렌체, 이탈리아



인생에서 어떤 상황이나 가치관이
바뀌게 되는 '터닝 포인트'의 시점이 있다.
그리고 내게도 그런 순간이 있었다.


여행자들이 그토록 입을 모아 찬사를 보내는 이탈리아. 장화 모양의 삼면이 바다로 둘러싸인 대한민국과 비슷한 형태의 반도 국가다. 보통 여행지들은 수도를 비롯해 한두 곳 정도만 유명세를 치르는데 비해 이탈리아는 한 손에 꼽을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도시가 많았다.

도시 자체가 오래된 역사책 같은 로마, 르네상스의 본고장 피렌체와 시에나, 해안 절벽에 즐비한 형형색색의 건물들이 아름다운 남부 포지타노, 물과 가면의 도시 베네치아, 세계 패션과 디자인의 중심 밀라노,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영화 <시네마 천국>의 촬영지 시칠리아 섬까지 지역마다 특색이 뚜렷했고 그만큼 여행지로서의 인지도도 골고루 높았다.




1  Florence,  the City of Flowers 

'꽃의 도시'란 이름을 가진 피렌체. 그렇기에 르네상스를 부흥시키는데 큰 역할을 했던 든든한 후원자 메디치 가문을 비롯해 당시 명문가의 문장을 찾아보면 유독 '백합' 문양을 많이 볼 수 있다. 아직도 피렌체가 르네상스의 건축과 예술 작품을 많이 간직하고 있는 이유는 후에 메디치 가문이 몰락할 때 마지막 유족이었던 안나가 '메디치 가문의 모든 예술품들은 어떠한 경우에도 피렌체를 벗어날 수 없다'는 조건을 걸게 되며 이 도시에 고스란히 남게 되었기 때문이다.



세체니 도난사건 이후 불안한 마음을 달래며 이탈리아를 여행하는 중이었다. 피렌체에 도착해 예약해둔 역 근처 한인민박을 찾아갔다. 그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벨을 몇 번이나 눌러도 아무런 응답이 없었다. 핸드폰이 있었으면 연락이라도 할 수 있을 텐데 별다른 방도가 없었다. 잠깐 자리를 비운 것이라 생각하고 기다리려는데, 아까부터 나를 주시하던 덩치 큰 무리가 다가오는 게 보였다. 그들의 건들거리는 행동과 시선은 호의적으로는 느껴지지 않았고, 경계심이 최고조에 달했던 탓에 '내 카메라나 지갑을 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엄습해왔다. 그 자리를 얼른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이튿날부터 묵으려고 알아봐 두었던 멀지 않은 호스텔로 서둘러 이동했다. 기차 안에서 피렌체의 지도를 익혀둔 것이 너무나 다행이었다.


호스텔은 엘리베이터가 없는 오래된 건물의 낡은 계단을 쭉 올라가다 보면 4층 오른편에 있었다. 벨을 누르자 노란 원피스를 입은 스텝이 문을 열어주었다. 그리고는 몇 달치가 적혀있는지 모를, 숙박객 리스트가 빼곡히 적힌 두꺼운 수첩을 잠시 보다 싱긋 웃더니 더블룸 하나가 비었다며 1인 비용으로 혼자 묵게 해 주겠다고 했다. 방은 굉장히 작았지만 창문을 열면 주황색 돔의 두오모 성당이 보였고, 핑크빛 꽃무늬 이불이 덮인 작은 침대 두 개와 민트색 수납장이 인상적인 아늑한 공간이었다.



[이탈리아 피렌체] 호스텔 Locanda Daniel 에서 본 풍경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유가 없는 마음에는 스텝의 친절함도, 방의 따뜻함도, 그토록 기대했던 노란빛의 아름다운 풍경도 느낄 틈이 없었다. 낯설기만 한 길 이름을 외우고 가이드북에 실린 작은 사진을 몇 번이나 보고 난 뒤에야 숙소를 나섰고, 거리를 걸을 때도 주변을 감상하기보다는 목적지에 향하는 것에만 촉각을 곤두세웠다.




2  두오모로 시작된 우연한 만남

'Duomo'는 집이란 뜻의 라틴어 'Domus'에서 유래했는데, 이탈리아에서는 한 도시를 대표하는 성당을 일컫는 말로 통용된다. 피렌체의 어디에 있든, 낮은 건물들 사이로 우뚝 솟은 주황색 돔모양 지붕의 두오모 성당을 볼 수 있다.



그렇게 긴장의 여행을 하던 어느 화창한 날, 피렌체가 한눈에 보인다는 두오모 성당 꼭대기에 올라 조용히 낮은 주황색 지붕을 내려다보고 있는 중이었다. 더 좋은 자리를 찾으려 움직이는 많은 관광객들 사이로 카메라를 손에 꼭 쥔 채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한 여자가 눈에 들어왔다. 왠지 짐작 가는 그 행동에 그녀의 시야로 들어갔다. 예상했던 대로 그녀는 내게 사진을 찍어달라고 요청했고, 꽤 오랫동안 사진을 찍어주며 대화를 나누다 그녀와 저녁을 약속했다. 핸드폰이 없어 6시에 두오모 성당 앞에서 다시 만나기로 하고, 30분 전부터 두오모 성당이 있는 광장을 맴돌았다.


그때였다. 어디선가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조금 전 만났던 그녀가 아니다. 3주 전 파리 오르세 미술관에서 마주쳐 잠깐 이야기를 나눴던 사람이었다. 좋아하는 작품의 취향이 비슷해 제법 신선한 대화가 오고 갔었는데, 연락처를 물어보기에는 조금 어색한 상황이라 헤어지고 난 뒤 아쉬워했다. 그런데 이곳에서 다시 만나다니, 여행 중에 종종 있는 일이라지만 무척 반가웠다. 그동안의 사정을 이야기하는 동안 두오모에서 만났던 그녀가 도착했다. 그녀는 자연스럽게 대화에 합류했고, 우연한 만남을 기념하자는 그럴싸한 이유를 들며 함께 저녁을 먹자고 했다. 피렌체에서 꼭 먹어야 한다는 티본스테이크를. 그 맛은 생각보다 뛰어나지 않았지만, 그런 건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그들과 헤어지고 숙소로 돌아가는데, 금세 어둑해진 거리에 다시 긴장이 됐다. 레스토랑이 즐비한 거리에는 아직도 사람들이 북적였다. 앞만 보며 걷던 와중에 골목 끝 코너 레스토랑 문 앞에서 한 할아버지가 미소 짓고 계신 것이 보였다. 나와 눈이 마주친 할아버지는 활짝 미소를 보이셨다.


찰나에 수많은 생각이 스쳐 지나갔다. 어떤 의도인지 추측하느라 의심으로 차 있었다. 그런 내게 할아버지는 잠깐 와 보라고 손짓하셨다. 이번에는 나를 향한 제스처임이 확실했다. 수중에는 중요한 물건도 없었고, 주위에 사람들도 꽤 있는 것을 확인한 후에서야 나는 할아버지에게 다가갔다. 할아버지는 그런 내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시더니 이내 말씀을 건네셨다.



얘야, 인생은 생각보다 짧단다.
 이렇게 웃으면서 살기에도 너무 짧아.
 날 따라 웃어보렴. 괜찮아.



할아버지는 뒤를 가리켰다. 그곳에는 레스토랑 문에 비친 잔뜩 굳어있는 표정을 한 여자가 보였다. 다름 아닌 내 모습이었다.


머릿속이 하얘졌다. 이탈리아에 도착한 후로 여행을 잘하고 있는 줄만 알았다. 하지만 경계와 의심으로 가득했던 나의 태도가 오히려 마음을 닫아버리고 시야를 가로막고 있다는 걸 그 순간 깨달았다. 그리고 그런 나를 발견해 준 할아버지가 너무 고마웠다. 익숙하지 않은 영어와 손짓으로 자기를 따라 해 보라며 해맑게 웃으시는 할아버지를 바라보다 나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가슴속에서 뭔가 뭉클한 것이 차 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그날 밤, 지난 여행을 곱씹어 보았다. 나는 정작 가장 중요한 것들을 놓치고 있었다. 나의 두려움 때문에 내게 친절을 베푸는 다른 사람들의 선의를 의심했고, 그토록 열망했던 이 도시의 아름다움을 온전히 느끼지 못하고 있었다.


핸드폰을 도난당했지만, 그 덕분에 곧장 이탈리아로 오게 되었고 이곳에서 소중한 인연을 다시 만났으며 그 못지않은 멋진 경험도 했다. 어찌 되었든 핸드폰은 내 손에 없었고,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나는 이 순간을 즐길 권리가 있었다. 그제야 눈부시게 아름다운 주황빛의 도시가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비로소 남아 있던 감정을 진정으로 내려놓으며 여행의 순간에 집중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 피렌체] 가죽 시장이 들어서던 거리의 저녁 풍경


[이탈리아, 피렌체] 트리니티 다리에서 본 아르노 강과 베키오 다리




3  일상 속에 잊혀졌던 여행의 순간이 다시 떠오를 때

여행을 다녀오고 한참 후에 집에서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를 봤다. 미국 명문 사립학교에 부임한 영문학 담당 키팅 선생님은 학생들에게 시를 가르친다. 그리고 수업 중 나왔던 한 대사는 많은 사람들의 좌우명이 될 정도로 손에 꼽히는 명대사가 되었다.


Carpe diem. Seize the day, boys.
Make your days extraordinary.



영화 <죽은 시인의 사회>의 수업 장면


언젠가 우리는 모두 죽게 되니 자신이 원하는 것을 찾아 현재를 살라는 뜻이다. 키팅 선생님의 얼굴에서 할아버지의 얼굴이 겹쳐 보이며 바쁜 삶의 순간들에 잠시 묻혀있던 지난날의 기억이 떠올랐다. 할아버지의 그 한 마디가 마음 깊숙이 꽂혀 내게 정말 중요한 게 어떤 것인지 일깨워 주었고, 여행에 대한 생각과 삶에 대한 태도를 바꾸게 되었다.






가끔 지나간 것들에 대한 사사로운 감정에 사로잡힐 때면 할아버지와 마주했던 피렌체의 밤을 떠올린다. 그리고 다시 마음을 일깨워본다. 그런 후회와 미련의 감정에 시간을 낭비하기에는 인생이 너무 짧고 유한하다는 사실을,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가장 아름다우며 행복해야 할 때라고.




그 후 다시 갔던 피렌체, 6년 전 당시 묵었던 호스텔이 있던 거리에서







                    

매거진의 이전글 수상한 탈의실에서 발생한 미제 사건

매거진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