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5 애틀랜타, 미국
인천에서 디트로이트로 출발한 비행기가 2시간 연착되었다. 평소라면 이 정도 늦게 도착하는 걸로 크게 연연하지 않는다. 하지만 오늘은 상황이 다르다. 나에겐 아직 타야 할 비행기가 두 대나 더 있기 때문이다.
기내에서 지나가는 승무원을 붙잡고 환승 시간이 겨우 1시간 55분밖에 안 되는 다음 비행기를 탈 수 있을지 물었다. 비행기 선반이 닿을 듯한 큰 키에 희끗한 머리, 50대 중반은 되어 보이던 그녀는 A4 용지를 빼곡히 꽉 채운 내 여정표를 살펴보더니 핸드폰처럼 생긴, 그들만이 사용하는 듯한 손바닥만 한 작고 두툼한 기계를 꺼내 무언가를 입력했다. 다음 비행 편을 살펴봐 주는 것이라는 일말의 희망도 잠시, 내 눈앞에 있는 화면에는 정확히 '1,600'이란 숫자가 적혀 있었다.
"이 정도 마일리지면 괜찮겠어요?"
당최 뭐가 괜찮다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조그만 창 밖으로 구름 밖에 보이지 않는 이곳에서는 어떤 도움도 받을 수 없다는 것과 다음 비행기를 놓치겠다는 정도는 알 것 같았다.
정확히 예상보다 2시간 뒤, 디트로이트 공항에 도착했다. 수화물이 나오는 곳 옆 티켓 데스크에 앉아있던 항공사 직원은 나를 보더니 애틀랜타로 향하는 티켓을 50분 간격으로 두 장 뽑아줬다.
"지금 잘 뛰어가면 첫 번째 비행기를 탈 수도 있을 거예요. 못 타면 다음 티켓을 써요."
티켓을 보니 'SEAT REQUEST'라고 적혀 있다. 도착하는 대로 타서 빈 좌석에 앉으면 된단다. 기차도 아니고 비행기에서 이렇게 쿨해도 되는 걸까? 깊은 생각을 할 시간이 없다. 애틀랜타에서 리마로 가는 비행기를 타려면 무조건 첫 번째 티켓을 써야 했고, 그렇지 못한다면 꼼짝없이 애틀랜타 공항에 갇히고 말 것이다. 그렇게 두 장의 티켓을 손에 꼭 쥔 채 11Kg의 짐을 들쳐 메고 공항을 가로질러 달려, 희미하게 들리는 라스트콜을 가까스로 붙잡고 탑승에 성공했다.
시작부터 쫄깃한 긴장감.
그래, 이게 내가 그리워했던 여행이지.
탑승을 앞둔 사람들이라면 한 번쯤은 기대해 본다. 비행기 옆자리가 비어 누워서 가는 일명 '눕코노미'를 누린다거나, 우연히 자신의 이상형이 타 영화 <비포 선라이즈>처럼 운명적인 사랑을 한다든가. 이번 여정에서 뛰기만 했던 나는 전자이길 기대하며 빈자리가 많아 보이는 맨 뒤편의 좌석을 요청했다.
마침내 최종 목적지인 리마로 향하는 비행기 뒤편의 제일 오른쪽에 앉았다. 안도의 한숨을 쉬며 그다지 젖혀지지 않는 이코노미석에 몸을 축 늘어뜨렸다. 디트로이트 공항에서부터 이 자리에 있기까지 시간이 어떻게 흘러간 지 모르겠지만, 일단 마지막 비행기를 타고나니 앞으로 상공 위에서의 시간이 온전히 내 것 같았다.
출발한 지 1시간쯤 지나 기내식이 나올 무렵, 아까부터 어수선해 신경이 쓰였던 옆 좌석 남자가 기내식으로 제공된 차가운 샌드위치가 맛있다며 말을 띄운다. 태양에 그을린 듯 까무잡잡한 피부에 장난기 가득한 눈, 싱글벙글한 웃음이 떠나지 않는 그의 이름은 'Ricky'였다.
페루에서 태어났지만 고등학교 때부터 일을 하는 지금까지 캘리포니아에서 쭉 살고 있다고 한다. 오랜만에 부모님을 뵈러 고향으로 가는 길이라며 꽤 들떠 보이던 그는 6시간이 넘는 비행 동안 바로 내 옆좌석에서 끊임없이 재잘재잘 말을 쏟아냈다. 늦은 시간에 도착하는데 숙소는 어떻게 갈 거냐며 나를 걱정하는 여유까지 보인다. 이 사람, 진짜 대단하다.
새벽 한 시가 다 되어서야 도착해 리마 공항 입국장에 들어섰다. 숙소로 가려면 환전을 하고 택시를 잡아야 하는데, 대부분의 환전소가 모두 문을 닫아 버렸다. 그때 막 짐을 찾고 나온 리키가 내 옆으로 오더니 조금만 더 가면 중앙에 아직 영업하는 환전소가 있을 거라며 나를 이끌었다. 환전소의 환율이 너무 안 좋다며 택시비만큼만 환전하라는 조언을 하고는 얼른 가야 한다며 서두르는 그에게 고마움의 작별 인사를 건넸다.
주황색 가로등과 달빛이 은은하게 비치는 공항 앞은 마지막 손님을 영업하려는 호객 택시로 붐볐다. 인상 좋은 기사님을 찾으려 주위를 둘러보는데, 오른쪽에 있는 한 택시 옆에서 양손을 흔들며 함박웃음을 짓고 있는 익숙한 형체가 보였다. 다시 리키다.
그는 미리 공항 밖을 나가 택시 기사님과 내가 갈 숙소까지 딜을 마치고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트렁크에 짐을 실어주며 혹시 리마에서 무슨 일이 생기거나 도움이 필요하면 연락하라고, 그리고 다음에 캘리포니아에 놀러 오게 되면 자신을 잊지 말고 꼭 찾아야 한다며 끝까지 쉴 새 없이 재잘거리는, 그 다운 진짜 작별을 했다.
비행기 옆 좌석에 앉은 누군가와 친구가 될 확률은 얼마나 될까? 그 수치를 정확히 계산할 수는 없겠지만, 굉장히 희박한 확률임에는 틀림없다. 그렇기에 영화나 소설의 소재로 빈번히 사용되고 여행자들이 한 번씩 꿈꾸어 보는 상상이지 않을까.
첫 번째 애틀랜타행 비행기를 놓쳐 리마행 비행기를 타지 못했더라면, 혼자 앉기 위해 맨 뒤편의 좌석을 요청하지 않았더라면 그와 만나지 못했겠지. 그랬다면 이 여행의 기억이 조금, 어쩌면 많이 달라졌을 거다. 그는 내게 따뜻하고도 힘차게 엔진을 켜줬으니까.
내 몸의 감각이 맑게 깨어있는 여행 중에는 이런 마음이 더 크게 다가온다. 평범한 어느 날, 예고 없이 찾아올 인연과 그들이 베푸는 순수한 마음을 놓치지 않겠다. 그 눈부신 순간을 더 찬연하게 세상에게 돌려주겠다. 그들이 늘 그래 왔듯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