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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서퍼 Feb 20. 2024

사망 신고

이제 가족관계 증명서의 아빠 이름 옆에는 '사망'이라는 글자가 붙는다

발인 후 엄마와 나는 작은엄마와 함께 집으로 돌아왔다. 집은 나갔던 모습 그대로 불이 켜져 있었다. 아빠의 방은 현관 바로 오른쪽 방이다. 엄마는 그 문을 도저히 열 수 없을 것 같다고 했지만 나는 손을 씻고 나서 곧장 아빠의 방으로 들아갔다. 그 방의 모든 것에서 내가 싫어하던 아빠의 냄새가 났다. 모든 것이 그렇듯 아마 이 공간을 채우는 것 중 냄새가 가장 먼저 휘발될 것이다. 내가 아빠의 냄새를 잊게 될까? 이걸 기억하기 위해 애쓰게 되는 날이 올까? 잘 모르겠지만... 난 아마 아닐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우리는 함께 저녁을 먹었다. 2020년 당시 엄마는 운동을 거의 중독처럼 즐겼고 식단을 하느라 저녁을 거의 먹지 않았다. 운동을 하지 않으면 불안하고, 운동하는 게 가장 행복하다고 말하던 때였다. 엄마는 이제부터는 서로 꼭 밥을 챙겨야 한다고 말했다. 이제 우리의 목적은 식단이나 관리가 아니라 생존이 되었으니까. 원래 우리 가족은 명절이 아니면 굳이 함께 밥을 먹지 않았다. 생활 패턴도 식성도 달라서 그랬다. '서로', '꼭 밥을 챙겨야 한다'. 셋 중 하나가 떠나고 나서야 '같이 밥을 먹는다'는 식구 본위의 의미를 충족하게 되었다. 우리는 어렵지 않게 밥을 넘겼다. 영화나 드라마에서는 이럴 때 가족들이 식음을 전폐하던데, 모래를 씹는 것 같다고 하던데.


"밥이 넘어가는 게 이상해."

"니 몸은 너를 살리는 게 먼저니까 배가 고픈 게 당연한 거야."


내가 중얼거리자 작은엄마가 말씀하셨다. 이 순간에도 '당위'를 생각하고 있는 스스로가 조금 질렸다. 내 초자아는 누구로부터 온 걸까? 엄마도, 아빠도 나를 오냐오냐 키웠는데.




우리는 저녁 식사 후 'S상무'를 맞았다. 엄마가 응급실로 가는 택시 안에서부터 찾았던 사람, 장례부터 입관, 발인까지 모든 과정에 자리를 지켰던 바로 그 사람이었다. 장례식장 복도 의자에 3일 내내 침울히 앉아있던 그가 누군지 묻는 사람들이 있었으나 나는 그에 대해 아는 바가 없었다. 그분은 아빠의 다른 회사 직원들과 데면데면해 보였으며, 이따금 나나 엄마가 말을 붙이면 장례가 끝나는 대로 급히 이야기를 했으면 한다고 했고, 그 사람을 조심해야 한다는 말들을 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우리 큰 이모는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속 그분만은 계속 자리를 지킨 걸 유심히 지켜보신 것 같았다.


그는 자신이 아빠와 막역한 사이였으며, 아빠가 건설 회사 대표로서 벌어들인 수익을 자신이 상무로 있는 또 다른 회사에 투자하는 구조였다고 말했다. 재능기부 일환으로 운영 중이던 네이버 밴드를 통해 아빠가 먼저 연락해 와 만나게 되었으며, 둘은 빠르게 가까워져 함께 일을 하게 되었다고 했다. 대표와 직원 관계이기도 했지만 사실은 정말 가족이나 형제처럼 생각했다고.


이곳에 사업 구조에 대해 자세히 쓸 수는 없으나 요약하자면 그간 두 사람이 공을 들인 계약 건이 성사되고, 금융권 승인도 완료되어 이제 곧 빛을 보려던 차였다고 했다. 그는 정말 안타깝다며, 몇 달이 남지 않았는데 이게 완성되는 걸 보시지 못하고 가신 게 원통하다고 말했다. 사고가 있던 바로 당일에도 만났다고 했다. 그때 가게에서 점심을 함께 하고 자신은 지방에 가야 해서 먼저 이동했는데, 그때 술에 마셔서 운전할 수 없으니 자신은 나중에 가겠다고 했던 아빠를 데려다줬어야 했다고 침통해했다.


당시의 나로 말하자면 부동산을 소유하고 건설회사의 대표로 있는 아빠의 딸인 주제에 매도/매수도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개념이 없었다. 그분이 말하는 어려운 금융 전문 용어들을 반의 반도 알아듣지 못하는 게 당연했다. 중개사이신 작은엄마가 있는 게 천만다행이었고, 작은엄마는 중간중간 질문을 하셨으나 나는 이 사람을 믿는 것에 앞서 대화의 내용 자체가 신뢰할 수 있는 것인지에 대한 판별조차 어려웠다. 나는 모르는 것을 아는 척하는 데 소질이 없다. 그때는 더 그랬고, 만약 그런 척을 한다고 해도 노련한 사회인들 앞에 당연히 들켰을 것이다.


그분은 체결된 계약의 계약서도 가져와 상세 내용을 설명하셨다. 나는 최대한 대답은 아끼고, 이제 어떻게 해야겠냐고 물었다. 그분은 빨리 대표자 승계를 해서 계약을 나나 엄마 이름으로 변경해야 한다고 했다. 당시 엄마는 몇 년 전 가족에게 명의를 도용당해 신용불량 상황이었고, 나는 순수학문을 전공한 학부생이었다. 아빠의 것이라 한들 내가 상상해보지 못한 업계의 대표자 자리를 승계하는 것은 거부감이 먼저 들었다. 내 미래는 어떻게 되는 거지? 일단 우리끼리 더 얘기를 해보겠다고 하고 그분을 보냈다. 그리고 배웅을 하자마자 뒤를 돌아 작은엄마께 물었다.


"작은엄마, 거짓말하는 것 같아요?"


이다음에 만난 수 명의 사람들과의 대화도 모두 이런 식으로 흘러갔다.




우리는 다음날부터 아빠가 대표로 있던 회사의 다른 상무, 공인중개사, 본부장, 공무 부장, 경리 등 수많은 사람들과 대화를 시작했다. 우리 집으로 부를 때도 있었고 회사에서 만나기도 했다. 어떤 사람들은 장례식장에서는 꼭 우리에게 유리한 쪽으로 정리를 해주겠다더니 갑자기 연락을 피하거나 태도를 바꾸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대표의 부재에 모두가 혼란스러웠고, 당연하게도 회사 직원분들 사이에서도 입장 차가 있었다. 그러니까 어떤 '입장 차'? 누군가는 회사를 넘기라고 했고, 누군가는 엄마가 회사에 출근해 대표직을 이어받아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누군가는 나에게 대학원에 가 관련 공부를 할 필요가 있다고 했다.


나도 그렇지만 엄마는 특히나 더 불안해했다. 아빠의 사업체와 관련해 문외한이고, 이 때문에 답답하고 자괴감이 드는 건 매한가지였지만 어리고 학생인 나와 엄마는 애초에 입장이 달랐다. 때문에 거의 모든 대화는 내가 주도했고 엄마는 옆에 조용히 앉아있었다. 우리 집으로 온 H오빠가 엄마에게 회사 직원들에게 해야 할 말을 대신 써줬는데, 그 발언은 고인의 배우자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것이었지만 엄마는 그조차 버거워했다. 이해했다. 다행히 작은엄마와 H오빠가 번갈아가며 자리를 지켜주었다. 특히 작은엄마, 작은엄마가 우직하고 단단하게 우리를 지탱해 주셨기 때문에 우리는 죽지 않고 살아있을 수 있었다.


회사분들과의 대화와 별개로 우리에게는 처리해야 할 행정처리들이 많았다. 먼저 사망신고였다. 아빠의 주민등록증과 사망확인서를 들고 행정복지센터에 방문했다. 번호표를 뽑고 사망신고를 하러 왔다고 말했다. 서류를 작성하는 데 눈물이 줄줄 나왔다. 가는 길부터 울었는지, 대기를 위해 소파에 앉았을 때부터 울었는지, 방문 목적을 말하면서부터 울었는지 기억도 나지 않았다. 이 즈음의 나는 늘 그랬다. 절박하게 애쓰는 와중에도 때때로 꽉 잠겨진 수도꼭지가 새듯 눈물이 튀어나왔다. 밥을 먹다가도, 세수를 하다가도, 차 안에서, 그리고 타인에게 우리 아빠가 세상을 떠났다는 말을 설명하면서도.


서류를 작성하고 사망 처리는 허무할 정도로 빠르게 진행되었다. 고인 앞으로 된 재산 내역을 조회할 수 있는 서비스도 신청했다. 새로 발급한 가족관계증명서 옆의 아빠 이름 옆에는 사망이라는 표시가 붙어있었다. 아빠 기준의 가족관계 증명서에 있는 총 5명의 사람들 - 아빠의 생부, 할머니, 엄마, 나, 그리고 아빠 자신. 사람은 다섯이었지만 사망이라는 글자는 오직 하나뿐이었다. 그 하나가, 누구도 아닌 우리 아빠의 이름 옆에 붙어 있었다.


동사무소 직원분이 신분증은 반납하셔야 한다고 했는데 선뜻 넘겨주기가 힘들었다. 이건 그냥 제가 보관하고 있으면 안 될까요? 했더니 그럼 대신 사용하시면 안 되세요. 하고 대답하셨다. 나는 그걸 주머니에 넣고 만지작거렸다. 집에 돌아오는 길에도 거기에 있는 걸 손을 꽉 쥐어 몇 번씩 확인했다. 고작, 고작 주민등록증인걸. 아빠가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닌 걸 공인하고 오는 길이었던 주제에.




사고 관련 처리도 정신없이 진행되었다. 경찰이신 외삼촌께서 아신다는 법무법인을 소개해 주셨다. 나는 응급실에서 내가 아빠의 사고와 관련해 보고 들은 것, 당시 동행자가 진술한 타임라인과 내가 의뭉스럽게 생각했던 부분, 그리고 음주운전 당사자와 작은 아빠의 통화 내용, 그리고 소송과 관련하여 궁금한 점 등을 정리했다. 음주운전 당사자가 형사처벌받을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같은 차에 타고 있었다 응급실에서 도주한 동행자 S 또한 반드시 처벌받기를 원했다. 정황상 그는 여자와의 동행 사실을 숨기기 위해 구급차를 부르지 않고 치명상을 입은 아빠를 택시로 이송했던 것이었다.


로펌은 첫 방문이었다. 삼촌 두 분과 동행했다. 전관 변호사와 계약하기 위해 방문한 것이지만 변호사는 만날 수 없었고 팀장이라는 사람과 대화했다. 그분은 이런 일에 아주 익숙해 보이셨다. 일반적인 음주운전 교통사고에 빗대어 봤을 때 우리 경우에서는 예상 과실 비율과 소송 기간 등이 어떻게 될지, 보통 형사 합의금은 어떻게 되는지와 같은 것들을 설명하셨다.


합의. 합의라. 합의? 그분은 4-5천 정도에서 형사 합의를 보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했다. 4천? 5천? 기가 막혔다.


"저희는 합의를 원하지 않아요. 그리고, 사람이 죽었는데 4천? 5천? 우리 아빠 목숨값이..."


말을 하는데 또 왈칵 눈물이 터져 나왔다. 그분은 마음은 이해하나 보통 이런 경우 징역을 산다고 해도 기간에 불과해 유족들이 형사 합의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니 고민해 보시라고 말했다. 엄마와 눈이 마주쳤다. 장례식장에서 절대 합의를 하지 않을 것이라 울부짖던 엄마였지만 지금의 얼굴에서 지치고, 피로하고, 당황스럽고, 두려운 감정들이 읽혔다. 나는 엄마와 나의 마음에서 무언가가 허물어지고 종내는 흙과 모래가 되는 것을 목도하는 것 같았다.


모든 일은 직접 겪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다. 내 상식으로는 말도 되지 않는 일이 사실은 세상의 상식이었다는 걸 알게 될 때마다 늘 이렇게 절망해야 할까.


우리는 계약서에 서명하고 계약금을 송금했다. 지인을 통한 계약이라 수수료 비율을 낮췄다고 했던 것 같다. 그런 것에 대해 감사 인사를 하는 것도 이상한 것 같아 가만히 있었다. 돌아가는 길, 삼촌은 조만간 경찰서에도 방문해 담당 경찰을 만나봐야 한다고 말했다. 미리 번호를 주시며 나보고 호소문을 작성하라고도 말씀하셨다. 응급실 동행자와 관련해서는 업데이트된 정보가 있는지도 물어보시고, 사고와 관련하여 내가 처음 듣는 부분도 말씀해 주셨다. 내가 유족인데, 내가 아빠의 딸인데 들을수록 모르는 내용이 나오는 게 버겁고 죄책감이 들었다. 세 명의 삼촌과 이모부가 말씀해 주시는 내용이 조금씩, 다르게, 매일 추가되었다. 심장이 너무 빨리 뛰어 숨 쉬기가 힘들었다.




작은엄마와 나, 엄마는 부의금 봉투 뭉치를 꺼내 정리했다. 내가 멋모르고 돈을 한꺼번에 합치려고 하자 작은엄마께서 이걸 엑셀에 먼저 정리하자고 하셨다. 작은엄마가 이름과 금액을 불러주면 내가 입력했다. 방문 없이 인터넷 뱅킹으로 송금된 금액들도 따로 모아 추가했다. 잊고 있었던 그리운 이름들이 이따금 튀어나왔다. 지난날 누구보다 가까웠지만 얼굴을 비추고 명복을 빌기엔 이미 너무도 남이 되어버린 이름들.


어떤 분들은 부의금 봉투에 메시지를 남기기도 하셨다. 그중에는 문제의 아빠의 이모부가 'XX야, 고생했다. 이제 편히 쉬어라'라고 쓴 부의금 봉투도 포함되어 있었다. 엄마는 그날 내가 눈을 똑바로 뜨며 되바라지게 돌려줬던 봉투를 결국 다시 받아왔었다. 나는 그걸 알고 눈이 돌았었다.


'엄마 미쳤어? 엄마 아빠한테 죄짓는 거야. 엄마 아빠한테 떳떳해? 몇천 없다고 우리가 지금 죽어?'

'엄마도 받기 싫어. 엄마도 당연히 싫어. 근데 OO야, 살아야지. 어떡해. 살아야지.'


그래도 이 돈 언제가 되든 꼭 돌려줘. 나는 어떤 명분을 갖고도 그 돈을 정당화할 수 없을 것 같았다. 아빠가 무덤에서 일어나 피를 토할 일이었다. 그 말을 하는 엄마가 그렇게나 작고 초라해 보이지 않았다면 있는 대로 화를 내고 엄마를 다그쳤을 것이다. 하지만 엄마는 너무 약해 보였다. 엄마는 왜 이렇게 약하고 힘이 없어? 그 많은 일을 겪었는데도 왜 이렇게 약해. 엄마를 원망하면서도 내가 부끄러웠다. 무엇도 지키지 못할 만큼 힘이 없고 약한 건 나 또한 마찬가지였기 때문에.


다음날은 은행을 찾았다. 그 전날 나와 연락을 하다가 내가 죽고 싶다고 했는지, 너무 힘들다고 했는지 모르겠으나 내가 걱정이 되었던 사촌언니가 동행해 주었다. 나는 미리 정리해 온 부의금 쇼핑백을 열어 거기 든 현금을 하나하나 꺼냈다. 봉투에 들어있는 돈을 일일이 꺼내야 했기 때문에 시간이 오래 소요되었다. 어느샌가 또 울고 있었다. 직원분은 당황하신 것 같더니 부의금 봉투를 보고 침묵을 택하셨다.


아빠는 몇 개의 사업체 대표였고, 당연하게도 봉투가 많을 수밖에 없었다. 나는 그걸 일일이 꺼내고 봉투를 옆으로 치우면서 울었다. 작별 인사가 돈으로 환원되는 것이, 이것만이 산 사람의 도리라는 것이 서럽고 억울해서 울었다. 각기 다른 곳에서 온 돈이 내 계좌에 입금되면 그때부터는 의미나 출처가 사라지고 그냥 숫자가 되는 것이 웃기고 기막혀서 울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주차를 끝내고 온 사촌언니가 내 옆에서 눈물을 닦아주고 있었다. 나는 가만히 봉투 더미를 내려다보았다.


미련 두지 말고 버려야지

몇 개는 보관해야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생각들이 상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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