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퍼 Feb 20. 2024

아빠 인생 일대의 원수가 조문을 왔다

어떤 용서는 대리할 수 없다

나는 아빠의 사고가 있기 한달 전 아빠와 모처럼 진지한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거실에서 TV를 보며 저녁을 먹고 있던 아빠가 방에 들어가려는 나를 불렀다. 저녁과 함께 복분자를 곁들여 마시고 있던 아빠의 얼굴은 술로 벌겠고 표정은 고단하고 쓸쓸했다. 나는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집에는 들어오지 않고 바깥으로만 도는', '밖에서는 사업하는 사람들과 좋은 것만 먹기 때문에 집에서는 속이 편한 가정식만을 선호하는' 아빠가 저런 표정을 하는 것이 싫었다. 술에 취해 나를 앉혀놓고 두서 없이 주정하는 것을 들어주는 사근사근한 딸도 아니었다. 싫어, 하며 아빠를 지나치는데 평소라면 말 없이 방으로 들어가는 내 뒷모습만 바라봤을 아빠가 그날따라 고집스레 나를 붙잡았다.


"와보라니까."

"싫다고. 여기 있을테니까 말 해."

"아이, 오라면 좀 와라."


결국 나는 이상하게 집요하리만치 나를 붙잡았던 아빠를 이기지 못하고 거실 탁자 앞에 앉았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아빠는 좀 착잡하기도, 복잡하기도 한 얼굴이었다. 나는 늘 아빠에 대해 어느 이상으로 알거나 깊이 있는 대화를 하는 걸 꺼려했는데, 그건 아빠의 심연에 내가 감당하기 어려운 슬픔과 상처가 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내게 그랬듯 아빠에게도 그것은 '가족'의 존재만으로 해결되는 어떤 것은 아니었고 바로 그 부분이 나를 비참하게 했다. 


"아빠가 얼마 전에 대전에 다녀왔는데, 할머니가 재산 분배 얘기를 하셨어."

"재산 분배? 할머니가 상속해주실 재산이 딱히 없으시지 않아?"


아빠의 외할아버지는 부자셨고, 아빠의 외삼촌들도 부자였는데, 그들의 딸이며 누나인 장녀 할머니는 평생 돈을 무서워하며 살아오셨다. 할머니께서 우리 집에 잠깐 같이 사실 때 늘 엄마와 내가 씀씀이가 헤프고 아낄 줄 모른다고 못마땅해 하셨던 것을 기억한다. 고집이 강하고 힘 세시던 할머니는 어느 순간부터 이지가 흐려지시고 자기 의견이나 선호랄 게 없어지셨다. 사람들은 할머니도 이제 노인이라 그렇다고 말했지만 내 눈에 할머니는 무언가를 포기하고 놓아버린 사람처럼 보였다. 나는 엄마도, 아빠도 불편해하는 좁은 할머니 집에 갈 때마다 본래 요리 실력이 출중하셨던 할머니가 아끼고 아껴서 꺼내주시는 음식들을 겨우 삼켜내곤 했다. 겨울이면 수도가 어는 낡은 주택에서 사시고, 음식을 버리지 않고 화장실이나 냉동실에서 썩히시는 할머니에게 재산이 있다니.


"아빠도 그런 줄 알았는데. 할머니가 이것저것 일하시면서, 참... 평생 모아두신 것들이 있으시더라. 그 노인네가... 아빠도 놀랐어."

"무슨 일? 청소나 이런거? 그런 걸로 큰 돈을 어떻게 모으신거야?"

"그런 것도 있고, 할머니 젊으셨을 때부터 안 쓰고 모으신거야. 아파트도 있고, 뭐도 있고, 선산도 있는데... 아빠는 선산만 가져오기로 했어."

"그거 재산 물려주시지 말고 그냥 지금 다 팔아서 할머니 돌아가실때까지 편하게 사시라고 하면 안 돼?"


나는 평생을 고생하며 외롭게 사신 할머니에게 자식들이 무언가를 받는다는 행위 자체가 불편하고 껄끄러웠다. 이제 뭘 먹어도 맛있는지 모르겠고, 뭘 봐도 딱히 좋은 지 모르겠다고 하시는 할머니가 남은 생을 조금이라도 편안하고 즐겁게 사시는게 낫지 않나 싶었다. 아빠는 할머니의 노후는 자신이 책임질 문제라고 했다. 당연히 그렇겠지, 그럼 작은 아빠나 삼촌이 그러겠는가. 나는 요양시설에 입원해 계시는 할머니를 면회하는 우리 가족을 어렵지 않게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이런 얘기를 벌써 해야하는 거야? 할머니 아직 정정하시잖아. 나 그리고 재산 분배 이런 얘기 별로 안 듣고 싶어."

"아이, 그래도 들어. 너도 언젠가는 니 얘기가 되니까. 아빠는 자식이 너 하나밖에 없잖아. 나중에는 아빠 재산이나 모든 게 다 네 것이 될 거야."

"그리고 선산 이런 얘기 들어도 내가 뭘 알아. 아빠가 알아서 해."

"아니, 얘가. 다른 건 몰라도 산은 잘 관리해야 되는 거야. 관리해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너는 가끔 찾아가보기만 하면 돼."

"왜. 그거 나중에 개발돼?"

"그런 것 때문이 아니야. 산은..."


아빠는 답지 않게 큰 소리를 내며 말했다. 내가 들어야 할 얘기라는 투였다. 아빠는 내가 어린시절부터 지금까지 나에게 강압적으로 무얼 하라거나 하지 말라거나 한 적이 없었다. 예의나 가치관에 대해서만 가끔 설교할 뿐이었다. '해야 한다'라니, 나에게는 너무 먼 얘기라 무관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다 아빠가 할 일 아닌가. 나는 산이고 뭐고 관심도 없었고, 상속이고 재산이고 아빠가 아빠가 떠난 뒤의 얘기를 하는게 무서웠다. 아빠를 생각할 때 떠오르는 여러가지 감정 중 가장 큰 것이 사랑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어쨌든 아빠는 우리 집의 가장이자, 연약한 엄마와는 달리 내가 어른으로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할머니의 재산 상속으로 시작된 얘기는 다른 방향으로 흘렀다. 얘기를 묵혀두면 조그만 구멍만 생겨도 그 밖으로 쌓였던 것들이 줄줄 새는 법이다. 아빠의 사업이 잘 되면 갈 이사 얘기, 엄마 아빠의 노후 얘기, 그리고 아빠의 한과 떼어놓을 수 없는 아빠의 외삼촌의 얘기... 나는 아빠와 근 몇년 중 유례없이 긴 대화를 하는 중이었다.


"참나, 니가 뭘 그런 걸 생각하냐. 아빠는 아빠가 알아서 하고, 엄마도 아빠가 책임질 건데."

"그러니까! 내 말이 그거야. 엄마 아빠 노후 대비는 아빠가 다 해. 그리고 나도 일하기 싫으니까 아빠가 용돈줘."


나는 곧 죽어도 백수로 살 깜냥은 안 되는 야망충인 주제에 괜히 엄마와 아빠에게는 돈 때문에 일할 바에야 백수로 살다 죽겠다고 엄포를 놓곤 했다. 9시에 출근하자마자 6시 퇴근을 기다리며 살 생각을 하면 죽고 싶다는 얘기를 했다. 아빠는 내가 그런 식으로 얘기할 때마다 딱한 눈으로 'OO야, 그럼 일 하지마. 자식이라고는 너 하나 뿐인데, 아빠가 너 하나 책임을 못 지겠니. 달마다 용돈을 줄테니까 그걸로 너 하고 싶은 거 하고 살아. 글 쓰면서. 아빠는 우리딸이 작가가 되어도 좋겠다고 생각해'. 그럼 옆에서 엄마는 속이 뒤집어진다는 얼굴을 했다. 그러니까 그건 사실 나의 어리광이었다. 어른이 되어도 어느 정도는 아빠의 우산 아래 살고 싶다는 표현. 그리고 그러기 위해서는 아빠가 지금보다 돈을 많이 벌어야 한다, 현실에 좀 살라는 압박.


그러다 우리는 '한'에 대해 얘기하기 시작했다. 어쩌다 이 주제가 나온지 모르겠다. 남은 인생에 대해 얘기하다 보니 서로가 가진 삶에 대한 가치가 충돌한 것 같다. 나는 대학에서 내가 대단한 공부를 하는 양 엄마와 아빠를 답답해했고, 내게 물려준 유산과도 같은 트라우마나 열등감 때문에 늘 억울함이 있었다. 반면 아빠의 삶의 동력은 누군가에 대한 분노라는,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방식으로 작동되었다. 그러니까 우리 사이에는 늘 억겹같은 거리감이 있었다.


"그러니까, 나한테 한을 물려주지 말라니까?"

"참나. 야, 너 아빠랑 엄마가 어떻게 산 지 알아? 너는 정말 아무것도 몰라. 니가 무슨 한이야."

"한이나 복수가 인생의 목적이 되면 안 된다니까? 인생은 행복하라고 사는거야. 누굴 미워하면 아빠 손해야. 놓아주고 앞을 봐야지."

"아니? 아빠는 복수를 위해 살 거야. 아빠는 아빠 외삼촌 절대 용서 못해. 아빠한테 어떻게 했는지 죽을 때까지 하나도 안 잊어버릴거야. 다 갚아줄거야. 너는 아무것도 몰라. 이게 니 말대로 잘못된 걸 수도 있어. 알아. 그래도 아빠는 안 바뀌어."

"아니 그러니까..."


나는 아빠가 속 없는 것처럼 구는 것 같다가도 이럴 때마다 진심으로 머리가 하얘지고 복장이 터질 것 같았다. 아빠가 누구도 보이지 않고, 어떤 말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나 따위는 자신의 인생에서 중요한 사람이 아니고, 만약 자신이 틀렸다 한들 절대 아무것도 바꾸지 않겠다는 아빠 앞에서 나는 아무 힘이 없었다. 이건 아빠에게 맞냐/틀리냐의 문제가 아니었다. 아빠는 복수만을 위해 살았다. 그것이 자신의 존엄과 행복과 평화에 절대적으로 우선했다. 나에 대한 사랑 또한 그 원대한 목표 앞에서는 너무 미미한 듯 느껴졌다.




아빠가 어릴 때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이혼하셨다. 나는 할아버지를 죽은 사람으로 알며 살았다. 차마 할머니와 아빠에게는 물어보지 못했지만 삼촌에게 궁금증을 이기지 못하고 '할아버지는 죽었어요?' 했던 어린날, 삼촌이 '그래... 죽었지. 죽은 사람이지.'라고 답했기 때문이다. 나는 친할아버지는요? 하는 물음에 늘 돌아가셨어요, 하고 살았다. 할아버지를 언급하지 않는 게 이 집안의 불문율이라 두 번 다시 그 이름을 꺼내지도 궁금해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할아버지는 살아계셨다. 다만 이혼 후 (그 시절로서는 대단히 드물게) 양육권을 넘기고 양육에 대해 일절 관여하지 않고 없는 사람처럼 사신 것 뿐이었다. 아빠는 할아버지와 연락이 닿았는지 언젠가부터 가끔 할아버지를 만나고 돌아왔다. 그는 포털 사이트에 이름을 치면 나오는 유명인이었다. 대단한 사람이라도 된 양 사람들을 내려다보고 젠체를 하는 얼굴이 놀랍도록 삼촌을 닮아있었다.


그렇다고 남겨진 할머니가 양육을 하신것도 아니었다. 할머니는 떠났고 친가에 맡겨진 삼형제는 구박데기가 되었다. 삼형제의 성격이 모두 달랐으니, 모두가 상처입은 방식은 조금씩 달랐다. 그들에게는 엄마도 아빠도 없었다. 누구도 그들을 칭찬해주지도, 사랑해주지도 않았다. 아빠는 10대때부터 일을 했다. 20대때는 아빠의 외삼촌이 손을 써 군대에도 가지 않았다. 작은 엄마의 표현을 빌리자면 '노예'처럼 일했다. 잠은 하루에 서너 시간, 더울 때는 더운 곳에서 일하고 추울 때는 추운 곳에서 일했다. 외할아버지는 아빠에게 죽음과 같은 노동을 강요하고 겨우 죽음을 면할 만한 임금을 주었다. 내가 생기고 아빠는 결혼했지만, 이틀 신혼 여행을 다녀온 후 그가 겨우 만든 가족과 분리되어 살아야 했다.


나는 아빠가 당한 폭언과 저항을 상상치 못하게 하는 가스라이팅, 아무도 구해주지 않는 환경과 지옥을 '집'으로 불러야 했던 설움과 공포에 대해 부분적으로만 안다. 다만 한 번 안아준 적도 없이 냉정했던 할머니가 다시 집으로 돌아왔을 때, 아빠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고 그것에 아빠가 평생 배신감을 느꼈던 것은 알고 있다. 내가 성인이 된, 아주 먼 시간이 흘렀을 때 할머니는 사실 그때 도망갔던 것이 아니라 돈을 벌러 간 것이며, 단 한번도 잊은 적도 버린적도 없다고 우셨다. 너무 먼 얘기였다. 감히 누가 누굴 용서할 수 있을까. 아빠는 대전에 들렀다 돌아오는 길에 때때로 욕지기를 참지 못했다. 앞좌석에서 엄마와 아빠는 내가 모르는 얘기를 했고, 엄마는 내가 듣는다며 아빠를 말렸다. 아빠는 '내 가족만 챙길 것이다'라며 다짐하듯 말하기도 했다. 나는 아빠가 다정한 사람임을 알아 그걸 믿지는 않았다.


나에게 얼마의 시간이 주어지던 과연 내가, 내가 아는 아빠의 상처, 고통, 수치심, 절망에 대해 얼마나 쓸 수 있을까? 얼마나 솔직할 수 있을까? 그리고 아빠는 내가 그의 수치스러운 과거에 대해 솔직하길 바랄까? 그것은 내 것이 아니라 그만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아빠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 이 얘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아빠의 영혼에 가장 깊이 박힌 가시들을 얘기하지 않고는 아빠에 대한 어떤 진실에도 접근할 수 없으니까.


아빠는 그날 아빠의 아빠에 대해서도 얘기했다. 가끔 만난다, 시간이 지나니 이해도 된다고 했다. 나는 할머니를 생각했다. 목을 빳빳이 세우고 대들었다.


"그래서 그 사람이 아빠에 대해, 할머니에 대해 무슨 도리를 했는데?"

"그땐 다들 각자의 사정이 있었어."

"말 돌리지 마. 그래서, 할머니한테 최소한의 경제적 도리를 했어?"

"..."

"했냐고."

"아니."


아빠는 할아버지를 자랑스러워했다. 아빠의 사후 알게된 것이지만 작은아빠도 그러셨다고 한다. 할아버지는 선비 집안의 지식인이었다. 여즉 갓과 한복을 입었다. 훈장님 내지는 선생님이라고 불리며 TV며 유튜브에 나왔다. 아빠는 시험을 잘 봐도 아무도 칭찬해주는 어른이 없는 환경에서 자랐다. 밥을 먹고, 몸을 뉘이는 모든 것에 눈치를 봐야했다. 신나서 집에 들고 온 시험지를 아빠는 잘게 찢어버렸다. 그렇게 고등학교를 간신히 졸업하고 평생 배움을 아쉬워하며 살았다. 그런 아빠에게 '선생'으로 불리는 '아버지'의 존재는 얼마나 기꺼웠을까. 존재 가치를 확인받는 느낌에, 뿌리가 생긴 느낌에 얼마나 자랑스러웠을까. 


아빠의 유품을 정리하며 족보에 대한 두꺼운 책을 몇 십권은 보았다. 시간이 지나 끊긴 부분은 아빠가 따로 수기로 정리한 부분도 있었다. 기가 막혔다. 모든 것이 우스웠다. 그리고 아빠를 꼭 안아주고 싶었다. 칭찬이 고프고 부모를 바랐던 그 어린애를. 자기를 버린 부모를 자랑스럽게 여기고, 또 사랑하는 어린애를.


그러니 나는 누구도 용서할 수 없다.




OO야, 하고 엄마가 나를 불렀다. 엄마는 친가 어른들, 그러니까 할머니의 형제 자매분들이 계시는 테이블 앞에 앉아있었다. 그리고 엄마의 앞에는 한 남자가 침통한 표정으로 앉아있었다. 얼굴을 몇 번 본적도 없지만 나는 그 분위기를 통해 그 사람이 누구인지 어렵지 않게 알아차렸다. 아빠의 '그' '외삼촌' 이었다. 엄마 앞에는 봉투가 하나 있었다. 천만원짜리 수표 세 장이 납작하게 들어있었다. 봉투에는 글씨도 쓰여 있었다. 'A, 고생했다. 이제 편히 쉬어라.'


"OO, 할아버지 알지. 아빠랑 같이 일했었던 그 외삼촌이셔."

"알지. 왜 몰라."

"할아버지께서 장례 비용에 보태라고 주셨어."


나는 단어를 씹어 뱉었다. 알지, 왜 몰라. 장례 비용은 천만원 전후가 든다. 그러니까 이건 내게 일종의 싸구려 위자료처럼 느껴졌다. 죽은 아빠가 벌떡 일어나 피를 토할 일이었다. 머리가 차갑게 식었다. 엄마는 불편한듯 고개를 숙이고 있었지만 나는 고개를 쳐들었다. 눈을 똑바로 뜨고 거기 있는 어른들, 그리고 외삼촌을 쳐다봤다. 


나는 생각했다. 아빠의 죽음이 당신들에게 면죄부가 될까?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런데 저희 이 돈 못 받아요. 아빠랑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아요. 저는 아빠를 대신해서 누구를 용서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저는 아빠에게 '한'을 물려받지는 않았어요. 아빠는 평생 괴로워 했지만, 저는 괴로워하면서 살지 않을거예요. 그런데 제가 이걸 받으면 아빠가 죽어서도 눈 못 감을 것 같아요. 그러니까 이 돈은 받지 않겠습니다."


나는 어른들이 '되바라졌다'고 말하는 눈을 뜨고, 예의를 갖춰서, 또박또박 흔들리지 않고 말했다. 그리고 봉투를 밀어서 돌려주고, 엄마의 손을 잡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곳의 모두가 나를 쳐다봤다. 오직 외삼촌만이 나와 눈을 맞추지 못했다. 그는 내게 할아버지였던 적이 없다, 언제나 아빠의 '외삼촌'이었다.


다리를 태웠구나, 생각했다. 그러나 일말의 후회도 없었다.




밖에서 작은아빠가 누군가를 달래는 소리가 들렸다. 넉살좋은 목소리가 향하는 방향은 외삼촌이었다. 나는 그걸 얼마간 지켜봤다.


"나 때문인 것 같아서..."

"아유, 뭐 그런 말씀을 하세요. 형도 다 용서했을 거예요."

"너무 미안해서..."


그러나 그 대목에서는 결국 참지 못하고 작은아빠의 소매를 잡았다. 아빠가 씨뻘건 눈으로 내게 '죽어도 용서 못 한다'고 말 한지 채 한달도 되지 않았다. 감히, 누가, 아빠 대신 용서를 말하는가. 작은아빠와 외삼촌이 나를 쳐다봤다. 나는 아니에요, 아니에요. 말했다. 


"작은아빠. 저 사람한테 용서같은 말 안 하셨으면 좋겠어요. 아빠가 저한테 용서 안한다고 한 게 저번달이에요. 저 사람이 아빠한테 무슨 짓을 했는데..."

"하. OO야. 니가 어려서 그래. 니가 아직 뭘 몰라서..."

"그래도 용서같은 말은 하지 마세요."


그 대화 이후 작은아빠는 장례를 치르는 내내 한번도 내 얼굴을 쳐다보지 않았다. 나는 시간을 돌린다면 어떻게 했어야 했는지 수 없이 생각했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그것이 내 최선이었음은 변하지 않는다.

이전 05화 겨울바람, 플라스틱 꽃, 외로운 사람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