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서퍼 Feb 20. 2024

겨울바람, 플라스틱 꽃, 외로운 사람

아빠의 기일이다, 아빠가 세상을 떠나고 꼬박 3년이 흘렀다

아빠의 기일이라고 엄마와 내가 특별히 하는 것은 없다. 아빠를 수목장 한 절에 얼마간의 제사 음식을 사가서  그릇에 담고 나무 앞에서 절을 두 번 한다. 준비한 조화를 바꿔 끼운다. 전이며 과일이며 하는 음식은 엄마 몫이고, 조화는 내 몫이다. 음식도 전부 산 것이고 조화도 인터넷에서 쉽게 골라 주문한 것이니 마음속으로는 성의니 가성비니 하는 단어가 훅훅 지나간다. 


다닥다닥 붙은 어린 소나무들 중 아빠의 소나무에 걸린 우리들의 사진과 작은 비석도 물티슈로 닦고, 지저분한 풀도 좀 뽑고, 한 평도 되지 않는 아빠의 구역이 단정해졌다 싶으면 엄마와 나는 더 이상 무얼 해야 할지 알지 못해 얼마간 침묵한다. 머무르는 시간은 체감상 십오 분이 되지 않는데, 엄마와 나는 왕복 두세 시간 걸리는 그 길을 수십 번 오가면서도 여즉 그 십 분을 어떻게 채워야 할지 모른다.




아빠를 생각하면 떠오르는 기억들이 있다.



어린이집에 다니던 나는 아빠를 세상에서 가장 사랑했다. 수많은 딸들이 그러하듯 나 또한 아빠와 결혼하는 것이 꿈이었다. 그렇게 말하면 아빠는 그러자며 웃다가 엄마의 째림을 받았다. '아빠는 엄마랑 나 중에 누가 더 좋아?' 하면 아빠는 '아빠는 OO가 좋지'라고 말하며 엄마를 슬쩍 살폈다. 나는 곧바로 그 말을 잊었는데, 엄마는 삐졌었던지 아빠가 나중에는 '아이, 애는 또 낳을 수 있지만 당신은 하나지'하며 엄마를 달랬다. 어린 나는 들어도 알아듣지 못할 것이라 생각했나 보다. 


내색하지 않았지만 그 말이 내심 듣기 좋았다. 서로 사랑하는 부모님이 아이에게 얼마나 큰 안심으로 다가오는지 부모들은 알까. 내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빠가, 사실은 내가 아빠보다도 더 사랑하는 엄마를 사랑하고 있다는 게. 아무것도 모르는 척 밥을 먹으면서 포만감을 느꼈다. 그 배부름의 이름은 행복이었다.



내가 초등학교에 다닐 때까지 우리 막내 이모 부부는 청평에서 편의점을 하셨다. 나는 청평에 가면 내가 좋아하는 사촌언니와 책을 읽고, 커다란 편의점을 구경하고, 사촌 오빠가 포켓몬 스티커를 잔뜩 붙여둔 문 뒤에 앉아 게임하는 것을 구경할 수 있어 좋았다. 청평에 방문했던 어느 어린 날, 뛰어다니다 정신을 차리니 아빠가 없었다. 바람 쐬나 봐, 누군가 한 말에 모기가 우글거리는 밖으로 아빠를 찾으러 나갔다. 여름밤이었다. 아빠는 너무 멀지 않은 도로변에 쭈그려 앉아 담배를 피우고 있었다. 내 인생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목격한 아빠의 흡연이었다. 아빠도 담배를 필 줄 아는구나, 나는 아빠를 따라 옆에 쭈그려 앉았다. 낯선 모습이 어색해 쭈삣거렸다. 


'아빠도 담배를 펴?'

'아니. 오랜만에 피워 보는 거야'


아빠는 더 말이 없었고, 나는 아빠가 어린 내가 가늠하지 못하는 이유로 쓸쓸하다는 것을 알아보았다. 어리광을 부려 다시 시끌시끌한 안으로 데려가 아빠의 그늘을 못 본 척하고 싶기도 했고, 단어조차 모를 때지만 아빠의 외로움을 엿본 것 같아 덜컥 겁도 났다. 내가 성인이 된 후, 아빠는 내게 오직 금연만을 당부했다. 기질적으로 정도에서 크게 벗어나는 일이 없던 내게 아빠가 특정 무언가를 들어 '하지 말라'고 한 것은 사실상 처음이었다. 물론 나도 담배를 몇 번쯤 피워본 경험이 있지만, 아빠가 떠난 후로는 누군가 담배를 권할 때면 그 목소리는 아빠가 내게 당부한 유일한 언령처럼 따라붙는다. '담배는 정말 피면 안 돼, OO야.'



내가 중학생이 되기 전까지 아빠는 자주 볼 수 없는 사람이었다. 아빠는 지방에서 일하다가 7일에서 10일 사이에 한번 집을 방문했다. 그것도 밤에 도착했다 다음날 날이 밝기 전 나가는 식이었다. 어린이들에게 가장 큰 자랑거리는 부모다. 나는 친구들에게 우리 아빠를 사달라는 대로,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는 사람으로 자랑했다. 그건 정말이었다. 아빠는 한 번도 날 나무라거나 혼내지 않고 오냐오냐 키웠다. 잘 보지 못하는 딸에 대한 미안함이었을까, 아빠 당신이 어린 시절 바랐지만 누구도 해주지 않았던 것을 내게 해주고 싶다는 보상심리였을까. 그렇지만 무엇보다도 애정이었을 것이다. 


우리 아빠는 스크류바가 먹고 싶다고 하면 마트에 있는 스크류바 20개를 몽땅 사 오는 사람이었고, 젤리나 과자가 먹고 싶다고 하면 마트를 돌며 매대를 동내는 사람이었다. 나는 마트에 드러눕지 않아도 원하는 장난감을 모두 가질 수 있었고, 과하다 싶은 아빠의 공세는 아빠가 눈 감는 날까지 변하는 날이 없었다. 아빠가 내게 준 어떤 것 중에도 시원찮거나 허접한 것이 없었다. 집안 사정이 좋지 않은 때에도 나는 언제나 친구들 중에서 가장 주머니가 넉넉했다. 친구들 중 아이팟도, 스마트폰도, 조던도 내가 가장 먼저 구매했다. 


아빠는 내게, 물건 자체보다 여유와 충만함을 선물하고 싶었을 것이다. 그깟 물건이 없어 느낄 초라함이나 자격지심을 평생 몰랐으면 했을 것이다. 입이 짧은 내가 두어 입 먹다가 방으로 들어갈 것을 알아도, 별로 맛있는 줄 모르겠다며 얄미운 소리를 해도 아빠가 알아줬으면 했던 건 부모로부터 '과하게' 내리는 사랑 그 자체였을 것이다.



아빠가 떠나기 몇 주 전, 막학기였던 것 같다. 도서관에서 졸업 논문을 쓰다가 집으로 가는 길, 아파트 단지에서 휘청이며 걷는 커다란 남자를 봤다. 왜 저래? 하고 점점 거리를 좁히는데 뒷모습이 낯설지가 않았다. 흰머리가 많은 덥수룩한 파마머리, 큰 덩치지만 술에 취해 약간 굽은듯한 어깨, 어울리지 않는 얇은 파란색 계열의 남루해 보이는 자켓. 술에 취해 흔들리며 걷는 사람들은 왜 초라해 보이는 걸까? '아빠가 아니었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과 '아빠구나'하는 직감이 동시에 들었다. 그리고 그건 아빠가 맞았다. 


아빠는 아빠가 세상을 떠난 그 달 내내 술을 마셨다. 아무리 연말이라지만 정도가 심해서 엄마와 나는 아빠를 보기만 하면 눈을 홉뜨고 잔소리를 했다. 술에 취한 아빠는 내게 또 무슨 소리를 들을까 걱정이 됐는지, 아니면 나는 사실 안중에 없고 그냥 세상사가 힘들었는지 눈을 피하고 픽픽 한숨을 쉬었다. 그때쯤 나는 아빠를 거의 포기한 상태였으므로 별 대거리 없이 같이 엘리베이터를 기다렸다. 그러나 얼굴이 빨개진 아빠를 보자니 유치원에 다니던 시절의 어느 기억이 떠올랐다. 


엄마와 아빠가 지인들과 술을 마시다 주량을 크게 넘긴 아빠가 길거리에서 휘청이고, 아무 곳에나 기대 자려고 해서 화가 난 엄마는 집으로 떠나는 바람에 어린 내가 울며 아빠를 데리고 집에 왔었다. '뭐 좋은 거라고 술을 그렇게 마셔?' 나는 차갑게 말했다. '그러게.... 뭐 좋은 거라고 술들을 그렇게 마시는지 모르겠다' 아빠가 허공에 대고 답했다. 나는 회사의 대표로서 아빠가 얼마나 많은 접대를 해야 하는지 이해해주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그리고 우리는 말없이 집으로 돌아온다.



어린 나는 아빠의 차에 타는 것이 좋았다. 아빠는 주로 SUV를 많이 탔는데, 아빠의 커다란 차에 힘들게 올라타면 나도 큰 사람이 된 것 같았다. 초등학생이 되어 처음 구운 CD를 아빠의 차에 넣고 듣는 것도, 아빠를 생각하며 CD를 굽는 것도 좋았다. 뒷자리에서는 늘 엄마가 자고 있고, 나는 아빠의 차에서 늘 쉴 새 없이 조잘거렸다. 아빠는 늘 한 손으로는 내 손을 잡고 운전했다. 축 늘어진 손을 잡고, 손등에 입을 맞추고, 손이 고생 하나 묻지 않고 예쁘다고 말했다.


 아빠 차의 조수석에 앉았었던 기억들이 떠오른다. 자주 보지 못하는 아빠에게 그간의 내 일상에 대해, 새로 사귄 친구에 대해, 또 학원 선생님들에 대해 빠짐없이 알려주고 싶어 헥헥거리며 말했던 기억. 늦잠으로 재수 학원 셔틀버스를 놓칠 때마다 아빠가 눈곱도 떼지 못하고 날 학원에 데려다줬던 기억. 아빠는 운전을 많이 하니까, 또 잘하니까, 운전자를 배려하지 않고 엄마와 나는 숙면하고 아빠는 우리를 절대 깨우지 않은 채 길고 지루한 고속도로를 껌과 환기로 버텼던 기억. 


그리고 나는 언젠가부터는 아빠의 차 조수석에 타지 않았다. 아빠와 대화하고 싶지 않았으니까. 둘이서 차를 탈 때도 뒷자리에 앉아 눈을 감았다. 그리고 아빠의 소원, 오토바이든 차든 바퀴 달린 것에 환장하는 아빠의 첫 번째 소원은 내가 운전하는 차에 타보는 것이었다. 아빠가 스무 살 나에게 바랐던 것은 대학 합격증보다 운전면허증이었다. 나는 아빠가 죽고 나서야 겁에 질린 엄마에 의해 운전학원에 등록한다. 아빠의 소원이라는 거창한 것에 부응하기 부끄럽다는 이유로 미루던 운전학원에서, 교통사고에 대해 설명하는 강사의 목소리를 들으며 후회에 잠겨 울었다. 아빠의 소원은 영영 이루어지지 않고 끝나버렸다. 내가 그렇게 만들었다.



외가의 이모들은 하나같이 실패한 결혼을 했다. '안나 카레니나'에서 '행복한 가정은 비슷한 이유로 행복하지만 불행한 가정은 저마다의 이유로 불행하다'고 하는데, 이모부들은 정말 모두 저마다의 이유로 이모들을 불행하게 했다. 이모들은 엄마를 부러워했다. 점잖고, 돈 잘 벌고(엄마는 거품을 물었지만), 듬직하고, 사람들한테 잘하는 아빠와 결혼한 엄마가 부럽다는 것이었다. '너는 복 받은 줄 알아야 해', 엄마가 그런 소리를 종종 들었던 것을 기억한다. 


아빠는 평생을 실수 한번 하지 않고 외가에서 'A서방' 역할을 잘 해냈다. 용돈을 후하게 주는 이모부 혹은 고모부, 아이들에게 친절하고 잘 놀아줘서 어린아이들도 아빠를 좋아했고, 자기주장을 내세우기보다 상대를 존중할 줄 알았다. 아빠는 모든 것을 묵묵히, 티 내지 않고 했다. 외가에 가면 늘어지게 늦잠을 자는 엄마가 양아치에 불독, 왕싸가지고 나는 그녀의 왕싸가지 딸이라면 아빠는 누군가 돌아가시면 땀을 뻘뻘 흘리며 땅을 파고 궂은일을 자처하는 유형이었다. 


모두가 아빠를 좋아했다. 어딜 가든 아빠는 '호감형'인 사람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런 아빠가 자랑스러웠던 것 같다. 이모들의 부러운 소리를 들으면 아니라고 하면서도 내심 웃음을 숨기지 못했던, 'OO아빠가 해' 하고 일감을 미룬 채 얄밉게 웃으며 따뜻한 안으로 쏙 들어가던 엄마가 그랬듯.




기억은 진실이 아니다. 그런 주제에 왜곡되고 오염되고 끝내는 바래져서 잊힌다. 어떤 기억들은 소중히 여기며 오래도록 간직하고 싶고, 고통스럽고, 나를 죽이고, 또 나를 사랑받았다고 여기게 하며, 결국엔 어떤 것도 정리되지 않았음을 깨닫게 된다. 아빠와 나의 기억은, 아빠에 대한 나의 기억은 더 이상 새롭게 만들어질 수 없다. 업데이트되지 않고 다만 회상을 통해 끝없이 갱신되고 변화되어 언젠가는 나 또한 그것을 알아보지 못하게 될지도 모른다.


아빠에 대한 기억과 진실을 들춰내는 게 무서웠다. 정리되고 포장되지 않은 것들의 심연을 들여다보면 그 끝에 무엇이 있을지 상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사랑, 이면 남들 보기엔 좋겠다. 연민, 그렇다고 하기에는 여즉 너무도 격정적이다. 분노, 하지만 그것은 상당 부분 엄마를 대리한 것이다. 평생 이런 감정들에 순서대로 휘둘리게 될까, 이름을 붙여주면 나을까, 괜찮아지는 건 괜찮은 것이 맞는걸까, 잘 모르겠어서 그냥 쓴다. 


다만 모르는 것들 사이 내가 유일하게 알 수 있는 것은, 그 끝에 무엇이 있는지와 관계없이 나는 그를 영원히 기억할 것이라는 것이다. 영원히.


이전 04화 곡소리는 영혼을 토해낸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